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에세이

일할 수 있어 행복한 특별한 사람들의 행복공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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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수 있어 행복한 특별한 사람들의 행복공장 이야기

저자
정덕환
출판사
서강출판사
발행일
2014.03.20
정가
13,000 원
ISBN
9788972192954|
판형
152*225
면수
240 쪽
도서상태
판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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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행복한 공장, 에덴 공동체 사람들의 힐링스토리!

일 그 자체가 행복을 만들어내는 행복공장인 '에덴'의 이야기를 담은 『행복공장 이야기』. 어릴 적부터 장래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 직업이나 미래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던 사람들, 평생 집 안에 갇혀 가족의 보호를 받거나 그도 안 되면 나라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야 할 것으로 여겨지던 중증, 중복 장애인들이 당당한 직업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하는 '에덴'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ISO 품질경영 시스템과 ISO 환경경영 시스템을 획득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의 바람직한 역할모델을 제시하여 UN 국제노동기구(ILO)에 최초로 등록된 에덴 행복공장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세상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든 아니든, 땀 흘려 일하고 수고한 대가를 받는 삶은 고귀하다.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장, 에덴 공동체 사람들의 힐링스토리를 담은 책이다.

저자 : 정덕환

저자 정덕환은 1946년 서울 출생. 성남고등학교 3학년 당시 최연소 유도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8년간 선수생활을 하다가 연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2년, 동료선수와 연습훈련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경추 4번과 5번이 골절, 전신마비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재활훈련 끝에 가까스로 휠체어에 앉게 된 그는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 행상과 동네 식품가게 운영을 했다. 일을 하면서 삶의 활력과 의미를 되찾게 된 그는 다른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1983년, 장애인 5명과 함께 독산동의 세 평 공간에 장애인 공동체 ‘에덴복지원’을 설립, 오늘날 연 150억여 원의 매출을 올리는 국내 최대 장애인 고용생산시설을 일궈냈다. 현재 에덴복지재단에는 170여 명의 중증, 중복 장애인이 일과 생활을 함께하고 있으며, 이들의 평균임금은 110만 원으로 전국 중증장애인 평균임금의 세 배에 달한다. 현재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자문위원과 장애인 직업재활을 위한 국제단체인 WI(Workability International) 아시아 부회장 겸 WI 코리아 회장, 한국장애인 직업재활시설협회 회장, 장애인 평화인권 홍보대사(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등을 맡고 있다.

1장 에덴에 공장이 있다

살아있어 다행이다
에덴의 아웃라이어들
홍 원장은 홍반장
행복한 공장
일요일 저녁의 뜸북새

2장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약한 사람

3일 넘기기 어렵습니다
나는 국가대표 선수
재활 전쟁
1년 만의 귀가
열정과 냉정 사이
오토바이에 세상을 싣고
이화식품 아저씨

3장 달팽이 달리다

내가 구로공단에 간 까닭은
우리들의 천국을 찾아서
석 달 수입 36만 원, 지출 35만 원
집을 잃고 사람을 얻고
나도 수출역군이 될 수 있다
물 위의 하룻밤
개봉동이여, 우리를 받아주세요

4장 휠체어에 앉아 세상 바꾸기

상표 없는 물건을 찾아라
해답은 비닐봉투
휠체어 탄 영업사원
적자를 메우는 법
나라 힘을 빌려보게
쓰레기봉투 전성시대
꿈은 이루어진다

5장 당신은 기적입니다

나는 영혼으로 일해요
힘들어도 사랑은 한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네한테 인생을 배우네

6장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

목표는 매출이 아니라 고용이다
카주오 이토가 상과 덩푸팡
실로암 연못의 기적
1030,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
에뎀플로이 아카데미의 꿈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터를 만들었다!

1.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 나라에 세금 내는 게 즐겁다.”


배를 타던 선원 김호식 씨는 추락사고로 하반신마비장애인이 되었다. 가슴에 커다란 돌덩어리 같은 혹이 튀어나오고 휠체어를 타야 하지만 그는 ‘에덴하우스’에 없어서는 안 될 경력 30년의 베테랑 작업반장이다. 앞이 잘 안 보이고 경미한 지적장애를 가진 그의 아내는 이곳에서 비닐원단 자르는 일을 한다. 알뜰한 그들 부부는 직장 인근에 집을 마련했고 두 아들도 모두 대학에 보냈다. 발달장애인 김현석 씨는 생산된 분리수거용 쓰레기봉투를 일정한 수량대로 포장하는 일을 한다. 숫자를 셀 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집중력을 발휘하여, 기계는 간혹 실수해도 그는 실수하는 법이 없다. 심한 자폐증세로 영영 사회와 격리된 삶을 살 것처럼 보였지만, 이곳에 와서 어엿한 직업인으로 거듭났다. 주방용 세제 원료를 배합해 넣는 일을 하는 정영호 씨는 다운증후군이다. 말이 어눌하고 행동도 굼뜨지만, 늘 밝고 즐겁다. ‘1억 원을 모아 국제결혼을 하고 싶다’는 그에게 가장 신나는 날은 바로 월급날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애인 직업재활시설 에덴복지재단에는 170여 명의 중증, 중복 장애인이 일과 생활을 함께하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도 세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아무하고도 소통하지 못하며, 휠체어가 없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기계를 돌리고 손작업을 하며 정성스레 물건을 만든다. 왜 장애인들이 모여서 일을 할까? 몸도 불편한데, 일하기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그들은 일을 해서 행복한 사람들이다. 일이 하고 싶어 어렵사리 에덴에 찾아왔고, 단순한 작업에 익숙해지기까지 적어도 여섯 달 이상의 집중훈련을 받으며 자신들을 단련시켰으며, 그렇게 한 사람의 근로자가 되었다. 남들은 일하기 싫어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일을 해서 살맛이 나고 일해서 번 돈으로 국가에 세금 내는 게 좋다는 사람들. 에덴복지재단의 사람들은 왜 거꾸로 생각하고 있을까?
“일하기 전에는 집에서 아주 우울하게 지냈어요. 나가봐야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아침이면 옷을 차려입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일을 하려고 여러 군데 문을 두드리고 직접 찾아가기도 했지만, 아무도 일을 시켜주지 않았어요. 지금은 일을 해서 내 힘으로 살아가니 당당하고, 사람답게 사는 것 같아요.” 이곳에서 일하는 최정희 씨의 말이다.
어릴 적부터 장래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들, 직업이나 미래가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던 사람들, 평생 집 안에 갇혀 가족의 보호를 받거나 그도 안 되면 나라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야 할 것으로 여겨지던 중증, 중복 장애인들이지만 이곳 에덴에서는 당당한 직업인이다. 어떤 이에게는 하찮은 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립의 방편이고 자존심의 원천이며, 세상과의 단절과 소외 없이 사회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아줄이다. 그러므로 이곳 에덴은 일 그 자체가 행복을 만들어내는 행복공장인 셈이다.

2. 국내 최대의 장애인 고용 생산시설을 일궈낸 전신마비장애인

행복공장의 공장장, 즉 에덴복지재단을 만들고 키워낸 정덕환 이사장은 그 자신도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장애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최연소 유도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8년간 승률 85퍼센트를 자랑하는 유도선수로 활약한 그는 연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2년, 동료선수와의 연습경기 도중에 경추 4번과 5번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사고 당시 3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결과는 전신마비 지체장애 1급. 혼자서는 밥도 못 먹고 세수도 못 하며 대소변 등의 신변처리도 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는 전도유망한 국가대표 선수에서 하루아침에 인생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듯한 좌절감을 맛보았다.
뼈를 깎는 재활훈련으로 휠체어에 앉게 된 그는 생계를 위해 오토바이 행상과 동네 구멍가게 운영을 했고, 일을 하면서 비로소 ‘쓸모없는 존재’라는 열패감을 극복하고, 가족과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고 꾸려간다는 자긍심과 삶의 활력을 되찾게 되었다. 이에 다른 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에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1983년, 장애인 5명과 함께 독산동의 세 평 공간에 일과 생활을 함께하는 장애인 공동체 ‘에덴복지원’을 설립했다. 일거리를 확보하는 영업은 정덕환의 몫이었고, 그렇게 해서 에덴 공동체는 석 달 만에 첫 수입으로 36만 원을 벌었다. 3개월간의 생활비 지출은 35만 원. 남는 돈은 없었지만, 내 손으로 일해 내 밥벌이를 했다는 것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운영에 자신감을 갖게 된 정덕환은 휠체어를 타고 구로공단을 누비며 더욱 본격적으로 영업에 나섰다. 공장의 수위가 막으면 문을 열어줄 때까지 매일 찾아가 졸랐고, 사무실 계단이 만리장성처럼 가로막으면 사람들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몇 층이고 올라갔다. 그렇게 해서 담당자를 만나도 일을 따오기까지는 첩첩산중이었다. 가장 힘든 벽은 장애인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겠느냐는 사회적 편견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열심히 정성들여 작업을 하여 만족도를 높였다.
에덴의 식구는 곧 30명, 50명으로 늘어났다. 건물주의 부도로 거리로 쫓겨나거나 홍수로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일을 하겠다고 찾아오는 장애인이 끊이지 않았다. 80여 명까지 늘어났을 때 갑자기 구로공단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80년대 3저호황이 끝나면서 구로공단의 전자제품 수출 산업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전자제품 임가공을 주로 하던 에덴에도 일거리가 뚝 떨어졌다. 80명 대식구의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업종 전환이 필요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장애인이 만들었다고 시장에서 차별받지 않을 ‘상표 없는 물건’을 만들자 했고, 회의를 거듭한 끝에 비닐봉투로 결론지었다. 시장이나 가게, 길거리 좌판 등 어느 곳에서나 물건을 사면 비닐봉투에 담아주니 수요가 꾸준할 것이고, 브랜드 이미지가 필요 없으니 품질만 좋으면 판로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장애인이 만들어 부실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비닐봉투를 만들던 에덴은, 몇 년 뒤 찾아온 쓰레기종량제 시대를 맞아 최고의 품질로 납품 경쟁에서 승리, 분리수거용 봉투 전문생산업체로 자리 잡았다. 작은 일을 열심히 하면 큰 일을 해낸다고 하던가.
2002년에 ISO 환경경영시스템과 품질경영시스템을 획득한 에덴은 현재 서울 25개 구청을 비롯하여 서울과 수도권 36개 자치단체에 쓰레기종량제 봉투를 납품하는 한편 OEM 방식으로 연 4천 톤의 친환경 주방세제를 생산 납품하고 있으며, 연 매출은 150억여 원이다. 에덴에서 일하는 170여 중증, 중복 장애인의 평균임금은 110만 원으로, 전국 중증장애인 평균임금의 세 배에 달한다. 장애인 복지의 가장 바람직한 모델로 인정받아 국제노동기구(ILO)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3. 1030(일공삼공), 일이 없으면 삶도 없다

1973년, 서울 약대에 합격한 어느 수험생은 소아마비란 이유로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 80년대에도 장애인에게 대학의 문턱은 높기만 했다. 농아나 맹아가 대학에 들어가면 화젯거리가 되어 신문에 실렸다. 회사에 들어가기란 대학입시와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들었다. 왼쪽 다리가 3센티 짧은 한 남자는 한양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120군데에 원서를 넣었지만 최종면접에서 모조리 떨어졌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업체, 공무원시험에서도 떨어뜨렸다. 이유는 오직 ‘경미한 소아마비’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중증, 중복 장애인에 대한 처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에 대한 근대적인 사회복지사업이 시작된 것은 1950년이다.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고아와 장애인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는 차원의 복지사업이었다. 실제적인 사회복지사업이 시작된 것은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를 맞아서였다. 심신장애복지법이 생겼고 보건사회부에 재활과란 장애인 전담부서가 생겼다. 1982년 7월부터 장애인 취업알선을 시작했고, 1986년 6월에 보호작업장을 설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85년 11월에는 청각장애와 시각장애, 지적장애, 자폐증 등의 자녀를 둔 800여 명의 부모들이 모여 전국 장애인 부모대회를 열었다. 그동안 쉬쉬하며 숨기던 장애자녀를 세상 밖으로 내놓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1988년에는 서울에서 장애인올림픽이 열렸다. 귀여운 곰 두 마리가 발을 묶고 뛰는 곰두리 마스코트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힘을 합쳐 살아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했다. 법안이 마련되고 공식적인 선언과 행사가 있다 해도, 실생활에서 체감할 수 있는 변화가 생기기까지는 지난한 시간이 지나야 했다.
정덕환이 에덴복지원을 시작한 게 1983년이니,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보호작업장이 설치된 1986년보다 훨씬 먼저 ‘중증장애인 자립작업장’을 만든 셈이다. 에덴이 장애인 직업재활시설로 인가를 받은 것은 1990년이다. 그는 2009년에 한국장애인 직업재활시설협회 회장이 되면서 10월 30일을 장애인 직업재활의 날로 선포, 장애인 일자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고, ‘1030 착한 소비운동’ ‘1사1품 결연사업’ ‘중증장애인 생산품 우선구매법’ 등을 제안, 추진했다.
정덕환은 2004년에 일본의 카주오 이토가(系賀一雄) 기념재단에서 주는 제7회 카주오 이토가 기념상을 받았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아·태지역 장애인들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상이다. 이 상을 받은 사람으로는 중국의 국가주석을 지낸 덩샤오핑(登小平)의 장남 덩푸팡(登撲方)이 있다. 하반신마비장애인이자 중국 장애인협회 회장인 덩푸팡을 오사카의 한 포럼에서 만났을 때 그는 정덕환에게 “나는 국가의 힘을 빌려 장애인 사업을 하지만, 당신은 자기 삶을 바쳐서 장애인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헌신해왔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장애인 복지라는 용어조차 생소하던 시절, 자립작업장을 처음으로 만들어 국내 최대의 장애인 고용 생산시설로 일궈낸 정덕환의 꿈은 단 하나다. 일을 할 수 있고, 일하고 싶어하는 중증장애인도 당당한 근로자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일을 하지 않았다면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나라의 복지혜택만 기다렸을 장애인들이 일을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도 꾸리고 국가에 세금도 낸다. 일자리를 통해 자아실현도 하고 국민으로서의 의무도 당당히 해낸다. 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살아야 하는 수혜적인 삶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 자신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장애인이지만, 정덕환은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꾼 남자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터를 만들었다!

·유도 국가대표 선수에서 하루아침에 전신마비장애인이 된 정덕환. 사고 직후 의사는 사흘을 넘기기 어렵다 했지만 40년을 넘게 살고 있다. 평생 누워 지낼 줄 알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세상 밖으로 나갔다. 직업을 가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중증장애인의 자립과 재활을 도와 국내 최대의 장애인 고용생산시설을 일궜다. 그 자신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지만 휠체어에 앉아 세상을 바꾼 남자, 정덕환. 그가 꿈꾸는 새로운 기적은 무엇일까?

·남들은 세금 적게 내고 싶다는데, 열심히 일하고 세금 꼬박꼬박 내는 게 즐겁다는 사람들. 목표는 수익이 아니라 고용이라는 회사. 완전자동화 시대에 어떻게 하면 기계 대신 더 많은 사람이 일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일터. ISO 품질경영 시스템과 ISO 환경경영 시스템을 획득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의 바람직한 역할모델을 제시하여 UN 국제노동기구(ILO)에 최초로 등록된 에덴 행복공장의 비밀.

·일은 단순한 밥벌이가 아니다. 자존심이고 생명이다. 돈을 많이 벌든 적게 벌든, 세상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든 아니든, 땀 흘려 일하고 수고한 대가를 받는 삶은 고귀하다. 여기에는 장애인 비장애인의 구별이 없다.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공장, 에덴 공동체 사람들의 힐링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