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도 좋은 것, 잃으면 안 될 것
시인의 마음으로 써 내려간 감성 에세이
공자님은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 즉 60이 되면 귀가 순해진다고 했다. 귀가 순해져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말을 객관적으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바로 60이라고 했다.
과연 그럴까.
지금은 한 기업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지만 평생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 온 정지수의 글을 읽어보면 60이 되면 당연히 귀가 순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되기 위해 하루하루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는 나이임을 느끼게 된다.
정지수가 쓴 <하루 늦은 일기>에는 모두 115편의 글이 실려 있다. 아침마다 친구와 나눈 이메일 대화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매일매일의 글이기에 책 제목에 ‘일기’라고 썼다. 일기가 자기 내면과의 대화이듯 그의 글에는 정지수 개인의 마음과 생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의 글은 누구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아는 것을 뽐내지 않는다. 그는 겸손하게 배우려 하고 삶을 돌아보고 느끼고 싶어 한다.
친구 어머니 고향 가족 계절 시간 지하철 병원 책 신문 영화 음악 커피 종교 욕망 두려움 사랑... 정지수는 일상에서 보고 느끼고 대하는 모든 것에 자기 삶을 대입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시인의 감성으로 세상과 마주한다. 그의 산문이 시처럼 읽히고 시의 맥락을 담고 있는 이유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 흔한 백일장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던 그는 어느날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작가 이문재의 글을 읽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글쓰기는 작가나 언론인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말하기가 아나운서나 연설가의 고유 능력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말은 할 수 있으나
생각하지 않으면 글은 쓸 수 없습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나의 안팎을 성찰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삶 쓰기이며,
나는 내 삶의 주인공이자 저자입니다
글쓰기를 작정하고 그는 엉뚱하게도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좋은 사람이 되어 있다면 글은 이미 절반은 쓴 것이나 다름없다는 작가 이외수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지수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게을러 책은 많이 읽지 못하고 재주가 없어 멋있는 문장은 만들 수 없어도 마음만 다잡으면 좋은 사람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것만 제대로 된다면 감동 있는 글도 쓰고 사람다운 사람도 될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 아닌가?
<서문> 중에서
그의 글을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자신을 성찰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의 시작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마음에서 출발했기에 그 마음이 글마다 알차게 빼곡이 들어차 있다.
정지수
스치듯 지난 생각들, 꼭 붙들어두고 싶었다.
그 흔적들 모두 챙겨놓고 싶었다.
똑같은 일만 반복되고 반복된 일이
일상화되는 것이 불만이었지만 기억에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더듬거리더라도
기록하면 남는다는 어렵지 않은 답을 찾아냈다.
쓰는 것이 결코 작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도.
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여 기술사가 되었지만
숫자보다는 글자를 더 좋아했다.
현대건설, (주)포항제철 엔지니어링에서 배우고
(주)대한이엔씨를 창업했고 (주)경기유지 CEO를 거쳤다.
틈틈이 서울고등법원, 동부지방법원 조정위원으로
참여한 지 10년을 넘겼다.
현재는 (주)씨엘게임즈 회장으로 재임하고 있다.
jsjung001@nate.com
1부 / 가슴 울렁이는
봄날 시작 12 | 엉뚱한 다짐 14 | 뒤바뀐 기준? 18
어머니 뵙고 오던 날 20 | 시나브로 봄이 25 | 라이딩을
하면서 26
절망스러웠던 순간 28 | 가슴 울렁이는 31 | 광화문 글판 33
농담 35 | BOMNAL 37 | 사랑할 수 없다면 39
반성문이 주례사가 된 사연 41 | 가꾸면 예쁘게 피는 꽃 44
열쇠 46 | 어떤 일 47 | 이때쯤 49 | 신기한 일이라고? 50
5월! 52 | 꽃보다 잎이 더 아름답다 54 | 어떤 망각 57
이럴 때 60 | 누군가 곁에 있는 것 61 | 원망스런 자판기 62
골든타임 64 | 홀수선과 평형수 66 | 재밌게 살아 68
난감합니다 70
2부 / 예전 같지 않지만
장미보다 더 74 | 5분 동안 앓았던 중병 76 | 역지사지 79
근육이 사라진다 81 | 예전 같지 않지만 83 | 왜 산에
가지? 85
마술피리 87 | 기다려진다 89 | 어떤 헤어짐 94
찢어진 오리발 96 | 그땐 왜 몰랐을까? 98 | 일하고 있다 101
돈, 돈, 돈 102 | 간이 정거장 105 | 엿과 소금 107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109 | 아이스케키의 유혹 113
중복날 점심시간에 115 | 어떤 약속 119
이렇게 하면 됩니다 121 | 불리지 않은 찬송가 125
우리의 소원은 통일? 127 | 금붕어처럼 129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132
아~ 모르면 호로새끼들이제 135 | 티슈 무비 138
3부 / 가까이 오래 보면
가을 길목 144 | 다 그리움 된다! 146 | 가을입니다 147
익어간다는 것 149 | 도돌이표 152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 154
가슴 떨릴 때 만나자 156 | 관계 159 | 언젠가 이때쯤 160
역설 163 | 대나무 매듭같이 164 | 고향에 다녀와서 166
회초리 168 | 어머니의 유산 171 | 가까이 오래 보면
보인다 174
상형문자 해체하기 176 | 국민커피 178 | 커피 향 180
달이 변했다고? 181 | 일상의 특별함 182
어느 치과의사 이야기 184 | 통 큰 생각 188
눈치 없는 계절 190 | 변곡점 192 | 오래된 미래 194
예민함과 둔함 196 | 무겁다고? 가볍다고? 198 | 등짐 199
홈런 201 | 무섭습니다 203 | 이쯤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206
두 가지 숙제 212 | 아직도 멀었다 214
4부 / 한 번 더 핀 꽃
한 번 더 핀 꽃 216 | 할머니 기도 217 | 하나님의 은혜 218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1) 222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2) 225
국민 개그 228 | 늦기 전에 231 | 후회 232
이상한 반성문? 234 | 언제나 철이 들까 237
어디쯤 가고 있을까 240 | CCTV 240 | 12월의 걸음걸이 244
세상에서 가장 빠른 새 246 | 어떤 회고 249
어쩌면 사는 것 252 | 유머가 유언이 된 사연 254
그냥과 괜찮다 256 | 한번 만나자! 258 | 12월의 초상? 260
희망사항 264 | 부채가 자산이라고? 266 | 안타까움 269
잊을 만하면 271 | 우리 273 | 시샘달 274 | 3월 심술 275
다시 봄! 277
산책은 기도처럼 듣는 일이란다
바람소리, 새소리, 들꽃 웃는 소리
내가 나에게 하는 알 듯 모를 듯 한 소리까지
비가 온다고?
나서기가 싫다고? 귀찮다고? 힘들다고?
비도 그쳤다
기도하러 나서라
- 47p <어떤 일> 중에서
개나리, 벚꽃, 목련이 진 자리에
진달래, 영산홍, 철쭉까지
빨강, 하얀, 연분홍 잎으로 뒤섞여 있다
전통의상 차려입고 올림픽 개회식 참석하는 선수들처럼
질서 정연하게 입장하고 있다
1년을 묵묵히 기다리다
제 순서 정확히 기억하고 당당히 입장하고 있다
신기하다!
철 따라 꽃 피는 거, 당연한 일인데…
당연한 것이 신기하게 보인다면
세월이 한참 지났다는 증거 아닌가?
- 50p <신기한 일이라고?> 중에서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 하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산길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더니
한 웅큼씩 한 웅큼씩 솔잎을 따서
가는 길 뒤에다 뿌리고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 하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내려갈 길 걱정이구나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제목이 <꽃구경>이라서 밝고 신나는 노래를 기대했는데
고려장 가는 길이라는 걸 뒤늦게 알고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게 말이야!
그게 이 땅의 모든 어머니 마음인데
속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 흘려 보냈다
무심코 잊고 산다
- 57p <어떤 망각> 중에서
헷갈립니다
잘 먹고 잘 입고 높은 자리 차지하고
신나는 일을 해야만 재밌는데
이것을 하려면 우선 돈이 충분히 있어야 하고
재밌는 일은 그 나중에… 라고 얼버무렸습니다
속물 근성이 가득하다고 해도 별수 없습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말씀입니다
6학년이 되고 나서
재밌게 살아야 한다는 외숙모님의 그 속뜻을
어렴풋이 알아냈습니다
재밌게 사는 것은
욕망의 종착역에 도착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챙겨주는 뜻밖의 선물이라는 걸…
재밌는 일은 사방에 깔려있는데 찾지 않고
지나치고 있지나 않은지?
- 68p <재밌게 살아> 중에서
남의 고통을 위로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직접 체험할 수는 없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서도 온몸으로 느낄 수 없다
아픔과 고통은 마음으로 함께한다고
작아지거나 사라지지도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건성으로 함부로 얘기하고 있지 않은지?
투병 중인 친구를 만나
아무것도 아냐 좋아질 거야를 남발하고
병원 문을 나설 때마다 스치는 생각이다
뒤가 돌아봐진다
역지사지란 말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기도만 하자
- 79p <역지사지> 중에서
누군가 내 모습을
금붕어 바라보듯 할까 겁이 난다
갈 곳이 어딘지 모르고 이리저리 헤메고 있다고
어항 속 금붕어 보듯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줄 모른다
하기야 유한한 내 삶의 유통기간을 제대로 알고
가야할 길 제대로 가고 있는지
때로는 나도 정확히 모르고 있을 때가,
아니 망각하고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 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고
육자배기 추임새 넣듯 혼자 중얼거리고 있다
금붕어의 제일 잘난(?) 그것을 닳아 있다
찜통더위에 구질구질하게 비까지 내리는데
유쾌하지 못한 얘기 거침없이 하고 있는
이 눈치없음…
- 129p <금붕어처럼> 중에서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고
좁은 가슴에 여섯 아이를 묻고 또 묻고도
오롯이 살아 있는 건 기적이다.
지금 이 땅에서 누군가 만날 수 있다는 건
하늘이 준 특별한 선물인데
가끔 잊고 산다 그걸
- 138p <티슈 무비> 중에서
며칠 전까지 아침저녁 시도 때도 없이
청승맞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적게는 2년, 많게는 10년 이상을 유충으로 살다가
이 땅에서 겨우 한 달 남짓 지내더니
어느 날 뚝 자취를 감췄습니다
작은 몸을 숨긴 채
찢어져라 목청껏 질러대는 그 소리가
듣기 애처로웠는데
들리지 않으니 은근히 섭섭합니다
있을 땐 몰랐는데 가고 없으니
청승맞게 들렸던 그 소리마저 아련합니다
계절이 지난 작은 흔적 하나가 나를 깨웁니다
사라진 것은 다 그리움 될 거라고
- 146p <다 그리움 된다!> 전문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다리 떨릴 때 만나지 말고 가슴 떨릴 때 만나자!”
어디선가 읽었던 글귀인데 가슴에 박힌다
그래요!
밤새 설레고 기다려지는 만남은 아니더라도
만나면 가슴 한켠 아련하면 됐다
만나길 잘했다
다음엔 재미있는 공연이라도 가시죠
형! 고마워
형을 만나면 가슴이 설레
설레임이 별거야?
만나서 즐거우면 다 설렌다는 증거 아닌가요?
그런데 형!
언젠가 다리 떨릴 때 만나도 가슴 떨리면 좋겠네
지금처럼
- 156p <가슴 떨릴 때 만나자> 중에서
그러다 갑자기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되었다는 얘기가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아무 일 없고 늘 같은 하루가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변하듯
이상하고 특별한 일들이 없기에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지…
평범하고 반복된 일상이
특별하고 이상적인 날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상이 일상적인 것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 182p <일상의 특별함> 중에서
욕망과 두려움
무엇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한 전부 잉여다
돌아보니 욕망이란 꼭 필요한 동력이었지만
별로 필요치 않는 것의 목록을 늘려가는 과정이고
채워지지도 않더라고
두려움은 가면을 쓴 용기였더라고
별거 아니더라고
그게 살짝살짝 보이더라고
내가 쬐금 살아보니까
- 212p <두가지 숙제> 중에서
한강변 산책길에
한 번 더 핀 코스모스가
초겨울 찬바람에 살랑거린다
이른 여름 눈치 없이 왔다가
늦가을 석양쯤 소리 없이 가더니
매서운 강바람에 맞서고 있다
지난 가을 못한 얘기 들어보라고
온몸으로 살랑거린다
그게 한 번 더 핀 이유란다
못다한 얘기 하고 싶은 건
꽃이나 사람이나 같다
- 216p <한 번 더 핀 꽃>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