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에세이

거기, 외로움을 두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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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외로움을 두고 왔다

시로 추억하는 젊은 날

저자
현새로
출판사
길나섬
발행일
2016.03.15
정가
15,000 원
ISBN
9791195288830|
판형
152*210
면수
208 쪽
도서상태
판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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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다고 박인환 시인은 노래했다. 어디 사랑뿐이랴. 청춘의 멋과 낭만, 좌절과 고독 등 그 황홀하고도 외로웠던 시절이 모두 가고 없다. 그러나 시인의 말대로 옛날은 남았다. 군데군데 밑줄 그어 놓은 색 바랜 시집으로, 여행가방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오래전 편지들로, 묵은 앨범 속에 소중히 간직해 온 사진들로……. 옛날은 그렇게 우리 곁에 남아서, 가고 없는 청춘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낸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옛날의 기록이다. 책장을 넘기면 시 한 편, 에세이 한 편, 사진 한 장이 차례차례 말을 걸어온다. 푸르고 아름답지만 그만큼 고단했던 젊은 날을 따스하게 보듬어 준다. 


<본문 중에서>



우리 세대에는 편지가 무척 일반적인 소통 수단이었다. 친한 친구 간에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물론이고,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정성스레 쓴 편지나 엽서를 보냈다. 국내는 물론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국 친구까지 펜팔로 사귀던 세대. 조금 느리지만 그만큼 진중한 마음을 담아 주고받던 편지.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편지 한 통에 한껏 기분이 들뜨기도 하고, 이별을 고하는 편지 한 통에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이 ‘문득 사라지’기도 했으며, 그렇게 부서진 마음은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 p.27 <편지, 지난날을 불러내는 마법> 중

  예전에는 오로지 FM 방송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저녁 여덟 시에 방송하는 〈황인용의 영 팝스〉는 그 당시 나의 종교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야만 했다. 전영혁 피디가 직접 나와서 들려주기도 했던 그의 특별한 선곡은 팝송의 신세계였다. 성시완이 진행하는 〈음악이 흐르는 밤에〉도 좋아했는데, 밤잠이 워낙 많아 그 시간쯤이면 아무리 기를 쓰고 안 자려고 해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잠 때문에 심야 방송을 제대로 못 듣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엄마는 내가 라디오를 너무 가까이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지만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면서 공부해야 집중이 잘 된다고 부득부득 우겨가면서 엄마를 설득했다. 오죽하면 내가 죽으면 라디오도 함께 묻어 달라고 했을까.

- p.82 <라디오는 언제나 노래하고 있었다> 중

  그때는 기나긴 터널처럼 끝이 안 보이던 청춘이라는 시간이, 지금 돌아보니 어느덧 저만치 뒤에 있다.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청춘, 그 뒤에 맞이한 나의 여름은 과연 녹음이 무성했던가. 생각해 보면 여름을 통과하던 그때도 무성한 녹음을 즐기기보다는 내리쬐는 햇볕이 너무 뜨거워 숨이 막힌다고 불평했던 것 같다. 인생의 가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격정적이었던 봄도 뜨거웠던 여름도 모두 가을에 맺을 열매를 기다리는 시간이었음을 어렴풋이 알겠다.

- p.99 <청춘의 또 다른 이름은 ‘구속’> 중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좋았던 점은 원하는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생들이 모여 놀 수 있는 지역이 한정적이었던 그 시절에 종로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여드는 명소였다. 종로에서 만나기로 하는 약속은 대부분 종각역 옆에 있던 —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 ‘종로서적’에서 이루어졌다. 그 무렵 외국인 영어 회화 강의가 막 유행하기 시작해서 종로3가에 있는 파고다어학원에 학생들이 많이 몰렸다. 어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나면 종로서적 뒷골목 주점이나 카페로 자리를 옮겨 ‘2차’를 하고, 단성사나 서울극장, 피카디리극장 등에서 영화 보는 것이 놀이 문화의 전형이었다.

- p.129 <불이 켜지고 공백만 남을 때까지> 중

  1984년 여의도 사학연금빌딩 맞은편 지하상가에 ‘London Pub’이라는 주점이 있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컸는데, 그곳의 이국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어 가끔 찾아가곤 했다. 세월이 흘러 1997년, 나는 진짜 런던에 있는 펍에 가서 흑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런던의 펍에 가 보니 ‘펍’을 주점이나 선술집처럼 한 단어로 규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런던에서 외곽으로 나가다 보면 거리에 외국인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곳이 더러 있다. 이런 곳일수록 주점도 동네 밀착형이라 그 마을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어릴 적 생일잔치를 했던 펍에서 훗날 결혼기념일 파티를 여는 식이다. 물론 가장 주된 역할은 마을 아저씨들이 모여 대형 화면으로 축구 경기를 보는 사교장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런던에서 펍은 단순한 주점 그 이상이었다. 마치 근사한 마을회관 같다고나 할까?
그런 주점에 나를 잘 아는 다정한 주인장이 있고, 언제라도 마음 나눌 동네 친구가 약속이라도 한 듯 스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버지가 된 일을 후회’할 만큼 우울할 때도, ‘글 한 자 꼼짝하기’ 싫을 정도로 우울이 고인 날에도, 그 주점에 들르면 권태스러운 고민을 모두 털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 p.161 <흐린 날처럼 고인 우울을 털어 버리자> 중










 현새로

중학교 시절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TV 시리즈를 보며 감동하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다양한 책을 섭렵하며 세계 일주를 꿈꾸던 소녀. 대학 졸업 후 직장에 다니다가 받은 마지막 월급을 탈탈 털어 필리핀으로 여행을 떠난다.

지금까지 10개국, 30여 개가 넘는 도시를 여행했고, 국제적인 이사도 여러 번 했다. 결혼 후 3일 만에 가서 살게 된 싱가포르에서 1년 4개월, London College of Printing 학교에서 Professional Photography Practice 과정을 공부하며 1년, 인도 뉴델리에서는 남편, 딸아이와 함께 4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첫 번째 개인전 <색깔 있는 도시 풍경(사진 있는 마당, 1999)>을 시작으로 <타인의 직접적인 삶(숙명여자대학교 문신미술관 빛 갤러리, 2005)>, , <힌두사원프로젝트(영아트갤러리, 2011)>,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인도에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인도, 사진으로 말하다》와 《인도, 신화로 말하다》를 펴냈다.   











1부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시작하며│ 시, 청량한 바람으로 불어오라 •7

엄마 걱정 │ 기형도 • 16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 17

담배 연기처럼 │신동엽 • 20
할아버지의 향기로운 바람 • 22

조그만 사랑노래 │황동규 • 26
편지, 지난날을 불러내는 마법 • 27

사평역에서  │곽재구 • 30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 32

땅끝에 와서 │곽재구 • 36
아직도 반편인 우리 • 38

조카 │곽재구  • 42
네 마흔 살에 집 한 칸과 마누라와 • 44

플라타너스  │김현승 • 48
나무, 천 년을 사는 위대한 성자 • 50

신의 연습장 위에 │김승희 • 54
인간은 모두 물음표 같은 존재 • 56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 60
스스로 감옥에 갇힌 나를 빼낸 그 한 줄 • 61

한 잎의 여자 │오규원 • 66
우수에 찬 창백한 남자를 좋아했다 • 67

시, 부질없는 시 │정현종 • 70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아름답다 • 71

인간은 고독하다 │김현승 • 74
고독 그리고 자유로움 • 76

노래하고 있었다 │신동엽 • 80
라디오는 언제나 노래하고 있었다 • 82

2부 고독한 모든 사람처럼 자유롭게

햇빛사냥 │장석주 • 88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는 벌판으로 • 89

대학 시절 │기형도 • 92
무기력했다, 스스로 비난했다 • 93

낙화 │이형기 • 96
청춘의 또 다른 이름은 ‘구속’ • 98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 │정현종 • 102
견뎌라, 울음의 왕국에서 • 103  

진눈깨비 │기형도 • 106
마지막 한 장은 괜찮겠구나 • 107  

순례의 서 │오규원 • 110
멈추면서, 나아가면서, 사랑하면서 • 112  

어느 해의 유언 │신동엽 • 116
뭐 그리 대단한 거 아니더라 • 118  

호수 │이형기 • 122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기다림 • 124

모비딕 │이형기 • 128
불이 켜지고 공백만 남을 때까지 • 129

사물의 정다움 │정현종 • 134
도시 한복판의 묘지에서 • 137  

밤에 내리는 비 │황동규 • 140
비루한 하루를 뒤로하고 지도를 펴다 • 142

절대 고독 │김현승 • 146
인간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 • 148

조용한 개선 │장석주 • 152
나는 참혹하게 살고 싶었네  155

주점 │조병화 • 158
흐린 날처럼 고인 우울을 털어 버리자 • 160

비 │이형기 • 164
천지에 자욱한 가랑비 내리니 • 166

만파식적 — 남편에게 │김승희 • 170
스트레스 총량 불변의 법칙 • 173

슬픔으로 가는 길 │정호승 • 178
마음껏 슬퍼할 자유 • 179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 182
슬픔의 힘이 기쁨보다 세다  184

이민 가는 자를 위하여 │정호승 • 188
이민에 관한 환상이 있었다 • 189  

사진을 나누어 주면서 │조병화 • 192
내 사후에 저작권은 없다 • 195

│마치며│ 사랑하는 딸에게 • 201

추억 앨범 • 205












시 한 편, 에세이 한 편, 사진 한 장의 어울림!
가고 없는 청춘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내는 ‘옛날’의 기록

  시 한 편,

시인이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감상에 젖게 하는 존재다. 어떤 이름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이름은 애잔함을, 또 어떤 이름은 설렘을 안겨 주기도 한다. 이름만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詩)는 분명 힘이 세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편의 시에 추억이 깃들 때, 한 편의 시가 자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을 때, 한 편의 시로 무엇보다 큰 위로를 받았을 때……, 시는 우리 가슴 깊은 곳에 아로새겨진다.

누구나 좋아하는 시인, 또는 가슴에 품은 시 한 편쯤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렇다. 저자는 젊은 날을 시와 벗하며 보냈다. 그러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살이에 밀려 오랫동안 시를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우연히 손때 묻은 오래전 시집을 발견하고는 그 속에서 청춘의 고뇌와 방황이 고스란히 담긴 서른세 편의 시를 골라냈다. 곽재구, 기형도, 김승희, 김현승, 신동엽, 오규원, 이형기, 장석주, 정현종, 정호승, 조병화, 황동규. 이들의 시에서 저자는 어떤 추억을 길어 올렸을까? 지금도 시를 가까이하고 있는 독자라면 저자가 고른 시를 읽고 자기만의 추억을 떠올릴 것이며, 한동안 시를 잊고 지낸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시의 낭만에 젖어들 것이다.

  에세이 한 편,

저자는 시를 읽으며 추억 여행을 떠난다. <엄마 걱정>을 읽으며 어릴 적 일만 하던 바쁜 엄마를 떠올리고, <담배 연기처럼>을 읽으며 새벽마다 담배 연기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린다. <질투는 나의 힘>과 <한 잎의 여자>를 통해 한때 ‘중2병’을 독하게 앓았음을 고백하고, <대학 시절>을 통해 비겁했던 젊은 날을 털어놓는다. 그런가 하면 <모비딕>을 통해 청춘의 낭만을 생생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이렇게 시 한 편, 한 편마다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도 어느새 저자의 추억 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특히, 1970년대와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세대라면, ‘맞아, 그땐 그랬지.’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구나.’ ‘힘들었어도 그땐 낭만이 있었지.’ 하며 저자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사진 한 장,

저자 현새로는 사진작가다. 책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그녀가 영국에서 사진을 공부하던 시절에 찍은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더러는 2000년대 초반의 영국 풍경을 담고 있는 사진들은 얼핏 보기에 우리네 ‘7080’ 정서와 달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가 고른 시와 그녀의 에세이를 읽고 사진을 보노라면 시, 에세이, 사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짐을 느낄 것이다. 차분하면서 깊이 있는 사진들은 마치 인생을 관조하는 듯하다. 아름다운 동시에 고되고 외로운 청춘을 보내고, 한결 너그러워진 시선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저자의 삶이 책에 실린 사진들과 똑 닮았다.

  그리고 옛날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다고 박인환 시인은 노래했다. 어디 사랑뿐이랴. 청춘의 멋과 낭만, 좌절과 고독 등 그 황홀하고도 외로웠던 시절이 모두 가고 없다. 그러나 시인의 말대로 옛날은 남았다. 군데군데 밑줄 그어 놓은 색 바랜 시집으로, 여행가방 안에 차곡차곡 쌓아둔 오래전 편지들로, 묵은 앨범 속에 소중히 간직해 온 사진들로……. 옛날은 그렇게 우리 곁에 남아서, 가고 없는 청춘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낸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옛날의 기록이다. 책장을 넘기면 시 한 편, 에세이 한 편, 사진 한 장이 차례차례 말을 걸어온다. 푸르고 아름답지만 그만큼 고단했던 젊은 날을 따스하게 보듬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