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영토 회복의 꿈과 500년 고려 전쟁사
『고려 북진을 꿈꾸다』에서는 당시의 국제정세, 양국의 군사제도 및 전략, 전술, 무기 등에 관한 풍부한 정보 전달 뿐만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이야기 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한족이 독점적으로 군림하던 판도를 깨고 파란을 일으킨 거란(요)과의 전쟁, 한국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대외정벌인 여진 정벌,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제국 몽골에 대한 항전시기, 그리고 북방 지역 문제로 밀려나 고려까지 침입한 홍건적과의 전쟁, 이렇게 네 개로 고려시대의 전쟁을 대분하여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저자 : 정해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중앙대학교에서 학부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그리고 같은 대학원에서 『조선후기 무과급제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한국 전통 병서의 이해』(2004), 『한국 전통 병서의 이해Ⅱ』(2008)가 있으며, 「병자호란 시기 군공 면천인免賤人의 무과 급제와 신분 변화」, 「임진왜란기 조선이 접한 단병기短兵器와 『무예제보武藝諸譜』의 간행」, 「임진왜란 시기 경상도 사족의 전쟁 체험」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들어가는 말 |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 전쟁
제1장 고려 태조, 북쪽으로 향하다
1. 10세기 동아시아 정세
중국 대륙의 분열
변방에서 일어난 제국 거란
여진의 존재
2. 태조의 원대한 구상
민심을 얻기 위한 노력
<훈요십조>에 담긴 뜻
5대 10국 정책
거란 정책
여진 정책
3. 북진 정책의 실체
왜 북진 정책이 필요한가
북진 정책의 신호탄 평양 개척
평양의 요새화
북계에 설치한 군사요새
청천강 유역까지 북상한 군사거점
4. 발해 유민의 활용
뜨거운 감자 발해
발해 유민의 규모
발해 유민의 전력화
◆ 회고와 전망
제2장 거란과 싸워 이기다
1. 거란의 전쟁 준비
거란은 강했다
군사제도
무기와 전법
2. 고려의 준비 태세
국내 사정
송과 거란 사이에 선 고려
군사제도
성곽과 무기
3. 제1차 전쟁
거란의 침공 배경
봉산성의 패배
할지론의 대두
안융진 전투의 승리
고려에는 서희가 있었다
4. 제2차 전쟁
거란의 침공 배경
흥화진과 통주성의 사수
서경 공방전과 개경 함락
통쾌한 반격
5. 제3차 전쟁
거란의 뒤늦은 후회
거란군의 목표
개경 직공에 실패한 거란군
아, 구주성이여!
◆ 회고와 전망
3장 ‘해동천하’ 고려, 여진을 정벌하다
1. 완옌부 여진은 누구인가
과소평가된 여진
완옌부 여진의 기원
완옌부 여진의 성장
완옌부 여진의 군사조직
고려와 완옌부 여진의 만남
2. 고려와 주변 정세
팽창이 멈춰버린 거란
송의 위축
고려의 번영
천리장성의 축조
여진 정책의 변화
3. 제1차 여진 정벌
여진 정벌의 배경
고전을 면치 못하는 고려군
성과 없는 귀환
정보 부재가 낳은 실패
재정벌 준비 : 별무반 창설
군기 확립
4. 제2차 여진 정벌
재정벌을 선언하다
고려의 군사 기동
9성 축조와 공험진
생활 터전을 빼앗긴 여진인들
반격에 나선 여진
9성에서 철수하는 고려군
◆ 회고와 전망
제4장 제국 몽골과 맞서다
1. 몽골의 부상
제국을 건설한 몽골
군사제도
무기와 전법
2. 동북아의 재편
금의 번성과 멸망
북송·남송의 멸망이 주는 교훈
변혁기 고려의 갈등과 선택
3. 13세기 고려의 상황
무인정권의 시대
군사력 실태
녹슬지 않은 관방 요새
4. 30년 전쟁의 시작
몽골의 침공 배경
4개월의 사투 구주성 전투
다루가치의 설치
강화로 천도한 고려 정부
몽골의 재침
5. 기나긴 전쟁
전장의 확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무인정권 붕괴와 종전
삼별초, 끝나지 않은 전쟁
◆ 회고와 전망
제5장 홍건적을 몰아내다
1. 홍건적의 발생
저무는 태양 원
홍건적이 일어나다
재건의 꿈이 좌절되다
2. 국내 정세
원 사신에게 걷어차이는 고려 임금
몽골 옷을 벗어던지다
100여 년 만에 되찾은 쌍성총관부
3. 제1차 홍건적 토벌
홍건적, 압록강을 넘다
고려군은 왜 서경을 내주었을까
4. 제2차 홍건적 토벌
홍건적, 청천강 방어선을 뚫다
안동으로 피신한 공민왕
다시 되찾은 수도 개경
◆ 회고와 전망
연표
참고 문헌
찾아보기
대국과 맞선 한반도의 강국, 고려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요동치던 10~14세기
고려는 군사력과 외교로 자존을 지켜냈다!
고대부터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현대까지 한반도의 전쟁사를 정리하는 플래닛미디어의 ‘한국 전쟁사’ 시리즈 두 번째 책, 『고려, 북진을 꿈꾸다-고구려 영토 회복의 꿈과 500년 고려전쟁사』가 출간되었다. 시대 전체를 개괄한 정사 형식이나, 특정 시대나 특정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야사 형식의 역사책은 많이 나와 있다. 그러나 전쟁과 전쟁사의 관점에서 한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이념과 정책의 흐름을 짚어보고, 그 배경과 시대정신을 분석한 책은 ‘한국 전쟁사’ 시리즈 이전에는 없었다. ‘한국 전쟁사’ 시리즈는 역사 속의 수많은 경험들을 취합하여 공功은 더욱 발전시키고 과過는 돌아 살펴서 지혜를 얻게 하는 책이다. 마냥 아름답거나 자랑스럽지만은 않을지라도, 뼈아픈 우리 역사가, 또는 그 교훈이 미래에는 우리를 제대로 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고려가 건국될 무렵인 10세기 초 동아시아는 중심축을 이루던 당唐이 무너지면서 격동의 시대로 돌입했다. 중국 대륙에는 50여 년간 5대 10국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힘의 공백 상태가 발생했고 이후 북방 민족과 중원 왕조가 경쟁하는 혼란의 시기가 시작된다. 그러한 역사적 시?공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고려는 전쟁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수없는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사에서 전쟁은 지나치게 국난 극복사로 이해되거나 서술되어왔다. 일제 강점기와 70년대 유신 독재를 거치는 동안 역사에서 자긍심과 향수를 찾아내려는 이데올로기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이 책이 몇몇 전투나 인물의 활약상의 나열에 머무르지 않고 궁극적으로 지향한 점은 고려시대 주변국 정세에 대한 관심과 이해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전쟁이 내전이 아닌 이상에야 상대국이 있을 터인데 당시 국제 정세나 상대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다면 그저 지난한 ‘외침’을 극복했다는 전쟁사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또한 한편으론 복잡다기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고려가 주체적으로 헤쳐 나가던 생존의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방식으로 고려시대 전쟁사를 서술했다고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고려가 싸운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왜 고려를 쳐들어왔는지, 그리고 전쟁 국면에서 고려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면 시각을 크게 확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국제 정세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고려, 북진을 꿈꾸다』에서는 동아시아에서 한족이 독점적으로 군림하던 판도를 깨고 파란을 일으킨 거란(요)과의 전쟁, 한국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대외정벌인 여진 정벌,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제국 몽골에 대한 항전시기, 그리고 북방 지역 문제로 밀려나 고려까지 침입한 홍건적과의 전쟁, 이렇게 네 개로 고려시대의 전쟁을 대분했다. 그리고 이 책은 당시의 국제정세, 양국의 군사제도 및 전략, 전술, 무기 등에 관한 풍부한 정보 전달 뿐만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해석하는 저자의 시각이 돋보인다. 한때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국왕이 파천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동북아의 강자 거란을 격퇴하고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지, 고려가 여진 정벌을 실패한 요인은 무엇인지, 세계 최대 제국 몽골을 상대로 했던 대몽항전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그동안 가볍게 평가되어 주목받지 못했던 홍건적과의 싸움에서 고려군의 활약을 재조명하고 있다.
북방의 대국과 맞선 500년 고려전쟁사
고려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대국이었다!
강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절박함이 고려를 동북아의 강자로 만들었고 고려가 획득한 성취는 상당한 정도의 성과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금의 제4대 임금 해릉이 등극한 후 넓어진 금의 영토를 보고 의기양양해하지 한 신하가 “본국은 강토는 넓지만 천하에 군주가 넷이옵니다. 남에는 송, 동에는 고려, 서에는 서하가 있어 이를 통일해야 진정 넓다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듯이 고려는 동북아의 한 축이었다. -들어가는 말 중에서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고 강대국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기에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한족韓族에 의해 세워진 중원 왕조 중심으로 우리는 역사를 배워왔다. 그러나 고려가 생존했던 시기에 흥했던 북방민족 거란(요), 여진(금)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은 많이 과소평가 된 것이다. 거란은 제국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한 세력이었고, 여진 또한 가벼이 볼 수 없는 대국이었다. 또한 몽골은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동서양 역사상 가장 막강한 제국 중 하나였다. 고려의 상대는 바로 이들이었다. 그동안 한족 중심으로 생각해온 세계관에서 거란, 여진은 강국으로 인식되지 않았기에 그들을 상대로 한 고려의 전과도 함께 평가 절하되어왔으나, 이 상대들의 힘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고려의 위상에 놀라게 될 것이다. 또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몽골과의 전쟁은 한국사에서 가장 긴 전쟁이었고, 비록 패했지만 유라시아 전역에서 고려만큼이나 몽골에 오래 저항한 나라도 드물었다. 외국 학자 중에는 몽골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1236년에 몽골이 고려 본토를 실질적으로 점령했다고 평하기도 하나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 고려의 대 몽골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세계사에서 고려가 몽골이 세운 원元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고려시대를 이해하는 키워드, 전쟁
오늘날을 비추어 보는 교본, 고려
고려는 993년~1019년까지 27년 동안 14회 정도 거란(요)과 크고 작은 전쟁을 수행했다. 고려는 거란의 침공으로 한때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국왕 현종이 나주까지 피신한 적도 있지만 종전 후 고려의 국제 위상은 대단히 높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고려가 동북아의 강자 거란을 격퇴하고 승자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133쪽
전쟁에 대한 성찰 없이는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고려는 전쟁의 시대였다. 거란(요) 전쟁, 여진 정벌, 몽골 전쟁, 홍건적 및 왜구 토벌 등 우리가 기억하는 큰 전쟁 외에도 북쪽과 남쪽에서 수시로 크고 작은 침략이 있었다. 10~14세기 동아시아! 고려가 마주한 당시의 세계는 한족이 명맥을 이어가던 중원의 한 국가가 국제질서를 장악하지 못하고 여러 국가가 우후죽순으로 경쟁하며 거란, 여진, 몽골 등의 북방민족과 중원 왕조의 대결로 요동쳤다. 이러한 혼란은 한족 왕조 송宋이 초래한 결과였다. ‘중국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문예가 치성했던 송. 그러나 그들의 군사력은 가장 약체라고 생각될 만큼 취약했다. 송이 경제력을 이용해 주변국에 많은 양의 비단과 은을 제공하면서 평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택하자 유목 민족들은 오히려 엄청난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송을 위협했고, 거란에 이어 여진?몽골도 흥기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나중에 몽골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송두리째 차지해면서부터는 오랫동안 유지되던 위상이 역전된다. 이런 혼란 속에서 국가 안보에 위기를 느낀 송이 적극적으로 손을 내민 국가가 고려였다. 고려의 국력이 송이 기대한 전략적 평가를 훨씬 넘어서자 송은 거란을 위협할 세력으로 고려를 주목한 것이었다. 1044년에 송나라 관리 부필富弼이 하북 지방의 방어책 12가지를 제시하면서 “고려가 거란을 섬기고 있지만 거란이 고려를 두려워하니 고려를 잘 대접해 거란이 우리를 침범하려고 하면 고려로 하여금 거란을 치게 하자”고 건의할 만큼 송은 고려의 군사력을 높게 평가했다.(159쪽) 이와 같은 국제정세 속에서 고려가 수행한 이민족과의 전쟁은 중원 왕조와 북방의 유목국가 사이에 벌어진 패권 다툼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의 전쟁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에 대한 파악과 이해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고려는 한반도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방과 중원의 국가들과 때로는 대결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세계사 속의 존재로 우뚝 섰던 것이다. 복잡다기한 국제 정세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땅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북진을 꿈꾸었던 나라 고려! 패배는 있으되 무릎 꿇지 않았던 나라! 고려가 주체적으로 헤쳐 나갔던 생존의 방식을 되돌아보는 것은 전쟁터와 다름없이 급변하고 경쟁이 치열한 오늘날의 국제정세를 마주하고 있는 우리에게 시의적절한 교본이 될 것이다.
성곽과 진鎭, 청야입보淸野入堡
고려는 북방의 강국들과 어떻게 싸웠는가?
일찍이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하들에게 계책을 묻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해 성을 쌓기 때문에 함락하기가 쉽지 않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려시대에도 거란이 고려를 치려 하자 신하들이 산성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귀환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면서 만류했다고 한다. 이처럼 한반도의 성곽들은 중국대륙과 북방민족들에게 위협적인 전설이나 불패의 신화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 67쪽
남송의 학자 섭융례葉隆禮가 펴낸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당시에 대해 “1010년 11월 겨울 황제가 군사를 보내 고려를 쳤다. 고려가 여진과 연합해 대적하니 우리 군사[거란군]들이 계속 패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송나라 기록에도 “거란이 크게 패해 장족帳族(거란의 명문부족으로 군관을 의미)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고 되어 있다. -120쪽
미사일도, 전차도 없었던 시대에는 어떻게 전쟁을 했을까? 『고려, 북진을 꿈꾸다』는 저 먼 과거에 원시적인 방법의 전쟁이 있었다는 추상적인 서술에 머무르지 않고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을 수행했으며, 고려가 어떻게 대국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는지 잘 설명해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사규모가 크지 않고 무기가 제한적인 시대에 방어는 공격보다 훨씬 강력했고 여기에 한몫을 한 것이 성곽이었다. 또한 역대로 한반도 주변에는 기마騎馬를 장기로 하는 북방 민족이 포진해 있어 이들과 맞설 때 평지에서 싸우는 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그보다는 성곽과 같은 방어시설을 활용하는 것이 유리했고 이때 자주 구사한 전술이 ‘청야입보淸野入堡’였다. 한반도에서 성곽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적이 침입하면 군사들과 주민들은 일단 인근의 성으로 이동해 성을 굳게 지키면서 장기전으로 돌입했다. 성으로 들어갈 때에는 가옥을 불태우고 각종 창고나 들판에 있는 모든 양식을 성으로 옮기거나 소각해 적군이 현지에서 군량을 확보할 수 없도록 했다. 청야입보를 병행한 성곽 방어는 전통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한국의 기본적인 방어개념이었다. 태조는 건국 직후부터 북쪽 지역에 성곽을 간헐적으로 축조했고 그 결과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성곽들과 진이 우뚝우뚝 세워졌다.(51쪽 지도 참조) 거란과의 전쟁 당시 고려는 수도가 함락되고 임금이 나주까지 피신할 만큼 대패했다. 그런데도 왜 『거란국지』에는 거란군이 패했다고 기록되었을까? 그 이유는 거란군이 진격로에 있는 성곽들을 함락시키지 않고 전진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전략은 북계의 요진에서 수성전을 펼쳐 적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동안, 중앙에서 대규모 중앙군을 파견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형태였다. 고려는 이미 태조와 광종 대에 청천강을 주방어선으로 삼아 적의 주요 침공로에 성곽을 쌓아 방어선을 축차적으로 구축했다. 이 때문에 고려 내륙으로 침입한 적은 성곽이나 주요진지를 우회해 진격했고, 그 결과 퇴로를 차단당한 채 전후방에서 고려군의 협공을 받아 번번이 무너졌다. 거란 측 기록에 따르면 거란군은 “항복한 여러 성들이 다시 배반”하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121쪽) 고려와 몽골 전쟁에서도 몽골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곳은 대부분 고려의 수성전이 빛을 발한 곳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구주성 전투를 꼽을 수 있다. 1231년 몽골군은 고려를 침입해 4개월이 넘도록 맹렬히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실제로 이 전투에 참여한 70여 세의 몽골군 노장수가 전투가 끝난 뒤에 구주성 주변에 흩어 있던 공성기계와 성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해 천하의 무수한 성을 공격했으나, 일찍이 이렇게 맹렬한 공격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는 성은 처음 보았다”고 할 정도였다. 고려가 장기간 몽골의 침공에 대처하면서 유효한 일격을 가할 수 있던 것도 수성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234~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