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조선후기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가장 정통적인 방법은, 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에 관한 기존의 연구를 읽고 자기 나름의 假說을 세운 뒤, 그 문제에 관한 1次史料를 수집・정리・분석하여 얻은 결론을 가지고 스스로 설정한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연구자들이 흔히 선택하는 일반적 방법이다. 또 한 가지의 방법은 자기시대가 당면한 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한 평생을 바친 위대한 사상가의 저작에 제시되어 있는 가설을 가지고 그 시대의 문제에 접근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설정한 가설이니까, 그 가설의 타당성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같은 시대의 같은 문제를 두고서도 사상가들 사이에 서로 다른 가설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 이유는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라 하더라도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과제에 대한 자기인식에 따라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대한 사상가의 가설이라고 하더라도, 그 가설의 타당성은 여러 가지 방면으로 검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약용이 조선후기의 위대한 사상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經世學에 관한 대표적 저작이 『경세유표』라는 점에 대해서도 異議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경세유표』에서는 많은 가설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여러 작은 가설들이 그 위에서 정립되어 있는 이론적 기반이 되는 중심적인 가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교經典의 보편적인 가설인, 經田이 곧 仁政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孟子에 의하여 제기되고, 朱子에 의하여 부연되었으며, 磻溪에 의하여 계승되었는데, 茶山은 이 가설에 입각하여 정전법을 비롯한 몇 가지의 경전 방안을 체계적으로 전개했다. 정약용이 『경세유표』의 중심적 이론으로 제시한 井田法은 전지를 公田 1畉 와 私田 8畉로 구획함으로써 경전을 가장 정확하게 행할 수 있는 경전제도이다. 정전으로의 전지구획은 평야에서만 가능하지만, 정전으로 구획할 수 없는 전지에 대해서는 魚鱗圖로써 경전한다. 그리고 정전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方田法과 어린도라는 양전기법을 도입하면, 전지를 정전으로 區劃하지 않더라도 정확한 경전이 가능하다.
그러면, 정약용은 왜 경전을 자기시대의 최대의 과제로 삼으려고 했을까. 그것은 조선의 경전제도인 結負制를 가지고서는 정확한 경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磻溪와 楓石을 비롯한 실학자들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識者들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결부제로써 정확한 양전이 불가능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결부가 풍흉과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 수시로 변동하는 수확량(즉 田稅)의 단위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서는 전지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요, 둘째는, 결부제에서는 측량의 방법으로 5가지의 田形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5가지 전형으로 토지를 구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쓸모없는 방법 즉 死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부제의 결함이 가져오는 결과는 참으로 참담한 것이었다. 戶籍과 量案이 왕정을 위한 기본자료인데, 결부제하에서는 전지의 실태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못하기 때문에, 양전을 기반으로 작성되는 이들 장부가 모두 虛簿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인민들은 정부의 恣意的인 수탈로 빈곤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데 대하여, 국가는 빈약한 재정수입 때문에 관리의 절반에 대하여 그 빈약한 祿俸마저도 지급할 수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안정적인 常備軍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국가가 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재정과 군사라는 기초적 조건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전제에 의한 경전이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은 그 이론적 정합성, 학설사적 계승성 및 현실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정전법 그 자체는 근대학문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경세학이 주로 義理를 추구하는 經學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정전법도 의리추구를 그 구성요소로 하고 있다. 『시경』의 “우리 공전에 비 와서 드디어 우리 사전에 미치는(雨我公田, 遂及我私)” 시혜적 관계라든가 “공전에 씨를 뿌리기 전에 감히 사전에 씨를 뿌려서는 안 되는(公田不播, 不敢播其私)” 先公後私的 관계가 바로 그런 따위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혜적 혹은 선공후사적 관계 속에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근대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身分的 관계가 숨어 있다. 그러므로, 근대학문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정전제를 분석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러한 의리적 관계를, 맹목적으로 追求하거나 追隨해서는 안 되며, 비록 그것을 연구의 대상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그 윤리학적 혹은 정치경제학적 含意를 냉철하게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서에서는 현재 한국실학의 연구가 빠져 있는 의리추구적 경향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경세유표』에서는 위와 같은 경전뿐만이 아니라 왕정의 여러 분야를 제시하고 그러한 왕정을 수행하기 위한 관제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점에 관해서는 序章에서 충분히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본서의 서술방법에 관한 약간의 기술적 문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언급해 두기로 하겠다. 첫째, 본서에서는 『경세유표』로부터의 자료인용이 아주 많다. 자료의 인용이 많은 이유는 가능하면 정약용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취지를 충실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漢文자료는 모두 필자 스스로 번역하고 그 원문을 脚注로 제시했다. 번역에 있어서는 기존의 번역과 斯界의 전공자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나, 번역은 필자의 이론전개와 논리적 정합성이 있도록 행하려고 노력했다. 셋째, 문장에서는 한자를 노출시키고, 文體는 한글로의 풀어쓰기에 힘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연구의 현단계에서는 정약용의 경세학을 한자로 표기하지 않고서는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웠고 또 이 책의 주된 독자층을 조선후기와 한국실학의 연구자로 잡았기 때문이다. 넷째, 본문에서 정약용을 비롯한 일반 연구자들에 대한 敬稱은 일체 생략했다. 혹시 경칭의 사용이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은 6·7년 전부터이다. 그러나, 그 집필의 준비는 나의 學問的 生涯와 같이 시작되었다. 그간 『목민심서』를 번역하고 『경세유표』를 解讀하는 한편 다산의 경세학에 관한 논문을 쓰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다산경세학의 체계가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하여 다산학의 연구자들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또 관련 古典들을 반복해서 읽었다. 한문의 번역을 위해서는 기존의 번역을 참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문학 전공자들에게도 많은 자문을 구했다. 특히 나에게 부담이 되었던 일은 조선후기에 관한 자료와 연구를 가지고 『경세유표』에서 주장되고 있는 가설들의 현실적 타당성을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다산경세학의 독해, 한문의 해독 및 자료수집에 있어서 일일이 거명할 수 없는 분들에게 많은 學恩을 입었다.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책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다산학술문화재단에는 큰 신세를 졌다. 동 재단이 『여유당전서』의 定本化事業의 일환으로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PC에 입력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의 저술을 위하여 그 자료들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책의 출판에 있어서는 朴德濟(노동경제학 전공), 金慶會(경제학 전공), 朴煥珷(일본근대정치사 전공) 및 李宇衍(한국근대경제사 전공)의 諸氏가 원고를 꼼꼼히 읽는 한편 교정을 보아주었으며, 경인문화사 金煥起이사의 노고가 컸다. 두루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저술의 주된 자료가 된 필사본『경세유표』를 비롯한 가장본『여유당집』의 기관별 분포현황과 자료수집에 협력해 준 기관들을 소개해 두어야겠다. 서울대학교의 중앙도서관과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 단국대학교의 퇴계학도서관, 미국 버클리대학의 아사미(淺見)문고 및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은, 여유당집을 구성하는 특정저서에 한정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모두 위의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장서각이 보관하고 있는 가장본『여유당집』은 본래 다산본가의 소장자료로서 다산학 연구를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며, 또 위의 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본『경세유표』는 그 서지적 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실학박물관의 『量田議』十三終은 『경세유표』의 성립과정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고려대학교의 중앙도서관 漢籍室, 한양대학교의 중앙도서관 한적실, 국민대학교의 중앙도서관 및 일본의 東洋文庫는 『경세유표』의 일반 필사본을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의 중앙도서관 국학자료실에서 Horace Grant Underwood가 수집․기증한 『丘井量法事例竝圖說』을 열람할 때에는 그의 높은 자료수집의 眼目에 놀랐다. 영남대학교의 중앙도서관 한적실은 가장본『民堡議』와 다산이 손수 淨寫한 『讀禮通考』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모두 귀중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관들이 필자에게 이 자료들에 대한 열람의 기회를 흔쾌히 마련해 준 데 대하여 마음속 깊이 謝意를 표하는 바이다.
저자
安秉直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序 文
序 章
제1장 章節構成과 體國經野
머리말
제1절 政法三集에서의 경세유표의 위치
제2절 章節의 構成과 再分類
제3절 硏究史의 整理
제4절 體國經野와 設官分職
맺음말
제2장 王政과 官制改革
머리말
제1절 王政과 官制
제2절 朝鮮後期의 官制와 官制改革
제3절 改革課題와 官制
맺음말
제3장 井田法과 王土
머리말
제1절 資料의 檢討와 硏究史의 整理
제2절 王土와 時占
제3절 國家的 土地所有의 實現方案
제4절 「井田議」의 分析
맺음말
제4장 井田法과 量田
머리말
제1절 結負制와 井田制
제2절 井田區劃과 新田開發
제3절 方田法과 魚鱗圖 맺음말
제5장 井田法과 井稅
머리말
제1절 朝鮮後期의 田政紊亂
제2절 井田制와 賦貢制
맺음말
제6장 筆寫本에 대한 書誌的 檢討
머리말
제1절 筆寫本目錄의 作成
제2절 著作과 筆寫의 經緯
제3절 目次排列의 檢討 제4절 定本化事業을 위한 新朝鮮社本의 修正
맺음말
終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