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최초 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백석과 쌍벽을 이루는 북방 정서와 이야기체 서술기법의 원형 이용
악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아프도록 생생하게 그리며 우리 문학의 한 봉우리를 이룬 시인이다. 어린 시절부터의 가난과 그에 따른 노동체험을 바탕으로 당대 사람들의 아픔을 깊게 응시한다.
시집 『오랑캐꽃』은 그의 문학에서 가장 높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해방 후 출간되었지만, 수록 작품들은 1939년부터 42년 사이에 나온 것들이다. 그의 시세계가 보여주는 서정적 집약과 서사적 기법의 절묘한 어우러짐은 그 이후 시인들이 보여준 서사적 지향성의 한 원형이 되었다. 그는 특히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백석과 함께 우리 시의 북방정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사랑받았다. 언론인이자 작가 고종석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평한 바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서정주가 현란하게 구가한 감각의 아스라함은 문득 비천하게까지 보인다. 감각의 격조와 기품에서 『화사집』은 도저히 『오랑캐꽃』을 따를 수 없다.”
이 복간본 시집은 이용악의 당시 낙관과 인지 도장까지 그대로 복원하여 시인의 당시 흔적과 체취를 높은 시세계와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용악(1914~ 1971)
서정주, 오장환과 함께 1930년대 시단의 3재(才)로 꼽히던 시인이다. 두만강과 접한 함경북도 경성 출신인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시집 『분수령』과 『낡은 집』을 펴내어 당대 문단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세 번째 시집『오랑캐꽃』은 그의 가장 높은 문학적 성취로 꼽힌다.
전쟁통에 월북을 했던 이용악은 1988년 해금되어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백성의 애환을 손에 잡힐 듯 절절히 그려 보인다. 그는 특히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백석과 함께 우리 시의 북방정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사랑받았다.
서(西)백석, 동(東)용악의 북방정서와 서사기법의 확장
이용악은 우리 국토의 최북단, 두만강에 접한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다. 그렇기에 「절라도 가시내」와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낡은 집」 등의 시에 담긴 당시의 북방정서는 독자가 직접 체험하고 느끼는 것처럼 생생하고 핍진하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 백석의 시가 어린 날의 따듯한 고향정서를 그려내고 있다면, 이용악의 시가 보여주는 정서는 한결 애잔하고 슬프다. 우리 문학사에서 북방정서를 말할 때 서(西)백석, 동(東)용악으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당대 시인들에 대한 호평에 인색했던 시인 서정주도 이용악의 시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다.
“가난 속에서 괄시를 받으면서, 망국민의 절망과 비애를 잘도 표현했다.”
이용악의 시세계가 우리 시문학사에서 서사기법의 원형을 이룬다는 평가에서는 평론가 홍용희와 유종호의 말을 음미해볼만 하다.
“그의 시세계가 추구한 서정적 응축과 산문적 확장의 절묘한 결합은 1970년대 신경림의 「농무」와 김지하의 ‘담시’를 비롯한 우리 민족문학에서, 서정시의 서사적 지향성의 한 원형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홍용희)
“관념으로 흐르지 않고 구체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현실인식을 담은 이용악 시편의 기본 성향은 서사 충동을 내재한 채 고유한 서정적 울림을 획득하고 있는데, 이것이 임화를 위시한 한 떼의 프롤레타리아 시인과의 차이성을 드러내주는 특장이다. 오늘날에도 『오랑캐꽃』은 약소민족이나 소외계층, 사회 문화적 소수파의 표상으로서 각별한 울림과 감동을 준다.”(유종호)
이 복간본 『오랑캐꽃』은 그러한 감동과 울림을, 세월에 조금도 침윤되거나 퇴색되지 않도록 시인의 낙관과 당시 인지까지 ‘날 것 그대로’ 복원하여 독자들 앞에 내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