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역사/사회/종교

고려를 읽다

크게보기

고려를 읽다

역사와 삶의 고비마다 고려를 지키고 빛낸 문장들

저자
이혜순
출판사
섬섬
발행일
2014.05.15
정가
25,000 원
ISBN
9791195261703|
판형
152*224
면수
512 쪽
도서상태
판매중

구매하기

신산(辛酸)한 시대에 핀 인문학의 꽃

고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삶과 역사의 고비마다 무엇을 열망하고 고뇌했을까? 국왕의 카리스마가 담긴 정치공문부터 목숨을 내놓고 임금을 비판한 신하의 상소문,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간절한 진정성을 담아 보낸 외교편지, 사대부의 신념과 철학이 담긴 글, 그리고 남편과 아내, 스승과 제자, 친구들 사이의 진솔한 이야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고려 5백 년의 열정과 사유를 가슴 뜨겁게 읽는다!

이혜순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문학과와 미국 일리노이대학(University of Illinois)에서 각각 국문학 석사와 비교문학 석사를, 중국 대만 국립대만사범대학에서 중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현재 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고전문학회 회장, 한국고전여성문학회 회장, 한국한문학회 회장,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를 역임했고, 한국일보 출판문화상, 이화학술상, 우호학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고려전기 한문학사』, 『조선통신사의 문학』, 『조선조후기 여성지성사』, 『전통과 수용-한국고전문학과 해외교류』 등이 있다.

1장|왕과 신하, 그들의 세계

-딴 마음을 먹지 마라 _ 신하들에게 경고하다|태조 왕건
-그대는 고려왕업의 기초 _ 경순왕 김부에게 관작을 높이다|경종, 왕융
-청사에 영원히 빛나시리 _ 국왕의 죽음을 애도하다|박인량
-제 한 몸 수양도 못했는데 어찌 천하를 구제할 수 있으리까 _ 임금에게 속마음을 토로하다|이자현
-현실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문종의 옛 법전을 따르셔야 합니다 _ 귀화한 관리의 상서|임완
-해동 삼국의 지나온 세월이 장구하니 _ 『삼국사기』를 지어 올리는 글|김부식
-우리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소 _ 온달 장군의 이야기|김부식
-어찌 신이 홀로 권력을 독차지한단 말입니까 _ 지공거를 사양하다|이규보
-사공에게도 뇌물이 필요하다니 _ 뇌물에 대한 단상|이규보
-요물이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_ 목숨을 걸고 국왕에게 간하다|이존오
-아름다운 내 누이야 _ 국왕이 누이를 책봉하다|저자 미상
-충고하고 간하는 의리는 조정에까지 알려졌네 _ 돌아가신 신정대왕태후께 시호를 올리며|성종, 저자 미상

2장|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다-문장보국의 명문들

-그 누가 분개하지 않으며 원망하지 않겠는가 _ 우리 땅에 설치한 요나라 시장의 철거를 요구하다|박인량
-제왕의 도리는 다른 사람에게 감당 못할 일을 시키지 않는 것 _ 고려의 길을 송에게 빌려줄 수 없음을 알리다|김부의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킨 최치원 _ 『당서』에 왜 그의 열전이 빠졌을까|이규보
-우리에게 토지를 돌려주시기를 _ 원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석복암
-남의 집안의 딸을 빼앗아 가다니 _ 원나라에게 처녀 공출의 폐지를 요구하다|이곡
-우리는 색목인(色目人)입니다 _ 고려인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달라는 글|이제현
-고려는 중화와 너무 다른 나라요 _ 고려의 원나라 입성을 결사반대하는 상서|이제현
-우리 충선왕이 고국에서 여생을 마치게 해주십시오 _ 원나라 승상 백주에게 편지를 보내다|이제현
-훗날 역사가가 “일본에 사신으로 간 정몽주라” 할 것이니 _ 일본에 사행하는 정몽주를 전송하며|이숭인

3장|친구란 무엇인가

-친구와 편지로 속마음을 털어놓다 _ 이담지에게 주는 절교 편지|임춘
-글은 자기 능력대로 써야 _ 벗 이인로와 소동파의 글을 논하다|임춘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 _ 친구와 과거시험 문장을 논하다|임춘
-나는 뜻과 말을 아울러 창조했지요 _ 친구와 편지로 글쓰기를 논하다|이규보
-이제 나는 뉘와 더불어 시를 논할까 _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다|이규보
-그 이름, 그 자가 바로 그 사람이지요 _ 이호연을 보내며|이숭인
-호연은 참으로 비상한 사람 _ 둔촌의 삶을 기록하다|이색
- 버드나무 가지 꺾어 채소밭에 울타리 치고 _ 포은의 집을 묘사하다|이색
-설산과 스님이 하나가 되리 _ 승려 우선의 호를 해설하다|이색
-도는 하나다 _ 『나옹화상어록』의 발문을 쓰다|이달충
-선종과 교종, 유교와 불도에 자유자재로 출입하신 그대여 _ 『원감국사어록』의 서문을 쓰다|석명우
-어찌 한 고을만의 복이겠소 _ 상주목사로 부임하는 친구를 전송하며|이제현

4장|사람의 일생

-누가 당신을 무능했다고 말하겠소 _ 남편이 쓴 아내의 묘지명|최루백
-어찌 나를 버리고 하루아침 갑자기 떠나셨는가 _ 남편이 쓴 아내의 묘지명|최윤의
-내 아픈 마음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리오 _ 남편이 쓴 아내의 묘지명|박전지
-술의 일생은 곧 사람의 일생 _ 사람 이야기로 술의 전기를 쓰다|임춘
-돈의 일생은 곧 국가의 흥망사 _ 사람 이야기로 돈의 전기를 쓰다|임춘
-마음그릇이 출렁출렁 만경 물결 같아 _ 술의 전기를 쓰다|이규보
-하늘과 땅도 나를 얽매지 못하리로다 _ 내가 보는 나|이규보
-조씨의 행적이 조정에 보고된다면 향리에도 빛이 날 텐데 _ 절부 조씨의 일생|이곡
-장렬하여라, 옛날의 충신열사보다 낫구나 _ 열부 배씨를 기록하다|이숭인

5장|사대부의 삶과 철학, 사회와 역사인식

-능히 그 그칠 데를 알아서 그친다 _ 내 집을 지지헌이라 부른 뜻은|이규보
-흥겹구나, 농가의 즐거움이여 _ 사가재에 내 뜻을 품다|이규보
-그른 것을 고쳐 착한 데로 옮기기를 _ 과수의 접목에서 배우다|이규보
-집 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 수 있구나 _ 작은 채소밭을 가꾸며|이곡
-우리의 일생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닐까 _ 꿈 이야기를 적다|이규보
-내가 흐릿한 거울을 즐겨보는 까닭은 _ 거울에 대한 단상|이규보
-어찌 미물이라고 죽음을 좋아할까 _ 이와 개에 대해 말하다|이규보
-잘못된 것은 빨리 고쳐야 _ 집을 수리하면서|이규보
-자기 성찰의 중요성 _ 하늘과 사람이 서로 이긴다는 주장에 대하여|이규보
-색이란 무엇인가 _ 역사 속의 미녀들, 나라를 결딴내다|이규보
-굶주리다 못해 남편은 아내를 팔고 _ 인간 시장을 경고하다|이곡
-하늘의 운수인가, 사람의 책임인가 _ 홍수와 가뭄의 원인을 논하다|이곡
-조그만 물건에도 반드시 운명과 재수가 있다 _ 바둑알에 대해 쓰다|이색
-죽어 인을 이루어야 _ 굴원이 죽지 말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다|이규보
-한신의 배반은 한 고조로 말미암은 것 _ 「한신 열전」을 다시 논하다|이규보
-충성과 효성 모두 잃었네 _ 오자서를 비판하다|이제현
-하늘이여, 이게 무슨 일입니까 _ 사형당한 스승을 제사하며|정몽주
-태조 왕건은 송나라 태조에 맞서는 분 _ 충선왕이 고려 태조를 평가하다|이제현
-우리나라는 본래 성인의 나라 _ 시로 동명왕을 기록하다|이규보
-내 아버지 삶은 국, 나도 한 그릇 주시오 _ 한 고조 유방을 비판하다|이곡

6장|종교와 학문의 세계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무섭던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네 _ 혜음사 건축의 전말을 기록하다|김부식
-우리나라의 근심을 면하게 하옵기를 _ 건덕전에서 도교의례를 행하다|김부식
-백성들과 함께 즐기시려고 의식을 거행하시나이다 _ 팔관회를 축하하며|곽동순
-지금은 단군 이래 처음 맞는 새로운 주기 _ 승려의 도첨제 시행을 아뢰다|백문보
-묻고 대답함이 강물을 터놓은 듯 _ 국왕이 국학에 행차하다|김수자
-군신간의 사귐은 오직 지성으로 _ 왕이 청연각에서 신하를 위해 잔치하다|김인존
-집과 나라의 영화를 드러내는 것이 어찌 이 한때에만 그치랴 _ 연경으로 돌아가는 가정 이곡에게|최해
-온 나라가 흠모하는 과거의 아름다움 _ 세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했네|이색
-과거는 삶에 유용한 학문을 시험 보는 것 _ 과거시험에서 정치의 길을 묻다|이곡
-고전을 읽는 방법 _ 성현의 말씀을 지금 직접 듣는 것처럼 해야|이제현

 

1. 고려의 열정과 고려 지식인의 사유(思惟)에 접속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이고 삶은 어땠으며,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열망하고 고뇌했을까.
역사와 인문교양서 분야에서 조선시대에 대한 고찰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미시사를 다룬 책들 덕분에 조선의 뒷골목 풍경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왕과 사대부의 삶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으며, 역관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과 직업군의 삶, 여성 풍속 그리고 노비와 기생의 일상까지 어느 정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으로 대표되는 18세기 문화사와 지성사의 새로운 변화를 다룬 책들 또한 인문서 독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조선 6백년이 그 면면을 하나씩 드러내며 우리에게 조선시대의 문화와 삶에 대한 조각그림 맞추기를 허락하고 있는 데 비해, 고려시대는 여전히 안개에 싸인 미지에 가깝다. 가장 큰 이유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역사를 알 수 있는 책은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가 유일하다. 고려 전기의 개인 문집은 안타깝게도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나마 남은 자료는 신하가 임금에게 올린 표문(表文)이나 상소문,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 등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성격의 글들인데, 이조차도 일반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대의 ‘문학’ 개념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문서로 분류되어 역사·학술적인 자료로만 간주되었다.
고려시대의 글이 오늘날 일반인에게 제대로 공유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번역의 문제다. 고려, 특히 전기의 문장은 형식미에 치중한 변체문이 많고 또한 용사(用事 : 전례와 고사나 사실을 인용하는 문장의 작법. 경서나 역사서 또는 여러 사람의 문장에서 특징적인 관념이나 사건을 두세 개의 어휘에 집약시켜 함축된 뜻을 배가시키는 방법)가 많아서, 번역이 만만치 않거니와 번역으로 그 뜻과 맛을 제대로 전달하기도 어렵다. 조선 후기의 소품문(小品文)들에 비해 자료 접근의 벽이 현저하게 높다.
이 책의 저자 이혜순은 고려시대의 공문서가 역사·학술적으로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지은이의 진심과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문학적 역량을 기울여 저술하였고, 이로 인해 읽는 이를 감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출사표」도 정치문서의 하나인 표문인데, 군대를 이끌고 나라를 떠나면서 황제에게 올린 이 글이 뛰어난 문장의 예로 높이 평가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 책은 고려시대의 명문장을 뽑아 우리 글로 번역하고 해설을 붙인 것이다. 여기서 명문은 문학적인 평가를 받은 작품은 물론 정치적인 글과 외교문서, 논설문, 편지, 묘지문, 종교 의례문, 과거시험 문제까지 모두 포함한다. 이들이 명문으로 선택된 것은 글에 담긴 저자의 진정성, 그리고 이를 설득력 있게 구성한 문장력에 있다.

2. “고려 5백년을 지속시킨 힘은 바로 문장이다.”

고려는 조선에 비해 훨씬 역동적인 사회였다. 고려의 지식인들은 특정 철학이나 종교의 이념에 매몰되지 않아 자유로우면서도 다양한 사고와 의식을 보여주었다. 신분 간 고착이 심하지 않아 이동이 있었고 왕실과 귀족이 정면으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역동성은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고려의 정치를 반증하기도 한다.
또한 고려는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았는데, 특히 중국과 만주의 정세 변화에 따라 나라 운명도 수시로 바뀌었다. 거란의 내침과 요나라의 요구에 시달렸고, 송나라 멸망 이후 새로 세운 남송과 여진족 국가인 금나라 사이에서 새우등 터지지 않으려고 노심초사 했으며, 대몽항쟁 실패 뒤에는 오랫동안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를 바로잡는 데 일조한 것이 바로 문장보국의 글들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시대적 환경이 고려 문장의 공적 역할을 좀 더 부각시켰을지도 모른다. 이 글들을 읽어보면 흥망성쇠가 빈번하게 되풀이되면서 대륙을 지배하는 민족의 교체가 무상했던 이웃 나라 중국의 혼란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작은 나라 고려가 5백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바로 문장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문학이 나라를 살린다는 말은 그냥 있는 게 아니다.
이 책에 소개된 문장은 크게 여섯 가지 주제로 나뉜다.
1장 ‘왕과 신하, 그들의 세계’에서는 임금이 신하에게 주거나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모았다. 신하들에게 반역할 마음을 품지 말라고 경고한 태조 왕건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교서도 있고, 임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야기 속에 에둘러 담은 김부식의 「온달전」도 있으며, 임금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박인량), 벼슬을 사양하는 글(이자현), 간신을 싸고도는 왕에게 아예 대놓고 수위 높은 돌직구를 날린 이존오의 상소문도 있다.
2장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다-문장보국의 명문들’에서는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영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해 보낸 외교편지들을 실었다. 고려 땅에 설치한 요나라 시장의 철거를 요구한 박인량의 글, 금나라에 끌려간 휘종과 흠종 황제의 귀환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남송 고종의 요구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은 제왕의 도리가 아니’라며 거절의 뜻을 밝힌 김부의의 편지, 원나라에게 처녀 공출의 폐지를 청한 이곡의 글, 고려의 원나라 입성을 반대하는 이제현의 상서 등이 있다.
3장 ‘친구란 무엇인가’에서는 친구들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 친구의 이름이나 호, 집에 대한 해설, 친구의 책에 써준 서문과 발문 등을 모았다. 이담지에게 보낸 임춘의 절교 편지, 이규보와 전이지의 우정이 담긴 편지와 글, 상주목사로 부임하는 친구를 전송하는 이제현의 글, 둔촌 이집의 친구인 이숭인과 이색의 글, 그리고 고려 말 삼은(도은 이숭인,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그룹의 일상과 우정을 엿볼 수 있는 글이 실려 있다.
4장 ‘사람의 일생’에서는 남편이 쓴 아내의 묘지명을 몇 개 실었는데, 고려시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의 일생에 빗대어 술과 돈의 전기를 쓴 가전인 임춘의 「국순전」과 「공방전」, 이규보의 「국선생전」이 있고 자신을 다른 사람에 가탁하여 쓴 탁전(託傳)도 있다. 당시의 절부(節婦)와 열녀에 관한 기록도 있다.
5장 ‘사대부의 삶과 철학, 사회와 역사 인식’에는 당시 지식인의 내적 사유, 시대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글이 실려 있다. 이 장에는 이규보의 글이 다수 실렸는데, 집과 과일나무, 꿈, 거울, 이와 개 등 사소한 사물이나 소재에서 사색의 실마리를 잡는가 하면, 중국 초나라 굴원의 죽음을 비판하거나 『한서』「한신 열전」의 내용을 논박하는 글도 썼으며, 시로 동명왕을 기록하여 민족적 자부심과 민족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한 고조 유방을 비판한 이곡의 글, 아버지인 이곡이 남긴 바둑알을 보며 인간의 운명과 재수에 대해 추론하는 이색의 수필, 스승 김득배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울분을 토로하며 잘못된 정치에 항의한 정몽주의 문장도 있다.
6장 ‘종교와 학문의 세계’에서는 종교 의례나 행사, 임금과 학사 신하들 간의 교류, 과거 급제와 공부에 대한 글을 다루었고, 특히 마지막 두 항목엔 당시의 실제 과거시험 문제인 ‘책문(策問)’을 실었다. 시험문제 자체가 명문일 뿐 아니라, 그 시험문제의 해답은 경학과 역사, 제자백가, 시문의 기반을 단단히 쌓은 사람만이 낼 수 있다. 고려가 어떠한 인재를 찾기 위해 고심했는지는 알 수 있다.

3. 고려사회와 문화를 읽는 새로운 프리즘

역사의 고비마다 외세로부터 영토를 지키고 국권을 방어하기 위해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간절한 진정성을 담아 보낸 외교 편지를 읽다 보면, 역사책을 읽으면서도 정리되지 않았던 고려와 주변국의 복잡한 정세 변화가 한눈에 잡힌다. 임금과 신하 간에 주고받은 교서와 상소문을 읽다 보면 당시의 고려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던 사안이 요연하게 정리된다. 서술이 아닌 사건과 이슈를 통해 역사를 접하기 때문이다.
고려사회와 문화, 풍속을 알 수 있는 단서도 곳곳에 포진해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건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다.

고려의 외교는 지식과 문장력의 싸움 :
국가 간 영토분쟁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양국 간 외교 마찰은 자칫 국난을 불러올 수 있는 미묘한 문제여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서 작성은 특히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박인량의 문장이 맑고 고상하였으므로 송나라와 요나라에 보내는 외교문건들은 모두 그가 초안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고려는 거란족과 이들이 세운 요나라 때문에 특히 많은 어려움을 당했는데, 고려 성종 14년(995)에 서희가 소손녕과 만나 담판을 지었는데도 합의를 저버리고 다시 압록강 안쪽에 국경을 정하려고 강을 넘어와 군사시설을 짓거나 시장을 건설하는 등 침범을 일삼았다. 이에 박인량은 ‘황제의 조서에 먹이 채 마르지 않았는데도 갑인년(1014)에는 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만들었고 을묘년(1015)에는 고려 땅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을미년(1055)에 궁구(弓口)를 설치하여 정자를 짓고 임인년(1062)에는 의주와 선주 남쪽에 시장을 세우려다 항의하자 중지하였으며 갑인년(1074)에도 탐수암(探守庵)을 짓고 버티더니 이제는 또 고려 땅에 요나라 시장을 세웠다’며 1088년에 시장 철거를 요구하는 서장(書狀)을 보냈다. 이는 요나라의 선대 임금의 유지에도 어긋나는 것이고 우리 사신이 수천 리 길을 오가며 수레와 말을 끌고 90년간 가져다 바친 공납의 공도 없애는 것이니 그 누가 분개하며 원망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양국의 국경분쟁과 합의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날짜까지 세밀하게 밝히며 조목조목 따지자 결국 요나라는 시장을 철거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박인량은 편지에 양나라와 초나라의 참외전쟁 등 고사를 동원하기도 했는데, 뛰어난 문장력만이 아니라 투철한 역사의식과 국내외 국경 분쟁에 관련된 풍부한 지식까지 동원하여 국가 방어에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회 여성의 역할과 지위 :
고려 고종이 몽고군에 항복한 뒤 원나라는 고려에게 저고여를 살해한 보상과 항복의 조건으로 공물과 높은 벼슬 집안의 동남동녀 5백~1천 명을 요구했고, 이것이 관례가 되어 해마다 많은 동녀가 원나라로 보내졌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4년까지 80년간 처녀 공납 사신은 50여 차례 왕래했고, 원나라 황실에 바친 처녀만도 150명이 넘었다. 원나라 사신들은 동녀 공출을 빌미로 고려에 와서는 가가호호 수색하여 자신들의 처첩감도 끌고 가는 비리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딸 가진 집마다 비상이 걸렸다. “일단 선발이 되면 부모와 친척이 서로 모여 통곡하면서 울기 때문에 밤낮으로 곡성이 끊이지 않고, 국경에서 떠나보낼 적에는 옷자락을 부여잡고 땅에 엎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서 울부짖기도 하며, 비통하고 분개한 심정에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하는 자도 나오며, 근심과 걱정에 혼절하여 쓰러지는 자도 있고 피눈물도 쏟다가 눈이 멀기도 하는” 핍진한 상황을 그리면서, 도대체 고려가 무슨 죄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묻고, 그 많은 사람들의 원망과 탄식으로 천지가 조화로운 기운을 잃어 흉흉한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곡의 글은 원나라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고려 충숙왕 복위6년(1337)에 동녀 공출이 중지되었으니 이 또한 문장보국의 예다.
한편 그의 글에는 당시 여성의 역할과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오는데, “고려의 풍속에서는 아들을 따로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고, 부모 봉양도 딸이 주관하기에 딸을 낳으면 더 애정을 쏟아 키운다”고 하였다. 당시 고려의 결혼풍속이, 일부 상류층에서 유교적 친영제가 도입되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대부분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를 가서 처가에 거주하는 서유부가혼(?留婦家婚)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출가외인’ 이념과는 아주 달랐다.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묘지문을 보면 당시의 부부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최루백의 처염경애는 생전에 집안 경제는 자신이 담당할 테니 남편은 독서에 전념하여 벼슬에 나가라면서, 나중에 자신이 죽고 남편이 성공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더라도 자기가 고생한 공은 잊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노동을 일방적인 의무나 희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분담’으로 생각한 것이다. 남편의 공적 삶에 개입하고 자신의 기여를 인정받고자 하는 당당함이 인상 깊다. 한편 충선왕의 측근이자 원나라에서도 명성을 떨친 박전지도 처묘지문을 지었는데, 그의 아내는 생전에 남편이 방문객들과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상사를 화제에 올리면 따라와 듣고 있다가 손님이 간 뒤에 남편에게 “당세의 일을 이야기하다가 자칫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입조심 할 것”을 충고하였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후 길쌈질로 딸을 키우고, 결혼한 딸이 일찍 죽자 이번에는 홀로 손주를 키우며 살아온 한 여성은 ‘절부(節婦) 조씨’로 기록되었다. 과부로 50년을 살며 절개를 지켰으니 절부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여성의 개가가 그만큼 흔한 일이었음을 반증한다. 조선시대, 특히 중기 이후에는 단순한 수절로는 열녀에 끼지도 못했다. 남편을 따라 죽는 ‘순절’이 열녀의 새로운 조건에 추가되었다. 저자는 부모와 자식을 남겨두고 남편을 따라 죽는 조선의 열녀보다 남은 자녀를 키우고 집안을 보살핀 조씨의 행적이 더 현실적인 귀감이 된다고 정리한다.

김부식의「온달전」에 숨은 뜻 :
조선 말의 한문학자 김택영은 『여한구가문초』에서 고려와 조선조의 뛰어난 문장가 아홉 명을 선정하면서 그중 첫 번째 인물로 김부식을 들고 「진삼국사표」와 「혜음사신창기」「온달전」 등을 수록했다. 저자 이혜순은 「온달전」의 탁월함은 소박하고 평이한 문체로 그려낸 등장인물의 삶 곳곳에 유가적인 감계(鑑戒)의식이 함축되면서 글의 깊이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고 하였다. 평원왕은 울보인 어린 평강공주를 놀리며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라고 했는데, 공주 나이 16세가 되어 귀족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그녀는 정말 온달에게 시집가겠다며 “왕은 농담 삼아 말하지 않습니다(王者無戱言)”라고 했다. 자신의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될 권력층과의 결연을 중시한 국왕에게 김부식은 공주의 입을 통해 언약의 실천이 신뢰를 이루는 데 중요하다는 것을 환기시킨 것이다. 왕 된 자와 신하 된 자의 가치관, 사람을 보는 안목, 왕과 신하의 합심과 협력, 본분 지키기 등 통치와 경세 의식이 온달의 이야기 속에 버무려져 있다고 보았다. 「진삼국사표」를 소개하는 글에서는 김부식이 과연 사대주의자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피력했다. 한편 김부식은 고려 전기 유학사상 전개의 핵심적 인물이지만 도교의례문, 불교 사찰인 혜음사 창건기와 불교적인 글도 썼다. 당시 고려는 유교와 불교, 도교가 자연스럽게 섞이는 사상적 유연성을 보였는데, 국왕이 도교 의식을 행하거나 유학자가 불교를 논하거나 승려가 유학적 기반 위에서 불교 이론을 펼치는 글도 이 책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절의와 충신의 대명사 정몽주는 외교의 달인 :
조선조 개국에 참여하지 않아 이방원에 의해 유배소에서 살해된 포은 정몽주는 충신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는 뛰어난 외교가이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이 회피하던 고된 외교사행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는데,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13일간 바다 위에서 표류한 끝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명나라와 고려의 관계 악화로 입경이 불허되는 수모도 겪었지만 결국 명나라와 수년간 누적된 세공(歲貢) 미납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는 외교 실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1377년에는 교류가 없던 일본에 보빙사로 가서 일본인들에게 문장과 학문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이 책에는 당시 일본으로 사행하는 정몽주를 전송하며 이숭인이 쓴 글이 실려 있다.

이 외에도 13세기 고려사회를 강타한 소동파 열풍, 국가적 재난과 재앙을 통치자의 부덕으로 돌리는 천인상관설의 재이관(災異觀), 무신의 난 이후 힘 잃은 문벌자손과 새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신진문사의 세대교체, 연경의 국제문화를 호흡한 지식인들의 새로운 사유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문장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으로 우리도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과 내면, 당대의 사회와 문화를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볼 새로운 프리즘을 얻게 되었다. 한국 한문학의 최고 권위자이자 국문학자인 저자가 안내하는 문장 여행이니, 이보다 든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