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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육사시집 陸史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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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육사시집 陸史詩集

1946년 최초 판본 오리지널 디자인

저자
이육사
출판사
모루와정
발행일
2016.04.15
정가
8,000 원
ISBN
9791195775408|
판형
130*190
면수
72 쪽
도서상태
판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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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계절, ‘백마 탄 超人초인’의 부활을 꿈꾸며

40세라는 짧은 일생 동안 무려 17번의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변절하지 않고 시적 감수성도 잃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진짜 독립투사, 진짜 저항시인 이육사!
1945년 해방 한 해 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한 그를 기려 시인 김광균, 신석초, 오장환, 이용악 등이 최초로 만든 《초판본 육사시집》의 오리지널 복각본. 데뷔작 [황혼] 부터 [광야], [절정], [청포도], [교목] 등 대표 명시 20편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다. 1955년 재간본에 첫 수록된 시 [편복]은 사은품 친필 원고 사진 뒤에 따로 실었다.
1930년대의 서적은 현대 독자가 편히 읽기엔 활자 상태가 좋지 않고, 같은 판본이라도 각권마다 인쇄 상태가 부분 부분 매우 다르다. 이 책은 여느 복각본 시집들과 달리 초판본 시집 3권을 비교하여 그중 인쇄 상태가 가장 나은 것을 저본으로 하고, 나머 지 두 권에서 더 선명한 활자를 따와 가독성을 최대한 높였다.
지금이 일제강점기는 아니지만 어지러운 시대다. 팍팍하고 위태로운 일상에, 정치사회적으로는 숱한 거짓말이 떠돌고 인간관계는 각박해져 가는데…….
이 복각본 시집을 통해 독자들이 암울한 시대를 올곧게 버틴 ‘超人’ 이육사를 스킨십하듯 만나고, 그의 활달한 기운을 받아 모두가 저마다의 품 넓은 ‘曠野(광야)’를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시사(新詩史)에 있어 대부분의 시가 센티멘털리즘에 감염된 여성적 체질을 갖고 있음에 비추어, 육사의 시가 여성적 감수성에 대륙적 기상과 남성적 의지를 불어넣음으로써 한국 시가 튼튼한 체질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정한모 서울대 교수  







 이육사(李陸史)

1934년 이육사에 대한 안동의 일제 경찰서 보고 내용은 이렇다.

"배일사상, 민족자결,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

이때 작성된 서대문 형무소 신원카드가 남아있어, 이를 통해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신분은 상민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의 키는 5척4촌5분인데 1척을 30.3cm로 계산하면 165cm, 당시의 보통 키에 해당한다.

 이육사의 본명은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는 의열단에서 운영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1기생으로 입교하고 졸업하였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일생 동안 무려 17번의 투옥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변절하지 않았고 시적인 감성도 잃지 않았다.

1933년 귀국 후 언론활동을 통해서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했고, 1937년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했다. 육사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그의 40평생 마지막 10년 동안이었고, 그의 나이 서른이 되어서였다. 그때 이미 그는 일경(日警)의 최고 요시찰 인물이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압송 당시 육사는 어린 딸의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6년 신석초, 오장환, 이용악, 김광균 등의 문학인들이 유고시집 《陸史詩集》을 간행하였다.












序(서)

黃昏(황혼)
靑葡萄(청포도)
路程記(노정기)
年譜(연보)
絶頂(절정)
鴉片(아편)
나의 뮤~즈
喬木(교목)
蛾眉(아미)
子夜曲(자야곡)
湖水(호수)
少年에게
江 건너간 노래
芭蕉(파초)
斑猫(반묘)
獨白(독백)
日蝕(일식)
邂逅(해후)
曠野(광야)


跋(발) 






 오늘 여기, 왜 초판본 이육사인가?

“그는 40세의 짧은 생애를 조국에 바쳐 열렬히 산 풍운아였다. 그의 겸허한 얼굴은 언제나 폭풍우 앞의 정적과 같은 고요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그 혼(魂)의 불꽃을 시로 불태웠다.”
- 신석초 (해방 전후 시기의 시인 겸 언론인)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이었던 이육사가 순국한 해는 1944년 1월, 해방되기 한 해 전이다. 생애를 바쳐 이루고자 했던 조국독립을 끝내 보지 못하고, 시인으로서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채, 춥디추웠을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차마 감기지 않았을 눈을 감았다. 그랬기에 그의 문우들은 1946년 이 《초판본 육사시집》으로 그의 영혼을 안타깝게 위로했을 것이다
이 땅을 점령한 남의 나라 경찰에게 무려 17번이나 피검과 투옥, 가혹한 고문을 겪고, 그의 3형제가 모두 같은 고통을 당하는 걸 봐야했던 인간 이육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특히, 믿었던 지사와 동지들이 하나 같이 변절을 하고 청년들에게 황군이 되라며 글을 써댔던 일제 강점기 말은 어떠했을까. 그 역시 신 아닌 사람인 이상 때로 절망의 나락에서 몸을 떨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자조의 한숨소리가 지금보다 더 크게 들렸을 것이다. 당시 시인들의 시는 거의 대부분 서구적 센티멘털리즘에 젖어 개인적 감정 과잉의 영탄조, 비탄조의 느낌표가 남발되고, 섬세하다기보다 나약한 감수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육사는 삶에서나 시에서나 끝내 꿋꿋하였다.
우리에게는 이육사라는 거목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일제 경찰이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며 했을 만큼 강인한 의지의 지사였고, 웅혼한 대륙적 기상과 활달한 이미지를 시에 담아 일제에 억눌려 있던 한국 근대시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은 최고의 시인이었다. 이는 그의 대표작 [광야]나 [절정]을 예로 들 것도 없이 데뷔작 [황혼]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내 골ㅅ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黃昏)을 맞아드리노니
바다의 흰 갈메기들 같이도
인간(人間)은 얼마나 외로운것이냐

…… 중략 ……
저-십이(十二) 성좌(星座)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鍾)ㅅ소리 저문 삼림(森林) 속 그윽한 수녀(修女)들에게도
쎄멘트 장판우 그 많은 수인(囚人)들에게도
의지할 가지없는 그들의 심장(心臟)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沙漠)을 걸어가는 낙타(駱駝)탄 행상대(行商隊)에게나
『아프리카』 녹음(綠陰)속 활 쏘는 토인(土人)들에게라도,
황혼(黃昏)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地球)의 반(半)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 후략 ……
- 황혼(黃昏) 부분 -

이육사는 이 시를 병상에서 썼다고 한다. 시대가 앓아도, 몸이 앓아도 결코 위축되거나 약해지지 않는 참사람 이육사의 면모가 새삼스럽다. 우리에게 위안과 격려에 더해, 때로 정신적 편달을 들어줄 사표로 삼을 만하지 않은가. 오늘, 무기력증이 사회 전반에 떠돌며 청년은 청년대로, 중년과 노년은 또 그들대로 축축 쳐져있는 오늘 이 시대, 바로 여기에 이육사가 필요한 이유다.
또한 그것이 바로 [모루와정] 출판사에서 1946년 《초판본 육사시집》을 오리지널 복각본으로 간행한 이유다. ‘백마 탄 超人(초인)’ 이육사가 광야에 뿌려놓은 ‘노래의 씨앗’을 제대로 싹 틔우고, ‘청포를 입고 온 손님’의 마음을 결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그의 시들이 맨 처음 세상과 만난 그 모습 그대로 내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복각본 시집을 통해 독자들이 암울한 시대를 버틴 거인 이육사를 스킨십 하듯 만나고, 그의 기운을 이어받는다면 모두가 억세고 동시에 다사로우며 시야와 품이 넓은 ‘曠野人(광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