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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뉴스

11월 신간 도서 소개(종합) - 매주 업데이트 됩니다.
등록일
2023-10-25
조회수
418
 


오픈 시티

테주 콜 저 / 한기욱 역 / 19,800원 / 창비
 
“그래서 지난가을 저녁 산책을 시작했을 때,
뉴욕시는 걷기의 속도로 내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세계의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긴 센세이셔널한 작가, 테주 콜 소설 국내 초역
산책하며 만나는 뉴욕의 역사와 예술, 그리고 우리 시대에 대한 질문
펜/헤밍웨이상, 미국문학예술아카데미의 로즌솔상, 뉴욕시도서상 등 유력 문학상을 다수 수상함과 동시에 미국의 대다수 유명 일간지와 문학지에서 ‘올해의 책’ ‘최고의 책’으로 꼽힌 나이지리아계 미국 작가 테주 콜(Teju Cole)의 장편소설 『오픈 시티』(Open City, 2011)가 출간되었다.
테주 콜은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미술사 박사과정을 밟았고, 사진 작가이자 비평가로 활동한 한편 현재는 하버드대 창작실습(문예창작) 교수로 재직 중으로, 이같은 이력에 걸맞게 그는 소설과 사진집 등 형식과 내용 두루 다방면의 예술을 결합하는 작품활동을 활발히 펼치면서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그의 책 『오픈 시티』는 콜의 영어권 데뷔작이자 첫 장편소설로, 뉴욕의 대학병원에서 정신의학과 전임의 과정에 있는 화자 줄리어스가 뉴욕을 주 무대로 도시 구석구석을 산책하며 누비는 동안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사람, 풍경, 예술, 그리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펼쳐지는 진지한 사유를 담고 있다. 매력적이면서 어느 면에선 그 속내를 알기 쉽지 않은 인상적인 산책자 줄리어스의 발걸음은 오늘 우리 세계가 마주한 여러 현실적·역사적 문제를 탐구하는 한편 개인들이 간직한 사랑, 우정, 기억, 고뇌의 이야기를 함께 품는다. 독보적인 개성과 탁월한 깊이, 다양한 재미를 두루 지닌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강렬한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놀라운 개성, 다양한 발견, 켜켜이 쌓인 의미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저마다의 관심사나 흥미, 지식 혹은 경험 등에 따라 다채로운 재미와 깊이를 즐길 수 있다. 미술, 음악, 사진, 건축 등 여러 분야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가 마치 정련된 에세이처럼 읽힐 법한가 하면, 미국이라는 나라 내지는 서구의 역사적·당대적 이면에 도사린 폭력과 인종주의 등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통해 생각거리를 얻게 되거나, 그간 흔히 접하지 못했던 개성적인 소설을 읽는 그 자체의 재미를 느끼는 한편 뉴욕 곳곳을 직접 걸어보는 듯한 여행자로서의 감성 또한 만끽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작품 안에 또 하나의 겹을 담아냈다. 뉴욕의 가을이 브뤼셀의 겨울로, 다시 뉴욕의 봄에서 가을로 이어지는 사이, 현실의 산책이 다양한 풍경과 장소와 사람을 마주칠 때 마음의 걸음은 켜켜이 쌓인 과거와 역사를 거닌다. 섬세하고 성실한 관찰자로서 줄리어스는 자신과 타인, 장소와 시간의 역사와 기억을 정교하고 우아한 문장으로 기록하는데, 그런 끝에 문득 마주하는 것은 있었는지도 몰랐던 폭력의 기억, 아득한 자신의 구멍이다. 작품 안에서 인상적인 장면으로 서술되는, 이미 죽은 별이 보내오는 현존하는 별빛만큼이나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이 공백을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듯 그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그를 따라 산책처럼 이어지는 문장 끝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만나는 경험이다.

도시와 사람, 과거와 현재를 함께 거니는 산책자

독자에게 이런 새로움의 경험을 열어주는 것은 줄리어스의 시선과 자세에서 비롯한다. 그가 뉴욕(과 브뤼셀) 곳곳을 흘러다니며 주로 탐색하는 것은 이 도시에 내재한 폭력과 참사의 과거다. 목적 없이 시작된 발걸음은 유럽 식민주의자들의 원주민 학살, 흑인 노예화, 9·11 참사의 현장과 만나면서 폭력의 비극, 기억의 삭제, 애도의 방식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폭력과 참혹함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 혹은 그 기억을 삭제하는 행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는 더 정확한 기억의 자세를 생각하게 한다. 그가 만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또한 대개 안타깝고 절박한 사연을 품고 도시로 모여든 이들이다. 2차대전을 미국의 수용소에서 겪어야 했던 일본인 교수, 내전을 피해 탈출한 아이티 출신 구두닦이, 목숨을 걸고 라이베리아를 벗어났지만 미국 공항에서 체포돼 추방 위기에 처한 청년 등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모욕당한 존재들이다. 줄리어스는 이들에게 공감하며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자리에 놓인 감각을 끊임없이 환기하지만, 편견이나 선입견에 휩쓸리지 않으며 섣불리 자신을 개입시키지도 않는다. 인종차별과 유럽적 자유의 허구성에 저항하는 무슬림 청년에게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로 주류 백인 사회의 시각을 맞세우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우리 시대의 중심 문제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테러단체의 투쟁에는 선을 긋는 식이다.
이렇듯 독창적인 이 소설의 발견자이자 옮긴이로서 한기욱은 정확한 우리말 쓰임새와 원작의 리듬을 감각적으로 살린 데 더해 ‘옮긴이의 말’에서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와 세계적 현실에서 갖는 의미를 함께 짚어 풍부한 맥락을 제시한다. 이 작품이 데려다놓은 질문의 자리에서 독자에게 알찬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축복을 비는 마음

김혜진 저 / 16,000원 / 문학과지성사
 

“어떤 기분 좋은 상상들이 신기루처럼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2021·2022 젊은작가상 수상작 「목화맨션」 「미애」 수록

중앙장편문학상·신동엽문학상·대산문학상·김유정문학상 수상 작가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김혜진 신작 소설집

‘김혜진.’ 그 이름 석 자만으로 하나의 장르를 쌓아 올린 작가. 그의 세번째 소설집 『축복을 비는 마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21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목화맨션」, 2022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미애」, 2022년 김유정문학상 수상 후보작 「축복을 비는 마음」 등 발표 시점부터 기대를 모아온 수작들이 함께 수록되었다. 중앙장편문학상,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에 이어 올 8월 김유정문학상을 받은 후 펴내는 첫 책이다. 201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혜진은 어언 10년의 이력을 꽉 채우고 새로운 한 발짝을 떼기 시작한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은 집에 관한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집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은 그 집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다. 어디에 살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더군다나, 상품으로서의 집이 주거로서의 집을 압도하는 한국 사회에서, 집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은 계급, 젠더, 지역, 세대를 비롯한 충돌을 야기한다. 전작 『불과 나의 자서전』에서 다룬 주거 문제, 『경청』의 주요 화두였던 소통의 가능성, 『9번의 일』에서 거론한 노동 문제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의식이 이번 소설집 곳곳에 녹아 있는 까닭이다. 그 지난한 이야기를 거쳐 작가는 지금 당신이 머무르는 집의 안녕을 빈다.

말과 침묵 사이의 우연과 오해
그 빈틈을 채우는 상상의 가능성

첫번째 소설집 『어비』(2016)에서 “지금으로서는 여기까지밖에 말할 수 없다”(문학평론가 노태훈)는 입장을 견지하던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끊임없이 발화하는 인물들을 선보인다. 한편, 두번째 소설집 『너라는 생활』(2020)에서 끈질기게 2인칭 ‘너’를 호명하던 시선을 확장해 수많은 3인칭 ‘그’들을 작품 속으로 데려온다. 정확하게 도달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실감하는 동시에, 바로 그 점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그리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말하고 또 듣기로 결심한 것처럼.
이를테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20세기 아이」에서 재개발 동네로 이사 간 ‘세미’는 늘 심드렁한 가족들에게도, 중고 거래를 위해 만난 낯선 외국인 아줌마에게도, 집을 보러 온 부동산 고객에게도 해맑게 말을 건다. 세미에게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목화맨션」의 주인공 ‘만옥’과 ‘순미’는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이지만, 서로 끼니를 챙기고 이웃으로서 도움을 건네며 살갑게 지낸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지자 만옥은 순미에게 가능한 한 빨리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한다. 순미는 그런 만옥에게 계약 기간까지 살겠다며 따져 묻는다. 두 사람이 함께한 8년여의 세월은 그 말들 앞에서 점점 희미해진다.
침묵도 일종의 발화라면, 하고 싶은 말을 삼키는 사람이 있다. 「산무동 320-1번지」의 ‘호수 엄마’는 여러 채의 건물을 소유한 장 선생 대신 세입자들을 관리한다. 그녀는 시시콜콜한 사정을 듣고 싶지 않은 장 선생의 마음을 세입자들에게 전하지 않는다. 대신, 월세를 독촉한 후 집에 가던 발길을 되돌려 얼마 전 모친상을 당한 재민 엄마에게 조의금을 건넨다. 끝내 아무 말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축복을 비는 마음」에서 청소 업체 고용인과 고용주로 만난 ‘인선’과 ‘양 사장’의 관계는 별다른 마찰 없이 자연스레 끝난다. 인선은 괜한 트집을 잡아 일당을 깎는 양 사장의 치사한 대처보다 변명이나 사과를 내놓아야 할 순간,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태도에 실망감을 느낀다.
이처럼 작품 속 인물들이 일방적으로 쏟아낸 말들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흩어지며, 꼭 전해야 하는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말이야 말하는 사람 마음이”고 “듣는 건 듣는 사람 자유”(「자전거와 세계」)인 어려움 속에서도, 인물들은 “내 말 이해했어요? 무슨 뜻인지 알아요?” 하고 묻는다. “너무나 멀고 어떻게 해도 붙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데에 전력을 다한다. 재차 실패하면서도 또다시 소통의 가능성을 도모한다. 우리는 말과 침묵 사이에서 탄생하는 우연과 오해를 거듭하는 사이, 진정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이해력보다 상상력이 더 필요하다”(「사랑하는 미래」)는 사실에 다가서게 된다.

섣부른 이해보단 솔직한 오해를
집에 관한 이야기이자 집을 둘러싼 마음들의 이야기

등장인물이 놓인 다양한 처지는 전세 사기 대란, 기혼 유자녀 여성의 우울증, 청년 ‘니트족’의 증가 등 우리 사회에 만연하나 애써 외면해온 문제를 연상케 한다. 개개인의 슬픔과 고통이 사회적 현상과 맥을 같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 소설집의 미학은 통계학적 수치와 뉴스 보도 너머의 진실을 알려준다는 데 있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집주인’ ‘세입자’ ‘고용주’ ‘고용인’이라는 간단한 칭호를 붙이거나, ‘엄마’ ‘애인’ ‘친구’라는 통념상의 역할을 부여하는 대신, 그들이 한 사람으로서 겪는 내밀한 어려움에 주목한다. “어쩌자고 서로의 사정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아버렸을까”(「목화맨션」) 싶지만, 서로의 입장과 사정이 얽히고설키며 발생하는 역학 관계에 주목한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소는 ‘부동산’의 형태로 집약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며, 주택을 의미하는 하우스house와 가정을 의미하는 홈home 사이를 오가는 ‘집’의 역동성을 설명한다. 이 모든 층위를 통틀어 ‘과정으로서의 집home as process’ 개념을 제시하고, 이와 더불어 외부의 마찰과 압력에 따라 변하는 마음을 ‘과정으로서의 마음’이라 명명한다. 김혜진의 소설에서 마음의 변화를 보이는 건 늘 외부와 접촉하는 인물이다. 「산무동 320-1번지」에서 골머리 썩고 싶지 않아 세입자 관리를 일임한 ‘장 선생’이나 「미애」에서 아파트 철문을 굳게 닫고 안온한 삶을 유지하는 ‘선우’에겐 마음이 변할 만한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마음의 변화가 늘 선한 쪽으로 향할 리는 없겠지만,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선 충돌을 감행해야 한다.

철저히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서 일상을 보내던 주인이 마크를 만난 후 “텅 비고 적막한 공간” 대신 “짐작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는 미래에 속한” 장소를 얻은 것처럼, “뭔가를 더 알게 되는 게 불편”하여 눈과 귀를 닫고 살던 인선이 경옥의 낯선 말을 듣고서야 바로 그런 말을 “자신이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현재에 구속된 우리가 미래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꺼이 충돌을 감행하는 것이다. 혹은 적어도 마찰을 차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해함보다 유해함이, 차단보다 충돌이 우리에게 훨씬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라는 걸 믿어보는 것이다.
_이소, 해설 「마음과 구조」에서

작가는 “이 책에 실린 소설은 모두 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집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집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마음들에 대한 이야기”(‘작가의 말’)라고 밝힌다. 대부분의 인물은 상대의 고통 앞에서 이해나 공감을 표하기보단, 누가 더 불행한지 겨루는 사람들처럼 자신의 처지를 변호하고 항변하기 바쁘다. 그럼에도 현실에선 좀처럼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내뱉는 장면은 어떤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것은 김혜진의 소설들이 줄곧 말해온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한 오해가 섣부른 이해보다 효과적이란 사실을 시사한다.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에 대해 말하는 일이기도 하며, 이는 곧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지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한 시절 머물렀던 ‘과정으로서의 집’들을 거치며 ‘과정으로서의 마음’을 체득하게 되고, 그리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사랑하는 미래」).

티끌만 한 가능성을 움켜쥐는 절박함
가능할 리 없다는 의심 속에 피어나는 진실한 소망

여덟 편의 이야기는 남루한 현실 속에서 기어코 희망의 조각을 건져 올린다. ‘미애’는 독서 모임 엄마들과 어울리며 평범하게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떠올리고(「미애」), ‘세미’는 길바닥 어딘가 중고로 팔 만한 물건이 있기를 희망한다(「20세기 아이」). ‘만옥’은 남편의 병이 호전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목화맨션」), ‘남우 사모님’은 부동산 임장을 다니며 좋은 기회가 찾아오리란 희망을 놓지 않는다(「이남터미널」). ‘현지’는 한때 친했던 ‘정민’과 다시 화해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지며(「자전거와 세계」), ‘주인’은 사랑하는 애인을 보러 가는 길에 희망적인 확신에 사로잡힌다(「사랑하는 미래」). 이런 크고 작은 희망을 빌미 삼아, 그들이 얻는 것은 약속된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버티는 힘이다. 잠깐 떠올랐다 사라지는 신기루일지언정 누군가에겐 지금을 살게 하는 아름다운 불빛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에 어른들의 눈을 피해 어딘가로 사라진 아이들이 두 번 등장하는 점이다. 「미애」에서 미애의 딸 ‘해민’과 선우의 딸 ‘세아’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보러 간다. 「20세기 아이」의 ‘세미’는 물난리 후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자신이 사는 집을 보러 온 아줌마의 딸 ‘지우 언니’를 은목다리로 데려간다. 아이들은 재개발 동네와 깨끗한 동네를 가르는 다리 앞에서, “다리 건너면 21세기, 여긴 20세기”(「20세기 아이」)라고 말할 만큼 어른들의 시선을 체화하고 있지만, 무엇이 더 좋고 나쁜지에 대한 경계는 희미하다. 소설은 어른들이 한눈판 30분 남짓의 시간 동안, 아이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녹지 않은 희망 또는 여전히 남아 있는 희망의 모습이었을까. 우리의 삶에 언젠가 ‘미래’와 ‘축복’이 주어질 수 있을까. 김혜진이 정공법으로 던진 질문이 이제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다.










촌철활인

조영탁 저 / 300,000원 / 행복한북클럽
 

매일 새벽 6:30
220만 독자의 아침을 열어준 ‘행복한 경영이야기’ 가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총 4,770회에 걸쳐 발행된
3,570편의 특별한 문장을
12권의 《촌철활인》에 담아 선보입니다.
리더십, 인문학, 자기계발을 아우르는 경영과 삶에 대한 인사이트
220만 명의 아침을 열어준 ‘행복한 경영이야기’ 20주년 기념 《촌철활인》 특별개정판


‘행복 경영‘으로 알려진 (주)휴넷의 조영탁 대표가 지난 20년간 3,500여 편의 책을 읽고, 자신만의 통찰을 담아 발행한 메일링 서비스 ‘행복한 경영이야기’가 《촌철활인》 특별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개정판은 ‘긍정’, ‘비전’, ‘열정’, ‘인간관계’, ‘실행, ‘리더십’, ‘경영’, ‘역경’, ‘학습’, ‘혁신’ 등 10권으로 선보였던 초판에 내용을 더하고,‘조직’과 ‘삶의 태도’라는 2개의 주제를 더해 12권의 전집으로 완성되었다. 20년에 걸쳐 고전과 트렌드, 리더십, 인문학, 자기계발 등 분야를 가로지르며 섭렵한 3,500여 권의 책 속에서 경영과 삶에 대한 통찰을 찾아낸 조영탁 대표. 그가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발행해온 ‘행복한 경영이야기’는 이제 대한민국 리더의 아침을 여는 대표 메일링 서비스로 자리잡았다. 자리이타自利利他 등 행복 경영의 바탕을 담은 《촌철활인》 특별개정판을 개인과 조직, 기업 CEO 등 리더를 꿈꾸는 독자들에게 특별한 ‘경영의 교과서’로 소개한다.


220만 명의 아침을 열어준 ‘행복한 경영이야기’ 그 20년의 여정
매일 아침 220만 명의 아침을 열어준 ‘행복한 경영이야기’는 지난 2003년부터 (주)휴넷의 조영탁 대표가 발행하는 경영레터다. 경영을 기본으로 리더십, 인문학, 자기계발 등 동서고금의 명저에서 경영과 삶에 대한 인사이트를 담은 글을 엄선하고, 여기에 조영탁 대표의 통찰을 메모로 담아 지금까지 20년간, 총 4,770회에 걸쳐 발행되었다. 《촌철활인》 특별개정판은 그동안 발행된 글을 12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2018년에 발행되었던 초판 10권-1권 긍정, 2권 비전, 3권 열정, 4권 인간관계, 5권 실행, 6권 리더십, 7권 경영, 8권 역경, 9권 학습, 10권 혁신-에 내용을 더하고, 새롭게 11권 조직, 12권 삶의 태도 2개의 주제를 더해 12권으로 완성되었다.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현인들의 지혜에서 배우는 경영 인사이트
공자, 소크라테스부터 경영의 대가 피터 드러커와 짐 콜린스, 위대한 기업가 잭 웰치, 투자의 신 워런 버핏,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 아마존 제프 베이조스, 테슬라 일론 머스크 등 글로벌 기업가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까지. 《촌철활인》에는 고전과 트렌드, 리더십, 인문학, 자기계발 등 분야를 가로지르며 섭렵한 3,500여 권의 책 속에서 숙고하여 발췌한 통찰이 담겨있다. 동서고금의 명저에서 엄선한 지혜를 통해 개인의 삶과 조직 경영에 있어 그 목적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탁월함, 나를 바꾸고, 조직을 살리는 특별한 문장들
남을 먼저 이롭게 함으로써 내가 이롭게 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 정신’을 경영의 핵심으로 삼고 있는 조영탁 대표는 ‘행복한 경영이야기’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고 역설한다. 매일 읽은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독자들의 응원 덕분에 자신과 조직이 성장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20년간 자신을 변화시키고,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고, 조직의 성장을 이끌어준 엄선된 3,570 편의 문장들. 《촌철활인》 특별개정판에는 그 깨달음과 성장의 과정이 담겨 있다.
경영과 리더의 삶을 아우르는 12개의 주제
1 긍정, 2 비전, 3 열정, 4 인간관계, 5 실행, 6 리더십,
7 경영, 8 역경, 9 학습, 10 혁신, 11 조직, 12 삶의 태도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저 / 17,500원 / 퍼플레인(갈매나무)
 
2022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
2023 전미도서상 최종후보 한국 최초 선정

욕망과 공포의 심연을 마주하는
하이퍼 리얼리즘 ‘보라 월드’의 서막
“망각의 땅에서 의식의 최전방까지,
죽은 자와 산 자의 목소리를 남다른 감각으로 그려냈다.” _안톤 허 번역가

“모두에게 가능한 한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악몽으로 남을 책이라고 확신한다.” _조예은 작가

“외로운 사람들의
섬뜩하고 비상식적인 욕망…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이 다가왔다.”

2022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에 이어 한국인 최초로 2023 전미도서상 최종후보에 오른 《저주토끼》의 작가 정보라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퍼플레인에서 펴낸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첫 책인 《아무도 모를 것이다》가 신화와 설화, 역사와 환상을 교차하는 작품들을 담았다면,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는 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욕망과 두려움의 세계를 다룬 초기작 열 편을 공들여 선별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은 이 작품 속에는 죽음과 원죄에 관한 묵직한 울림을 전하는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인간의 기이한 욕망을 내밀하게 그려낸 〈리발관(離拔館)의 괴이〉, 통한의 눈물을 담은 〈전화〉까지… 인간의 욕망과 회한이 세밀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다채로운 빛깔과 울림을 담은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자연스레 “호러, 판타지, 비현실 등 다양한 요소를 혼합하면서도 일상에서의 공포와 압박에 본능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는 부커상 심사위원단의 호평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면면을 ‘날것의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낸 정보라 작가는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흔든다. 사후에도 소멸되지 못한 채 우주를 유영하는 영혼의 비극(표제작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과 타의에 휘둘려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이들의 희극(단편 〈죽은 팔〉)을 숨 죽여 읽다 보면,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거대한 물음표가 명치에 들어와 박힌다. ‘그대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라고.


세계적 주목을 받은 정보라 작품 세계의 계보를 좇아서

“정보라는 환상적이고 무서운 소재를 사용해 소설을 쓰지만
결국 상실, 트라우마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을 탐구한다.
작품을 읽고 난 뒤 강렬하고 충격적인 기분을 느꼈다.”
_프랭크 윈(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심사위원장)

2022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후보로 선정된 이후 프랑스·독일·벨기에·중국 등 전 세계 20여 개국에 번역 출간된 《저주토끼》가 또 한 번 2023 전미도서상 최종심에 오르며 한국 문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은 미국을 대표하는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윌리엄 포크너, 수전 손택, 코맥 매카시 등의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수상했으며 전 세계 4대 문학상(노벨문학상, 부커상, 공쿠르상, 전미도서상) 가운데 하나이다. 《종의 기원》과 《82년생 김지영》이 전미도서상 1차 후보에 올랐고, 한국계 미국인이 쓴 《신뢰 연습》《파친코》가 전미도서상을 수상하거나 노미네이트된 적은 있으나, 전미도서상 최종심에 오른 한국인은 정보라 작가가 유일하다.

후보에 오른 《저주토끼》뿐 아니라 퍼플레인에서 최근 출간한 신작 《한밤의 시간표》도 미국, 폴란드, 튀르키예 등으로 저작권 수출이 잇따르고 있다. 이 책의 미국 저작권 수출을 담당한 에이전트는 “《저주토끼》보다 완벽하게 진화했다. 더 진중하고, 일관성 있고, 침투하는 톤과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정보라는 기묘하면서도 명확하게 이 사회의 관심사와 문제를 반영해낸, 진정한 통일성과 추진력을 갖춘 연작소설을 써냈다. 귀신 이야기처럼 느껴지면서도, 흔치 않게 회사 배경인 것도 마음에 든다. … 영미권 독자들을 단숨에 사로잡으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기대감을 전하기도 했다.

부커상 국제 부문 심사위원장 프랭크 윈*도 “정보라의 작품은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마술적 사실주의’가 두드러진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평행우주’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 작품을 읽고 난 뒤 강렬하고 충격적인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씁쓸하고도 묵직한 뒷맛은 바로 현대사회의 문제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이 작품의 기저에 흐르고 있기 때문일 터,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곱씹어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은 SF문학가들의 산실 역할을 해온 환상문학웹진 〈거울〉과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를 통해 발표한 그의 초기작부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에 퍼플레인은 환상문학으로서의 압도적인 마력과 사회적 메시지들이 응축된 초기 단편들을 선별해 시리즈(《아무도 모를 것이다》,《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로 엮어왔다. 정보라의 오랜 팬뿐 아니라, 그가 지금 여기 왜 세계적 주목을 받는지 궁금한 독자들이 그 작품세계의 계보를 좇아가며, 한층 더 깊숙이 ‘보라 월드’에 빠져들어 보기를 기대한다.

나는 기괴하고 비일상적이며 때로 부자연스러운 상황과 줄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똑같이 기괴하고 비일상적이며 종종 부자연스러운 언어를 사용한다. 나는 매끄럽고 예쁜 문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들이 매끄럽지도 예쁘지도 않기 때문이며, 내가 보는 세상이 전혀 매끄럽거나 예쁘지 않기 때문이다. _저자의 말, 〈낯설게 보는 세상〉에서


“악(惡)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잠식하는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흔드는 환상 괴담

정보라는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을 쓸 때에 나는 많이 슬프고 화가 나고 불안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일인시위를 이어가며 고뇌와 고통을 담금질하던 시절에 쓴 이 이야기들이 이후‘저주와 복수’라는 테마로 변주되며 독자들 마음을 뒤흔든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표제작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를 포함한 열 편의 작품 곳곳에서 작가가 벼려놓은 칼날 역시 인간의 마음에 깃든 악의 뿌리를 향해 비수처럼 날아와 꽂힌다.

폭력성은 어떻게 물들고 어떤 방식으로 타인을 지배하는지(단편 〈감염〉), 신의 형벌을 받은 듯 사후에도 소멸되지 못한 영혼들(표제작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은 어떤 비극을 맞이하는지, 타의에 휘둘려 자신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이들(단편 〈죽은 팔〉)은 어떤 희극을 감내해야 하는지, 탐욕과 집착으로 점철된 삶의 현실 속 지옥(단편 〈사흘〉)은 어떤 빛깔인지를, 작가는 날카롭고 직설적인 언어로 길어 올린다.

그중에서도 압도적 표제작으로 손꼽힌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깃들어 있다. 최소한의 인륜을 저버린 이들의 당위적인 죽음과, 먼지처럼 우주를 한없이 떠도는 목 잘린 영혼, 이승에서의 부질없는 탐욕을 깨닫게 하는 죽은 영혼들의 대화까지… 이야기 곳곳에는 이처럼 ‘산 자’와 ‘죽은 자’의 목소리가 태엽처럼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쉼 없이 흔들며 ‘그대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표정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묻는다.

이처럼 소설의 행간마다 날카로운 칼끝을 숨겨둔 정보라 작가는, 불온하고 부조리한 탐욕이 어떻게 점화되고 발화되는지를, 악(惡)이 우리의 일상을 어떤 방식으로 집어삼키는지를, 부질없는 탐욕을 품은 우리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를 현실적인 감각으로 생생하게 풀어놓았다.
이에 《저주토끼》를 번역한 안톤 허는 “처음에는 나와 동떨어진 다른 세상 얘기인 듯하지만, 한참을 읽다 보면 ‘소설 속 세상이 여태껏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구나’ 하는 기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전한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쉬이 읽어 넘기기 쉬운 행간 너머에서 ‘인간의 탐욕’으로부터 뻗어 나온 악의 뿌리를 목격한 순간, 독자들은 자신의 명치에 박혀 있던 현실의 고통을 그제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 골짜기와 그림자의 깊이는 아무도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다. 인간은 겉과 속에 여러 가지 어둠과 그림자를 수없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인 것이다. _〈그림자 아래〉, 335쪽


“탐욕은 어떤 빛깔의 낙인(烙印)을 남기는가
초현실적인 극사실주의로 그려낸 세상의 이면

과거에는 영화와 소설로나 접했던 ‘묻지마 범죄’와 ‘살인사건’을 언론과 SNS매체를 통해 쉽고도 자세히 접하는 요즘이다. 그런 외로운 사람들의 뒤틀린 욕망과 광기를, 정보라 작가는 소설 속에서 현실감 넘치는 인물로 재탄생시켰다. 그러나 질타를 받아 마땅한 그들에 대한 시선이 차갑고 매몰차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야기의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자리한 일말의 온기를 깊이 있는 시선으로 포착하며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인생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현실 속에서 누구나 겪을 법한, 그러나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 너머에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의 이면과 삶의 고통, 인생의 의미, 불온한 집착과 욕망 등을 섬세하게 담아낸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간극, 그 어딘가에 위치한 정보라의 작품세계는 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를 추구하는 ‘하이퍼 리얼리즘(Hyper-Realism)’ 기법을 떠올리게 한다. 일상적인 현실을 지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이 미술기법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게 묘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충격을 준다.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면 언제나 현실에서 소재를 얻는다”고 인터뷰한** 정보라 작가는 "소재를 크게 확대하거나 한국과 거리와 시간상 멀리 떨어진 이야기를 맥락에서 떼어내 이야기 안에 재배치하면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각조각은 모두 있었던 사실.”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런 소설구성 기법이 독자들에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단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세상의 이면을 맞닥뜨린 듯한’ 착각을 안기는 것이다.

이처럼 정보라 작가의 소설 속에서 되살아난 현실적이고도 은밀한 우리네 삶의 표상을 SF·호러·판타지 등 다양한 소설기법을 한 권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신간이 더욱 뜻깊고 반갑다. 공포스러우면서도 기묘하고, 초현실적이면서도 섬뜩한 반전을 품은 ‘보라 월드’를 유영하다 보면 “남은 쪽수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 글자를 핥듯이 읽었다”는 조예은 작가의 후기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남은 쪽수가 줄어드는 게 아쉬워 글자를 핥듯이 읽었다. 긴 여운을 감당하기 위해 중간중간 눈을 감고 쉬기도 했다. 모두에게 가능한 한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악몽으로 남을 책이라고 확신한다.
_조예은, 《칵테일, 러브, 좀비》 작가


기이하고 불온한 이야기의 마력
퍼플레인 PURPLE RAIN

‘퍼플레인’은 갈매나무 출판사의 장르문학 브랜드입니다.
기이하고 불가해한 이야기, 전복적이고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퍼플레인만의 장르소설을 펴내고자 합니다.

 Line-up
① 《양꼬치의 기쁨》, 남유하
② 《붉은 실 끝의 아이들》, 전삼혜
③ 《그 겨울, 손탁 호텔에서》, 듀나
④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⑤ 《한밤의 시간표》, 정보라
⑥ 《죽음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 정보라








보이지 않는 심리를 읽는 마음사전

김상준 저 / 18,800원 / 보아스
 
우리 삶을 씨실로, 심리학을 날실로
인간의 심리를 층층이 조망해
우리 마음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은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를 읽는 것은 나 자신을 잘 방어하고 타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이 책은 우리 마음에 관한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읽어주는 심리학 사전으로서 삶에서 부닥치는 많은 문제에 좋은 힌트를 제공하는 안내서가 되어줄 것입니다.

이 책에 대하여
- 생활 속 복잡다단하고 오묘한 우리 마음을 일목요연하게 읽어주는 심리학 사전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보다 감정!
“오만 가지 생각”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실제로 하루에 5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 5만 가지에는 유용한 것도 있지만, 비논리적이고 쓸데없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이러한 생각들과 마음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모임, 집단, 사회에서도 인간의 마음은 그대로 작용합니다.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조직과 사회, 국가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의 삶과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기보다 감정적이고 비논리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과학과 논리는 예전의 종교의 자리를 대체하며 인간의 삶을 지배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과 논리로 교육을 받은 우리는 사회라는 인간사에 나아가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사는 모순과 불가사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이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며, 인간사는 감정적인 존재인 우리 각 개인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는 감정적인 어린아이와 이성적인 어른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더라도 이러한 마음속의 어린아이는 나이를 먹지 않고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속의 어린아이와 어른은 공존하며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합니다.
또 우리 누구나 마음속에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합니다. 선과 악은 형제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에도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추한 부분, 탐욕, 이기심, 질투, 욕망, 남을 해치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며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오히려 큰 부작용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은 사회적인, 또 역사적인 사실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서양의 경우 기독교가 가장 융성했던 중세시대에 선한 것을 추구하고 악한 부분을 배척한 결과 사회적으로 악의 힘이 더욱 커지고 사람들이 매우 잔인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십자군과 마녀사냥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또한 자기 마음속의 악한 부분을 완전히 배척하면 그 결과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로 나타납니다. 지킬 박사를 보면, 선과 악이 완전히 분리되어 한 인간 안에 서로 다른 인격을 가진 두 인물이 탄생하게 되었으며, 악의 힘이 가공할 정도로 커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은 다층적이고 오묘하며 모순적입니다. 우리 삶과 역사 그리고 인간사가 불가사의하고 변화무쌍하며 비논리적인 이유는 우리 인간은 논리와 이성보다는 감정과 마음의 영향을 훨씬 크게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생각들의 결과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그리고 신화, 역사, 정신의학, 뇌과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 영화 등 전 분야를 아우르며 인간의 심리를 층층이 조망해 우리 마음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알아두면 평생 도움이 되는 우리 마음에 관한 모든 것을 담다
* 강간의 근본 원인은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해결하기 위한 것일까?
* 노년기가 인간의 생애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
* 논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마음속의 어린아이는 왜 존재할까?
* 매 맞는 아내 증후군의 심리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 사랑에 단계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아동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성모 마리아 콤플렉스는 왜 존재하는가?
* 운전 중에 사람들이 쉽게 흥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일중독증은 왜 자기파괴적인가?
* 자살은 개인적인 문제인가?
* 청소년기는 왜 질풍노도의 시기인가?
* 여성의 적은 여성인 이유는 무엇인가?
* 역사에서 언제나 희생양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현재가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 인간사와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일들을 조망하며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심리기제를 면밀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뇌와 마음으로 인한 현상과 정신적인 질환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어떻게 대응하고 치유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아동기, 청년기, 성인기, 노년기에 작동하는 마음의 기제와 그 시기에 나타나는 특징들을 정신과적 관점에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시기의 타인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이 되며, 보다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위한 셀프 대처법을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며 주체입니다. 그리고 인간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상호작용하는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것은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며,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심리를 읽는 것은 나 자신을 잘 방어하고 타인들과 원만한 관계를 맺어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이 책은 우리 마음에 관한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읽어주는 심리학 사전으로서 삶에서 부닥치는 많은 문제에 좋은 힌트를 제공하는 안내서가 되어줄 것입니다.





'최강 소니 TV' 꺾은 집념의 샐러리맨

이승현 저 / 16,000원 / 꽁치북스
 

“회장님, 와이프는 왜 빼라고 하셨습니까?”

‘삼성TV’가 세계 1위를 거머쥐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전설의 ‘삼성맨’ 이승현(현 인팩코리아 대표) 씨가 쓴 『‘최강 소니TV’ 꺾은 집념의 샐러리맨 - 이승현의 세상도발』(꽁치북스)이 출간됐다.

1992년 말 그는 삼성그룹 일본 주재원으로 출국해 약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10년 사이 전자상거래를 통해 삼성 LCD(액정 화면) 모니터 판매를 실현했고, 이 성공은 본사로 돌아온 이후 LCD TV 사업화를 책임지는 업무를 맡는 계기가 됐다.

당시 TV 시장은 소니와 도시바 주도의 프로젝션 TV, 파나소닉 주도의 PDP TV, 샤프 주도의 LCD TV가 디지털 TV 표준을 놓고 사생결단을 벌이는 형국이었는데, LCD TV를 끝까지 밀어붙인 삼성전자가 마침내 일본 ‘빅3’를 제압하고 세계 1등 TV 메이커가 되었다. 그 실무 책임자가 지은이 이승현 씨였다.
일본 주재원 시절인 1990년대 삼성의 전자 제품은 일본에서 저가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일본의 최대 전자상가인 ‘아키하바라(秋葉原)’는 물론이고 전국적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은 도쿄에 신규사업팀을 만들었다. 신규사업팀장을 맡은 그에게 삼성전자 브랜드 인지도를 상향시키고 저가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과로와 스트레스 속에서 그는 도쿄 시내 소니 본사를 바라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해결의 문은 열릴 것이다!”라며 결기를 다지기도 하였다.
결국 그는 소니, 샤프 등 세계를 호령하던 ‘전자제품 종주국’ 일본 시장에서 거의 무명인 삼성TV 모니터를 그때껏 시도하지 않았던 전자상거래를 통해 히트시키는 데 성공했다.

당시만 해도 소비자들은 전자상거래에 익숙하지 않았고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소비자들의 입장에서 직접 보지도 않은 물건을 선불로 구매하는 전자상거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더욱이 TV 모니터는 14인치가 원화로 100만 원이 넘고 17인치는 200만 원이 넘는 고가였다.

그의 팀은 일단 홈페이지에 접근이 가능한 소비자를 주요 타깃으로 정하고 홈페이지와 24시간 콜센터를 개설했다. 결제 완료 시 주문 다음 날 일본 전국 어디에서나 제품을 배달받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불량이나 고장이 발생하면 무조건 완제품으로 교체해준다고 약속했다. 24시간 콜센터는 당시 일본에서도 거의 선보이지 않았던 매우 앞선 서비스였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로켓배송, 100% 교환, 환불 제도를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에 그의 팀은 제품을 직접 보고 싶어 할 고객을 위해 오프라인 매장도 열었다.

그의 팀은 일본 아키하바라(전자제품 전문매장들)의 게임소프트웨어 판매상들에게 삼성 다기능 모니터를 무료로 대여해준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협상을 벌였다. 당시 아키하바라에서는 브라운관 모니터로 게임소프트웨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판매상들에게 선명한 화질의 게임소프트웨어를 시연할 수 있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아키하바라 판매상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삼성전자는 공짜로 상품 진열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점차 일본 주요 도시에도 이러한 방식을 통해 삼성 다기능 모니터를 선보일 수 있는 전시공간을 확대해 나갔다.

전자상거래 사이트 개막 행사가 2000년 3월 29일 일본 도쿄 한복판 최고급 오쿠라 호텔에서 열렸을 때 아사히TV, TV도쿄 등 7개 방송사와 니혼게이자이 등 18개 신문사, 그리고 MBC, SBS, 동아일보 등 한국 언론 매체까지 약 60여 개 언론사가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는 당시 히트를 친 국산영화 ‘쉬리’ 장면을 담아 일본 배급 로드쇼를 진행했다. ‘쉬리’ 예고편을 방영한 모니터가 삼성 다기능 모니터였고, 영화의 영상과 화질은 직관적으로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일본 내 최고 인기 시사프로인 TV도쿄의 ‘World business Satellite’는 ‘한국의 파워, 그리고 위협’이라는 제목의 톱뉴스를 2분 20초쯤 내보냈다. 앵커는 일본의 전국 시청자들에게 “외국기업 삼성으로서는 효율적인 전략”이라고 호평했다.

일본 최대 민간방송인 일본TV와 후지TV 등은 삼성의 전자상거래 사이트를 알리는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특히 TV도쿄는 2000년 11월에 일본 최대 가전회사인 파나소닉과 소니, 그리고 삼성전자 3개 회사를 대상으로 한 특집 프로그램 ‘전자제품 넷(Net) 판매’라는 10여 분짜리 특집방송을 했다. 삼성전자의 LCD 모니터가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 매스컴들은 삼성전자 LCD를 홍보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전자업계의 분발을 촉구하려는 의도로 그런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것이다.

그 직후 신일본제철에서 17인치 LCD 모니터 30대를 주문하자, 당시 진대제 정보가전 총괄사장이 국제전화를 걸어서 “진짜냐?”고 물을 정도였다. 그만큼 엄청난 사건(?)이었다. 교토의 고급 료칸에서 낡은 TV 50대를 삼성 제품으로 교체했다.

그 뒤 국내로 복귀한 그는 삼성 LCD TV 사업의 PM 그룹장을 맡았을 때 최고위층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꼭 LCD TV로 세계 1등을 해보겠습니다.”

그의 다짐대로 삼성 초대형(40인치) LCD TV는 2006년 세계 1위에 올랐다. 그는 “일본을 이기고 세계 1위에 오른 기적은 국내에서도 이어졌다”며 “40인치 LCD TV는 한 대 가격이 2,000만 원을 호가했는데도 국내 판매율이 치솟았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2,000만 원짜리 TV를 사는 것이 놀랍기도 했으나 LCD 대형 TV 시장에서 승기를 잡았다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자업계의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LCD TV’로 끝내 종주국 일본을 추월하고 세계 1위가 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최고경영진의 과감한 도전과 투자, 고객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은 일관된 예술적인 전시와 광고, 그리고 기술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해 낸 책임자의 역량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기업이나 어떤 조직도 마찬가지겠지만 자신의 역할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건희 삼성 회장이 1993년에 ‘신경영’을 선언했을 때,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이 회장이 주재한 ‘삼성 신경영 오사카 회의’를 회장 비서실 전략기획팀과 함께 진행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의 중역들이 양적 성장과 한국 1위 기업에만 만족하고 있다면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그 유명한 선언 ‘마누라하고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가 발표되던 순간이었다.

그가 이건희 회장에게 직접 질문한 일화도 있다.
“회장님, 왜 마누라는 빼라고 하셨습니까?”
“마누라를 바꾸기는 너무 힘들어.”
한편 저자는 일본에서 주재하던 1995년 고베 대지진을 겪은 체험도 전하고 있다.

“잠을 자던 중 집이 흔들리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눈을 떴다. 일어나보니 마치 영화처럼 집이 기울어져 있었다. 엉망으로 쓰러진 피아노며 가구들을 지나쳐 아이들을 깨우러 가는데 몸이 계속 흔들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러다 일본 땅에서 우리 가족이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몸이 떨리고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는 회사 지침에 따라 대참사 구호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고베 민단 건물 맨바닥에 담요를 깔고 숙식을 해결하며 구호 활동을 벌이는 동안, 위기에 처했음에도 침착한 일본인의 질서의식이 무서울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비명도 통곡 소리도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거의 없는 재해 현상이 무척이나 낯설었다고 한다. 그들의 몸에 체화된 남에게 폐 끼치지 않는 삶의 태도 때문이었다.

이때의 체험이 그로 하여금 무료급식 봉사로 이끌었다고 한다. 2023년 8월에는 장모님 장례를 치르고 남은 조의금 2,000만 원을 ‘탑골공원 원각사 무료급식소’에 공사비로 기부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마라.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인생이 ‘공짜 선물’로 주어졌기에 이미 ‘남는 장사’를 하고 있다. 뭔가를 해서 밑질 것은 없다. 끝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라”고 말했다. 이 책을 본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1999년 호랑이굴 일본에서 ‘전자상거래’를 통해 전자 종주국 일본을 놀라게 했고, 삼성TV가 세계 1등이 되도록 한 이승현 회장의 흥미진진한 스토리!”라고 격찬했다.

배우 유동근 씨도 “배우로 치면 이승현은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메소드급 연기를 해온 셈이다. 요즘 청년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들이 적지 않다. 꼭 일독을 권한다!”라고 했다. 한미동맹재단 유명환 이사장은 “이 책은 평범했던 회사원이 치열한 삶을 통해 비범하게 된 좌절과 성공의 기록”이라고 평했다.








하얀 사슴 연못

황유원 저 / 11,000원 / 창비
 
“백록담이라는 말에는 하얀
사슴이 살고 있다”

영혼을 어루만지는 고요한 사색의 쉼표
풍요의 선율로 흐르는 순정한 시의 음표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아 한층 깊어진 서정으로 현대문학상과 김현문학패를 연거푸 수상하는 등 개성적인 시세계를 탄탄하게 굳힌 황유원 시인이 네번째 시집 『하얀 사슴 연못』을 펴냈다. “가식 없이 절실한 시적 정황들이 주는 무게감”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첫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민음사 2015) 이래 꾸준하게 단단한 사유로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감성적 언어가 고요한 음악이 되고, 감각적 이미지가 순백의 풍경이 되는 서정의 신세계를 제시한다. 또한 자연(사물)을 순수한 관념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한국적 모더니즘의 고전 반열에 오른 정지용의 『백록담』(1941)을 시집 곳곳에서 오마주해 눈길을 끈다. 8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이 깨끗한 연못의 풍광은 “내밀함 속으로, 그리고 사물을 끼고 도는 원심력의 세계 속으로, 마침내 다시 고요 속으로의 왕복운동을 거듭해온 어떤 마음이 오래 다녀온 거리의 산물”(조강석, 해설)로 읽히는바, 경이로운 순수와 무위의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끌어당긴다. 서정시의 맑고 투명한 진경이 매혹적인 이 시집에는 현대문학상 수상작이자 표제작 「하얀 사슴 연못」을 포함하여 55편의 시를 실었다.


내면의 극장에서 공명하는 존재와 시의 하모니
개념으로 채우고 공백으로 비우는 백지의 미학

황유원의 시는 쉽게 읽힌다. 하지만 평이한 문장 속에 담긴 감각과 사유는 광활하고 또 심원하다. 현대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라는 의미심장한 명제를 던졌던 시인은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소리들”이 현실이 되어 사위에 울려 퍼지는 “소리 극장”(최우정, 추천사)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예컨대 시인은 사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섬세한 시선과 예민한 감각으로 우리가 일상의 풍경에서 미처 지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듣고 느낀다. “가혹해서 아름답고/아름다워서 가혹한 lo-fi 사운드”의 “별들의 속삭임”과 “하늘의 입김이 얼어붙는 소리”(「별들의 속삭임」)를 듣기도 하고, “실수로 건드린 유리잔”이 울리는 순간 “영혼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느낌”(「유리잔 영혼」)을 감각하기도 한다.
시로 연주되는 다양한 감각들은 줄곧 시인의 학문적 탐구 대상이기도 했던 철학과 종교적 사유로 이어진다. “밤의 텅 빈 플랫폼”에서 뒤집힌 채 “홀로 발버둥 치는”(「사슴벌레」) 사슴벌레와 나뭇가지에 매달린 “텅 빈 말벌집”을 보면서 “안에 든 저 어두컴컴한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낮눈」) 질문하고 여린 존재들의 숨소리와도 같은 “누군가가/또다른 누군가에게/마음을 쏟는 소리”(「거울 겨울」)에 귀 기울이며 사물(존재)과 세계의 내밀성을 발견한다. 시집에 등장하는 여러 종교의 자취는 특히 다채롭고 흥미롭다. 실존하는 교회, 성당, 네팔 등을 배경으로 한 시들을 따라 읽다보면 문화적 경계에 갇히지 않고 모든 종교에 녹아드는 시인의 폭넓은 공감능력을 느낄 뿐 아니라, 웅숭깊은 관념적 체험에 맞닿게 된다. “지금도 생명을 소진해 타오르는 중인/어둠 속 나의 빛”(「길음성당」)을 응시하며 깨우치는 “무류적(無謬的)”(「에릭 사티」) 삶에 대한 지향이 그것이다. 마치 천상의 신을 우러르며 상승하는 바흐의 음계처럼, 황유원의 시는 멀고 높은 곳, 눈부신 깨우침을 향해 힘차게 다가간다.

거장들의 길을 되짚으며, 새로운 길을 열어젖히며

맑고 투명한 종소리 같은 “단단하고 청명한/울림”(「언중유골」), 감미로운 “소리의 향기”(「2D 마음」)로 충만한 이 시집에는 오마주 또한 가득하다. 시집 제목과 표지화부터가 정지용의 『백록담』을 오마주 한 것이며, 정지용의 시 중 「장수산 1」의 형식을 섬세하게 흉내 내거나(「흰 종이에 물로 1」) 「인동차」를 변용하기도(「아침」) 한다. 소리나 리듬 같은 음악적 요소의 활용 또한 탁월하다. 바흐, 에릭 사티, 아르보 패르트, 에어 서플라이 등의 음악가를 호명하며 언어의 반복과 변주로 이들의 음악을 편곡하여 들려준다. 앞서간 위대한 예술가들의 생애와 작품을 되살려낸 오마주 시편들은 풍요로운 문화적 체험을 향유하게 하는 한편, 수려하면서도 치밀하게 짜인 음악적 장치들을 통해 시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 상상력으로 시세계의 지평을 확장한다. 사려 깊게 큐레이션 된 전시회가 그렇듯, 시집에 인용된 예술 작품과 거장 들이 낯선 이들에게도 일상적인 표현으로 격조 높은 예술적 경험을 선사하는 섬세함 또한 이 시집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이다.
황유원의 시를 읽는 것은 “최고 음역대에서도 뭉개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맑은 사운드”(「air supply」)를 듣는 듯 즐겁다. “‘하얀(백색)’과 ‘사슴(+사슴벌레)’과 ‘연못(물)’이라는 세 요소의 협력”이 어우러지면서 언어와 이미지 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변주되는 ‘시 전시회’를 둘러보며 우리는 “요소들의 생성과 변환”(시인의 말)을 만끽한다. 특히 “백록담,이라고 발음할 때마다/살이 오른 사슴들이/빈 표지 같은 내 가슴속으로 다시 뛰어 들어”(「하얀 사슴 연못」)오는 장면. “청명한 공기”(「air supply」)를 들이마신 듯 머릿속이 청량해지는 이 장면을 우리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오래오래 간직할 것이다. 시인이 말했듯이 “아무거나 시가 되지는 않는다”(「올해 가장 시적인 사건」). 그렇기에 시인은 끊임없이 언어의 음률을 가다듬으며 시의 길을 찾아 나선다. 길 아닌 곳도 걸어가다보면 길이 되어 있을 터, 새로운 시의 길을 찾아 발길 닿는 대로 노래하며 걸어나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도한 그곳, “소리로 충만한 시”(추천사)에 깃든 “물 샐 틈 없는 고요”(「불광동성당」)와 “무심한 아름다움”(「별들의 속삭임」)이 눈부시게 황홀하다!







우리는 감정노동자입니다

사)사람과평화, 감정노동상담연구회 글 / 정보영 그림 / 13,800원 / 학민사
 
감정노동자들의 심리치유를 위해 진행된 상담 현장 스토리
감정노동이란 자신의 실제 감정과는 무관하게 다른 감정을 표현하도록 요구되는 노동을 말한다.
민원콜센터 상담원, 카페메니저, 보험설계사, 1인 자영업자, 경비노동자, 공공건물 경비원, 가사노동자, 배달라이너, 간호사, 상담사, 보육교사, 사회복지사, 골프장캐디, 유치원 원장 등 그들은 소비자에게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생활 전선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그러나 무례한 고객 때문에 감정노동을 강요당하며 힘들어 하는 감정노동자들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건강한 사회의 근간을 이룰 수 있기 위해서는 갑과 을의 평등한 관계가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사람과평화’ 감정노동 전문 상담사들이 감정노동자들의 심리치유를 위해 진행된 상담의 현장 스토리이다. 이들은 바로 나의 옆집, 나의 가족, 나의 친구들이다. 상담의 현장에서 나온 이들의 절절한 이야기들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하여 이들의 아픔을 파악해 주는 것만으로도 심리치유에 작은 보탬이 될 것이다.

‘사람과평화’에서는 감정노동 심리치유라는 다소 생소한 영역 부문의 전문성 향상을 위해 ‘감정노동상담연구회’를 발족하였다. 연구회 소속 감정노동상담사들은 ‘감정노동자 권리보호를 위한 전문 인력 양성 워크숍’을 수료하고, 인권, 성평등 등 각 영역에서의 심리 상담과 교육을 이수한 전문상담사들이다. ‘사람과평화’는 산업안전법 등 관련 법률과 사회적 시스템을 익히며, 고객의 ‘갑질’에 힘들어 하는 근로자들의 심리치유를 위한 상담 매뉴얼을 만들어 상담을 진행하였다.

이 책을 읽은 감정노동자들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고, 직업인으로서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 모두 누구나가 감정 노동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갑과 을이 서로 평등한 사회,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되는데 보탬이 되길 희망한다.

“우리, 치유와 회복의 방법을 함께 찾아보아요.”
“힘든 환경에서도 잘 살아보려고 애쓰는 마음을 세상이 알아주기 바랐는데, 그렇게 아프고 외로웠군요.” 감정노동전문상담사의 이 한마디에 감정노동자의 얼굴이 밝아진다. “우리, 치유와 회복의 방법을 같이 찾아보아요.”라는 상담사의 말에 감정노동자는 감동과 감사의 눈물을 비치기도 한다. 이 장면은 감정노동상담 현장에서 일어나는 역동이다.
2019년 ‘사람과평화’에서 진행한 감정노동자 권리보호를 위한 전문인력 워크숍에서 감정노동 전문상담사 자격을 갖춘 후, 2020년 감정노동상담을 시작하면서 상담사들은 난감했다. 일반 심리상담을 위한 상담매뉴얼은 많이 있지만 감정노동상담을 할 수 있는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사한 매뉴얼이 있다면 감정노동자 보호매뉴얼 정도였다. 이에 ‘사람과평화’에서는 전문적인 감정노동상담을 위한 ‘상담매뉴얼’을 제작하고 보급하기에 이르렀고, 감정노동 전문상담사가 그 메뉴얼을 상담과정에 적용하면서 상담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 매뉴얼을 바탕으로 여러 직종의 감정노동자를 상담하면서 ‘감정노동이란 직업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정해진 감정표현을 연기하는 일을 말한다.’ 라는 개념적 정의를 실감하였다. 고객을 응대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친절함을 드러내야 하는 서비스직뿐만 아니라 돌봄업무, 민원업무, 인권복지업무를 하는 노동자들과 일반 직장인들에게도 인간관계나 권력관계로 인한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음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는 감정노동자의 욕구에 맞는 전문적인 상담을 하기 위해 ‘사람과평화’ 소속 감정노동 전문상담사들은 ‘감정노동상담연구회’를 발족했다. 이곳에서 상담사례를 중심으로 스터디와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이 책은 감정노동상담을 위한 ‘상담매뉴얼’을 바탕으로 상담을 전개하고 감정노동 전문상담사들의 연구와 소통의 자리인 ‘감정노동상담연구회’에서 연구한 약 4천여 건의 상담사례를 정리한 소중한 자료이다.
상담심리학에서는 “상담사례란 상담에 의한 내담자의 호소문제와 상담목표를 기술하고 사용된 이론이나 전략 및 기법을 설명하며 상담과정과 결과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상담사례를 그 기준에 맞출 수가 없었다. 내담자인 감정노동자의 ‘개인정보보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례를 일반화시켰으며, 전문적인 용어를 배제하고 읽는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용어와 문구를 사용하였다.
2020년부터 시작된 상담사례를 통해, 심한 격무와 스트레스로 주저앉고 싶어 했던 감정노동자들이 상담을 받고 치유되어 고객과 조직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었고,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상담과정을 통한 감정노동 전문상담사 스스로의 변화와 성장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감정노동상담사들의 노고로 만들어진 이 책의 발간으로 글을 읽는 독자들이 바로 이웃에 같이 살아가고 있는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고, 감정노동상담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길라잡이가 되기 바란다.







건축의 무빙

이건섭 글 / 18,000원 / 수류산방
 
 
우리가 짓고 살아가는 건축과 도시를 단 한 권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바로 이 책, 『건축의 무빙』을 만나라!

건축가들은 무슨 책을 읽을까? 도시의 역사와 디자인의 양식을 바꾼 이들은 누구인가?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현대 건축의 흐름을 어디까지, 어떤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수류산방에서 펴낸 이건섭의 『건축의 무빙』은 거대하고 때로 난해한 서구 건축 이론과 사조에 쉽게 접근하도록 이끄는 안내서로 기획되었다.

근현대 건축의 움직임을 지금 여기의 좌표에서 안내하고 전망하는 “명쾌한 지도”

이 책은 다양한 점에서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건축의 무빙』은 19세기 후반 이후 근현대 도시와 건축을 형성해 온 움직임을 건축물이나 건축가가 아닌 ‘건축 책’을 통해서 읽어 낸 책이다. 근대 이후 서양 건축(Architecture)은 개별 건축물들의 집합을 넘어서서, 각 시대나 문화권의 미적 담론과 사회 경제 기술의 혁신을 선도해 왔다. 따라서 건축의 이해는 각각의 건물이 세워지게 하는 기술 공학이나 눈에 드러나는 외형적 디자인을 넘어선다. 설계를 하는 건축가의 다양한 선언, 건축 학자들의 연구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사회 활동가의 비판, 도시를 기록하거나 공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 작품들, 기후와 지구 환경에 대한 예측 등이 우리가 사는 도시와 건축의 변화를 견인해 왔다. “어느 분야의 역사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디자인에서도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책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책들을 읽고 이해하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디자인을 결정한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31쪽)
그래서 건축 학도들의 ‘필독서’ 목록에는 건축 이론과 역사서 못지 않게 미학과 사회학, 예술 등 다양한 인문학 명저들이 열거된다. 도시 문명과 공간을 이해하려는 누구나 읽어 볼 만한 고전들인데, 문제는 이 책들의 다수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번역되지 않았거나, 번역되었다고 해도 어렵거나 두꺼워 도전하기 힘들다. 다양한 사진이나 도면이 등장하고, 외부적 맥락의 이해도 수반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한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대형 설계 사무소에서 건축사로서 근무해 온 저자 이건섭은 이에 대한 뼈저린 경험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학창 시절, 숭배 대상이었던 선배가 던진“‘우리는 이론가도 아니고 건축가니까 외국 잡지나 책 같은 건 그림만 보고 이해하면 돼!’ 이 말은 지금도 가슴 속에 충격으로 남아 있다.”(25쪽 초판 서문) 저자는 그러한 분위기를 극복하려 직접 건축 분야 원서들을 구해서 읽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말 현장에서 IMF를 겪으며 창조적 디자인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사고 훈련”으로부터 새로이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저자가 출장길에 구하고 퇴근 후에 한 권 한 권 직접 읽어 간 필독서들의 기록이다. 명저들와 건축가들의 소개를 넘어서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루는 저작들에 과거와 현재의 서로 다른 이중 시점(dual viewpoint)을 적용해 나름의 판단과 의견을 제시”(26쪽) 했다.


『20세기 건축의 모험』에서 『건축의 무빙』으로 ‘리마스터링’하다

이렇게 써내려 간 이건섭의 글들은 2005년 수류산방에서 『20세기 건축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건축인들과 학생들에게 필독서로 자리잡으며 널리 사랑을 받았다. 새로 나온 『건축의 무빙』은 그 부제에서 밝히듯 책으로 본 〈20(~21)세기 건축의 모험〉 리마스터링 에디션’이다. 오래된 영상이나 음원의 질을 향상시키는 리마스터링 작업처럼, 제작 방식의 변화로 절판되었던 『20세기 건축의 모험』을 디지털 환경에 맞추어 복기했다. 복간에 맞추어 저자가 모든 글을 다시 읽고 지금 시점의 판단을 더욱 보완했으며, 21세기의 새로운 건축가들을 추가해 책의 생명력을 더했다. 개정판이 아닌 ‘리마스터링 에디션’으로 이름한 까닭은, 초판 『20세기 건축의 모험』의 체제와 디자인을 ‘개정’하지 않고, 오히려 ‘복원’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초판본을 만들면서 수류산방은 본문과 각주가 교차하는 형식, 책을 오브제로 삼아 재해석한 사진 등 다양한 실험을 선보였는데, 『건축의 무빙』은 이러한 편집 디자인 실험을 수류산방의 총서인 ‘아주까리 수첩’ 체제 안에서 재현하며 의미를 증폭시켰다. 근대 이후 건축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신하고 좌표를 이동하며 발전해 왔다. 그러한 지적 모험의 여정을 읽어 나가면서 독자들은 건축과 도시를 한층 넓은 시야로 조망할 (초)능력을 얻을 것이다. 새로운 제목 『건축의 무빙』에는 ‘건축 책’을 통해 건축을 원근법적으로 조망하려는 이 기획의 탁월성을, 그리고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한 ‘이 책’의 입체성을 담았다. 『건축의 무빙』은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서구 건축 디자인이 밟아 온 사고를 조망하고 해석할 뿐만 아니라, 21세기와 앞으로의 한국 건축이 나아갈 방향을 전망하게 하는 “명쾌한 지도”(최문규, 추천사)로서, 폭넓은 세대의 독자들과 만남을 기다린다.


건축 역사에 이름을 올린 세계적 건축가와 작품들, 그 표피가 아니라 정신을 읽다

『건축의 무빙』의 본문은 건축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고 영감을 주는 23편의 글로 이루어진다. 르 코르뷔지에나 렘 콜하스처럼 이름난 건축가들도 있지만, 니콜라우스 페브스너, 지크프리트 기디온 등 이론가, 저술가들이 더 많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소설 등 장르도 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서두에 저술들의 선정 이유와 간략한 20세기 건축 연표를 싣고, “하나씩 읽어 가면 20세기 디자인 역사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31쪽) 하도록 구성했다. 각 글은 한 편의 책 또는 저작물을 자세히 읽고 찬찬히 소개해 나간다. 원전에 충실하여 각 책의 체제와 내용을 되도록 정확하게 안내하며, 주요한 대목들은 그 원문과 번역도 함께 수록했다. 이건섭은 어떤 상황에서 이 책을 선정하고 읽었는지, 선정된 저작의 저자들은 어떤 사람이고 왜 이 책을 썼는지, 건축사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인지를 다양한 에피소드로 이야기한다. 독자가 앞으로 직접 읽을 때 어떤 점을 유의하면 좋을지, 각각의 명저들이 한국에 어떻게 소개되거나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를 짚으면서 우리 건축과 디자인의 과거와 현재를 경쾌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든다. 건축계 안에서 각 저술의 위상을 되도록 정확하게 분석하면서도, 이건섭은 되도록 쉽고 흥미진진하게 서술하고자 일관되게 노력했다. 새로운 학설이나 선언을 제시하는 연구서는 아니지만, 오히려 학자들에게도 난해하기 일쑤인 원전들, 그리고 서로 견해나 시대가 전혀 다른 책들을 실제로 한 권 한 권 성실히 독파한 기록이다. 나아가 그 기록을 우리말의 어법으로, 일상적인 낱말들로, 마치 곁에서 이야기해 주듯 쓴 책이라는 점에서 『건축의 무빙』은 국내 건축 서가에서 비교할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보적이다. 특히 기존 서구 건축의 주류를 형성한 이론뿐만 아니라 도시 재생, 생태학, 환경, 지구의 미래를 염려한 선구적 인물들을 애정과 존경을 담아 알린다.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부흥과 쇠퇴』, 버크민스터 풀러의 『우주선 지구호 사용 설명서』 등은 초판본 『20세기 건축의 모험』 출간 이후 국내에서 정식 번역되었다.
이건섭이 머리말을 “『20세기 건축의 모험』은 2004년에 수류산방과 내가 같이 만든 책이다.”라고 시작하듯, 출판사 수류산방의 개입은 적극적이었다. 본문에 파고드는 150여 개의 긴 편집자 주석, 원저를 실제 보는 듯한 도판과 책을 주인공으로 한 사진들은 저자의 본문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개념, 작품들과 상호 작용하며 이 책을 완성한다.
이번 리마스터링 에디션 서문에서 저자는 지난 20년간 건축의 주요한 변화를 짚는다. “기후 위기, 여성 참여의 확대, 기술 발전의 영향이라는 화두는 오늘날 건축 디자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고 본다.” 본문에서도 21세기의 흐름을 100쪽 이상 새로 집필했다. 덴마크의 스타 건축가 비아르케 잉엘스의 『예스 이즈 모어』를 통해 엄숙하기보다는 유쾌한 지속 가능성을, 도시 사회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커틀러의 『도시의 생존』을 통해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 도시의 미래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선정된 건축가 디에베도 프랑시스 케레는 유일하게 책을 쓰지 않았음에도 그 인물과 작업으로서 소개된다. 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 출신으로 갖은 고생을 하며 마흔이 넘어 겨우 학교를 졸업한 한 젊은 건축가가 최연소로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고 눈물을 터뜨리는 과정까지를 찬찬히 짚어 가는 이 마지막 글에서 이건섭은 시대와 조건을 초월해(moving) 진정한 건축이 무엇으로서 성립하는지, 건축의 미래가 어디로 펼쳐질 것인지를 뭉클하게(moving) 펼쳐낸다.


수류산방 편집 실험 20년을 기리다

『20세기 건축의 모험』은 초판 출간 당시에도 “구조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를 실험한 책”이었다. “건축 책을 다룬 내용에 맞게 이미지도 각 책의 특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향으로 조직했다. 사진가 박우진에게 하나의 오브제로서 책의 느낌을 살려 달라는 주문을 했고, 3개월의 시간을 들인 그 사진은 자체로 작품이 됐다. […] 건축과 모험이라는 주제를 에디토리얼 디자인에서 어느 정도 구현해 낸 작업이라 생각한다. 2005년 출간을 기념해 그 ‘책-사진’을 가지고 전시를 했으며, 2008 년에 그 일부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전시회를 가졌다. 건축으로 말하면, 파사드(각 건축 책을 오브제로 드러낸 것)의 실험과, 구조와 설비를 그대로 드러낸 표현(팁과 주석과 본문 사진의 노골적 배치)으로 20세기의 역사적 건축책들이 감행한 모험을 드러내려 한 작업이다. 건축책들을 새롭게 해석해 촬영한 사진가와 방대한 분량의 팁을 만들어 낸 편집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팁이나 주석이 단순히 본문 텍스트의 보조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본문이 되어 전체 레이아웃의 구조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 기획은 2002년 『하나은행』 사외보 리노베이션 작업을 씨앗으로 하여, 2005년 『20세기 건축의 모험』에서 열매를 맺으며, 2011년 『예술사 구술 총서』에서 꽃을 피운다. 본문과 주석이 삼투하는 구조는 『이응노의 집, 이야기』(2011년)과 이상의 시를 다룬 『시는 아무 것도 모른다』(2012년)에서 다른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수류산방, 『세상에 이런 책』, 2014]. 2005년 첫 열매로 맺어졌던 이 실험은, 이후 수류산방의 여러 작업들에서 변주되고 심화되면서 책을 만드는 하나의 태도로, 수류산방의 스타일로 성장해 왔다.
쿽익스프레스-필름 출력 방식으로 만들어졌던 『20세기 건축의 모험』을 어도비 인디자인-CTP 출력 방식인 현재의 디지털 작업 환경에 맞추어 다시 만드는 이번 작업을 수류산방은 ‘개정판’이 아닌 ‘리마스터링 에디션’으로 명명했다. 주지하듯 ‘리마스터링’은 영화 필름이나 LP 음반 따위를 디지털 방식으로 변환해 ‘재현’하면서 그 질을 향상시키거나 오류를 개선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디자인과 조판을 모두 바꾸는 일반적인 도서의 개정판을 음악이나 영화의 ‘리메이크’에 비유한다면, 초판(『20세기 건축의 모험』)의 실험과 시도들을 그대로 ‘재현’하는 한에서 보완을 가한 이번 접근(『건축의 무빙』)은 책으로 번안된 ‘리마스터링’이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건축의 무빙』은 『20세기 건축의 모험』과 흡사 거의 똑같아 보이도록, 그러기 위해서 한껏 애써서 조금씩 다르게, 완전히 새로 만든 책이다. 『건축의 무빙』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가 되어 20년 전 우리가 만들었던 책을 앞에 놓고 베껴 본 셈이라고 해도 좋다.” (587쪽 맺음말)
초판 『20세기 건축의 모험』의 본문 부분은 마치 설계도를 놓고 사라진 과거의 건물을 똑같이 다시 짓듯 재현했지만, 저자가 『건축의 무빙』을 위해서 새로 집필해 덧붙은 부분은 전혀 다른 포맷으로 디자인했다. 따라서 책 안에 2가지 본문 형식이 공존하는데, 이는 역사적 건축물 보수 보존의 원칙을 책의 형식 안에서 구체화시킨 시도다. 표지 안에 또다른 표지 디자인의 책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붕 떠 있는 표지는 제목 『건축의 무빙』을 시각적으로 해석한다. 책의 첫 장을 넘겨서 다 읽어 나갈 때까지, 본문과 주석, 도판과 중제가 긴밀하게 얽혀 어느 한 펼침면도 똑같지 않도록 한 면 한 면 디자인해 나간 이 책은 거의 수공예적이다. 그 변화를 관통하는 강력하고도 유연한 질서는 수류산방의 창안이다. 재사용 종이와 비목재 비표백 펄프로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시각적 통일감과 다양성, 재질감과 무게감을 세심하게 고려했다. 『건축의 무빙』은 건축뿐만 아니라 책의 우주를 모험하기를 즐기는 모든 독자들이 소장할 만한, 그리고 수류산방 20년의 모험이 낳은 견고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들끓는 꿈의 바다

리처드 플래너건 저 / 김승욱 역 / 17,000원 / 창비
 
 
“마침내 그가 말했다.
주변에서 온통 사랑이 사라지는 것 같아 겁이 난다고.”

부커상·영연방작가상 수상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이 선사하는 강렬한 서사, 경이로운 감각 체험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리처드 플래너건의 신작 장편소설 『들끓는 꿈의 바다』(The Living Sea of Waking Dreams, 김승욱 옮김)가 출간되었다.
2002년 영연방작가상을 받으면서 영미소설계의 총아로 떠오른 리처드 플래너건은 2014년 부커상,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문학상을 연달아 수상함으로써 호주 최고의 작가로 손꼽힌다. 또한 『굴드의 물고기 책』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문학동네 2018)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이미 호평받은 바 있다.
『들끓는 꿈의 바다』는 2019년 전세계가 실제로 목도한 호주의 최악의 산불 사태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호주를 초토화시킨 한편 기후위기의 전율적인 징후로 맞닥뜨려진 그 엄청난 재난을 전경으로 두고, 그 속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한 가족의 갈등과 고뇌를 진지하게 파고드는 이 작품은, 철저히 파편화된 개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계층 분화, SNS로 대변되는 일회적이고 소비적인 문화 흐름 등 현실문제에 직핍하는가 하면 인물들이 겪는 기이한 사건들을 통해 환상성을 동반한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치열하게 성찰적이면서 동시에 놀랍도록 감각적인 서사와 문체가 자유자재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우리에게 강렬한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미증유의 기후위기, 그 속에서 인간다움은 어떻게 가능한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초대형 산불이 호주 전역을 덮친 때, 4남매의 장녀이자 성공한 건축가 애나는 어머니 프랜시가 위중하다는 연락에 태즈메이니아 섬의 고향 호바트로 돌아온다. 고향에 머물며 어머니를 보살피던 둘째 토미는 무명 화가이자 말더듬이로, 늘 주눅 들어 있고 형제들에게 무시 당하지만 어머니에게 누구보다 헌신적인 인물이다. 그런가 하면 막내 터조는 벤처사업가로 부와 권력을 거머쥔 인물이며, 어머니를 놓아드리자고 소심하게 주장하는 토미와 갈피를 못 잡는 애나를 설득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머니의 연명치료를 밀어붙인다.
프랜시는 자신의 의사를 묵살당한 채 하루하루 생명을 유지하는 치료를 받으면서 병실 창밖에 펼쳐지는 백일몽, 외눈박이 CIA 요원과 마녀가 아른거리는 환상에 빠져든다. 한편 애나에게도 괴이한 일이 연달아 벌어진다. 신체 일부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가 사라지고 차례로 무릎, 가슴 한쪽이 차례로 사라지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러한 현상을 알아채지 못한다. 자신의 방에서 게임에만 몰두하는 아들 거스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 애나는 경악하지만 이 모든 불안과 불편함을 애써 외면하며 SNS에만 집착한다.
대멸종을 예감케 하는 자연 현상,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평온한 일상 사이의 불균형 위에 위태로이 서 있는 애나에게는 SNS 밖 세상에서 실감할 수 있는 희망이 간절하다. 애나는 멸종 직전에 처한 호주의 토종새 노랑배도라지앵무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된다. 그러면서 노랑배도라지앵무가 태즈메이니아에 몇마리나 돌아왔는지 살피는 일에 자원하게 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어머니 프랜시의 생과 애나 자신의 삶은 이제 점입가경의 국면으로 치닫는다.

소설은 생과 사를 오가면서 지속적으로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어머니 프랜시의 모습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그러한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애나 또한 고뇌한다. “어머님이 무엇을 바라시는지 아시나요?”라고 묻는 의료진 앞에서 어찌해야 할지 “그들은 전혀 몰랐다”(48면). 그러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어머니를 연명시키자는 토미의 주장에 편승해 애나는 근본적인 고민으로부터 눈을 돌린다. “이런 감정들이 도망치고자 하는 욕망과 혼란스럽게 뒤섞였을 때, 애나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이 사실은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나쁜 사람으로 보일 것 같다는 두려움,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다는 두려움.”(175면) 이것이야말로 애나를 포함한 많은 현대인들이 직면한 지점이기도 할 터인데, 연명에 대한 섬뜩하기까지 한 토미의 집착과 그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남매들의 의식 기저에는 과거 비극적인 일을 겪고 세상을 등진 또다른 형제 로니의 죽음이 자리해 있다. 첨단 의료기술과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심지어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못한 채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을 과연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어머니가 먹는 약을 생각해보면, 여섯알을 먹는 편이 열일곱알보다 낫고, 열일곱알이 스물한알보다 나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스물한알이라 해도 여전히 죽음보다는 낫다는 점이었다”(227면)라는 절박한 마음은 어떠한가. 이처럼 막중한 질문에 대해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수많은 걸작들을 우리말로 옮긴 김승욱의 섬세한 번역으로 더욱 빛이 발하기도 한 이 작품은 기후위기, 파편화된 인간관계, 말초적인 자기전시 등 지금 시대에 대한 중대한 문제의식들을 한 가족의 서사를 통해 풀어냄으로써 끝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중한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앞에 당도한 이 작품을 읽는 모두에게 보편적인 울림을 가져다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극을 모르는 이 시대의 비극. 읽는 자에게 구원 있으리라.”(정용준 추천사) 한편의 소설은 때로 잊기 힘든 잔상을 남긴다.







아이의 감정

우도 베어, 가브리엘레 프릭 베어 저 / 김현희 역 / 17,000원 / 북인어박스

아이가 당신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35가지 감정의 세계

독일 최고의 아동청소년 심리치료 권위자 우도 베어 박사와 가브리엘레 브릭-베어 박사 부부가 40여 년에 걸쳐 다양한 아동청소년들을 상담 치료한 경험을 토대로, 아이들이 부모에게 결코 ‘말’하지 않는, 그래서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35가지 감정의 세계를 꼼꼼하게 정리한 책이다.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지, 어른들의 감정과 어떻게 다른지, 그 배경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섬세한 필치로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풍경’을 그려냈다.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앞으로 펼쳐질 삶의 주요한 지침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물론, 아이들이 감정을 제대로 배우는 데 필요한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유아부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사례를 통해 흥미롭게 풀어냈다.

특히 저자들은 분노, 슬픔, 화, 불안감, 두려움, 지루함 같은 인간 본연의 감정들이 대다수 부모들에 의해 지나치게 ‘나쁜 감정’으로 취급되고 있다고 일관되게 지적하며, 이 같은 접근이 도리어 아이들이 부모에게 감정을 숨기게 하거나, 자기표현에 서툰 존재로 성장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감정적 어려움을 겪는 성인들의 90% 이상이 아동 청소년기 부모의 감정적 본보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밝히기도 한다. 따라서 아이의 ‘문제 행동’으로 악화되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은 물론, 자존감, 자기 효능감 등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감정적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부모의 섬세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이에 관한 부모의 바른 태도와 상황에 따른 유용한 대처 방법을 소개한다.

이 책에 정리된 사랑, 행복, 기쁨, 무력감, 화, 죄책감, 부끄러움, 외로움, 슬픔 등 35가지 감정 세계는 아이들의 삶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들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야 하는 감정들이다. 독자들은 이를 통해 지금껏 아이들이 차마 말하지 못했던 감정 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교감할 수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그 감정에 갇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나타나는 이상 행동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함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표정 뒤에 감춰진 진짜 아이의 감정을 마주해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돕는다. 아울러, 아이들이 부정적 감정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좋고 싫음’과 같은 감정을 분별해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세상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감정적 토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돕는다. 아이들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어른들이 아이들의 감정을 다룰 때 무엇이 필요한지, 부모와 교육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 「아이의 감정」의 중요성 |


부모들은 자녀가 성공하는 데 필요한 감정이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그런 분위기에서 각광받기 시작한 감정이 ‘자기 효능감’과 ‘자존감’ 같은 감정들이다. 그런데 이 같은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후천적으로 생겨난 것일까? 뇌과학에 따르면, 여전히 반신반의다. 하지만 저자들은 감정의 유전적 특징이 고려되더라도 아이들의 감정은 그들이 겪는 관계의 경험, 특히 부모에 의한 경험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지적한다. “자존감은 선천적인 유전적 요인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존엄과 존중으로 경험되며, ‘아이 자신에게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는 아이가 감정을 배울 수 있는 ‘감정의 통로’이자 ‘감정의 본보기’인 셈이다.

부모가 좋은 ‘감정적 본보기’가 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저자들은 “결점을 가진 존재로서 부모는 ‘감정적 본보기’가 될 용기를 가져야 한다”라고 충고한다. 여기서 말하는 본보기는 ‘기념비적’이며 ‘모범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쁜 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그 어느 부모도 결점 없이 완벽할 수 없다. 모나고 부족하며 감정적 결점이 있는 존재로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현하고 정서를 주고받는 본보기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부모의 다툼과 화해의 과정을 지켜보며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기쁨, 사랑, 열정, 자부심 등 긍정적인 감정은 물론이고 슬픔, 분노, 무기력, 우울감 등 부정적인 감정도 인생의 일부로서 있는 그대로로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느끼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감정은 오르내림이 있고, 지금의 감정도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또다시 불쑥 찾아온다는 삶의 원리를 체득한다. 요컨대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이 높은 영혼이 단단한 아이는 특정한 감정에 치우쳐 있는 아이가 아니라, 자유롭게 감정이 허락된 환경에서 자라나는 아이다.

“감정은 행동을 일으키며, 세상을 평가하고, 가야 할 방향을 정한다.” 굳이 뇌과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인생에 끼치는 감정의 역할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감정은 인지한 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충동, 특히 즉흥적이고 직접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동력이다. ‘두려움’은 놀라 뒤로 물러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고, ‘갈망과 그리움’은 눈을 크게 뜨게 하고 팔을 멀리 내뻗게 하며, ‘분노’는 목소리를 높이며 주먹을 쥐게 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게 한다. ‘혐오감’은 몸에 좋지 않은 것을 내뱉게 하며, 반대로 ‘사랑’은 끌어당기고 친밀하게 만든다. 이렇듯 감정은 우리의 행동, 특히 즉흥적인 행동에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감정만으로 다리의 안전율 따위를 계산할 수는 없지만, 다리 저편으로 이동을 모색하는 ‘그리움’과 밀려 내려오는 물에 대한 ‘두려움’은 다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부모가 감정적 본보기로서 아이들의 열린 감정을 존중하고, 아이들이 느끼는 부끄러움, 죄책감, 그리고 사랑과 같은 감정들을 공감해준다면, 아이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러한 감정들을 아주 중요한 길잡이로 활용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된다.


| 「아이의 감정」의 특징 |


1
이 책은 크게 1, 2부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아이들의 감정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35가지 감정들이 사전식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2부는 아이의 감정과 관련된 최신 뇌과학 연구 자료와 배경 자료들을 소개했다.
1부는 사전처럼 정리되어 있어,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항목을 쪽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다. 관심이 있는 항목을 찾아 읽고, 그와 연관된 다른 감정을 함께 찾아보는 것을 권한다. 다만,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호 연결된 감정의 특성 탓에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할 것을 권한다.
2부는 아이들에게 미묘하게 드러나는 ‘복합 감정’을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애증’은 ‘사랑’과 ‘미움’이 교차된 복합적인 감정이다. 부모에게 떼를 쓰거나, 반항을 일으키는 이 같은 복합적인 감정이 얽혀 있다. 또 아이들의 실현될 수 없는 ‘그리움’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교환되기도 하는데, 이 같은 복합적 감정에 관한 글들은 아이 감정의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기에 유용하다.

2
부록 1, 2로 구성된 ‘감정을 잘 다루는 아이로 키우는 5가지 원칙’과 ‘부모가 아이의 감정을 대할 때 생각해야 할 5가지 원칙’은 저작자의 원서에서는 부록이 아닌 일반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던 글들이다. 다만 앞서 등장한 내용을 다시 요약한 글이라는 점에 더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라고 판단해 시인성을 고려해서 별색의 부록으로 배치했다. 일독 후라도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읽기를 권한다.

3
이 책의 주된 가치는 무엇보다 일상적인 아이들의 감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이다. 아이들의 감정은 어른들의 감정과 비교해 매우 특별하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아이들이 여전히 성장하며 감정을 학습하고 있다는 차이 외에도 그들이 처한 ‘감정적 환경’이 어른들과 매우 다르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어른들은 스스로 직장을 바꿀 수 있고 심지어 배우자와 헤어질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자신에게 놓인 환경을 ‘스스로’ 바꿀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이례적으로 발생하는 아이의 ‘문제 행동’에만 주목하면, 사후약방문일 수밖에 없다. 아이의 감정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부모에 의해, 교사에 의해, 친구에 의해, 상처받고 훼손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아이들의 감정에 관한 일상적인 관심, 그리고 꾸준한 지지다.






맥진, 몸과 마음을 읽다

황재옥 저 / 25,000원 / 솔트앤씨드

“어느 때 맥진을 받는 것이 좋을까?”

현대인은 병원에 가도 딱히 치료가 잘 되지 않는 난치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메니에르, 공황장애, 신경성 위염, 강직성 척추염, 베체트씨병……, 이런 병명들은 늘어나는데 만성 질환자가 돼버리거나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는 환자들이 점점 늘어난다. 또 “병원에서는 이상 없다는데 저는 아파요”라며 고달픈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다 한의원을 찾는 사람도 많은데, 예를 들면 이명이 그렇다.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과 시각을 가진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럴 때 훨씬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환자가 어느 때에 어떤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 자신에게 유리하고 적합한지 먼저 적극적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사실은 한의학과 서양의학은 어느 쪽이 우위에 있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다. 서양의학은 조직상의 질병에 탁월한 반면, 한의학은 오장육부의 기능적 문제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탁월하다. 병명을 몰라도 원인을 찾으면 치료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맥진은 한의학적 진단의 핵심으로 12개의 청진기로 온몸을 스캔하는 것과 같으며, 이것으로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책은 맥진기로 맥파와 맥동을 추출해서 분석해온 40년간의 임상 데이터를 통해 한의학적 진단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가의 진단검사를 받았지만 병의 원인을 모를 때, 심인성 질환이 의심될 때, 숨어 있는 질병을 찾아낼 때, 적은 비용으로 자주 건강검진을 하고 싶을 때 맥진검사를 해보자.

“맥진은 12개의 청진기로 온몸을 스캔하는 셈”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몸을 살펴보는 한의학적 건강검진

반복되는 중이염이 도통 낫질 않는다는 고등학생 한 명이 한의원에 와서 맥진검사를 했다. 오른쪽 손목의 바깥쪽 요골동맥 3군데 맥 부위(촌관척)에 센서를 연결하자 모니터에 폐, 비장, 심포, 대장, 위장, 삼초의 기장부 6개 맥을 나타내는 파형이 나타났다. 또 왼쪽 손목의 요골동맥에 센서를 연결하자 모니터에 심장, 간장, 신장, 소장, 담낭, 방광의 혈장부 6개 맥 파형이 나타났다. 진료실로 들어가자 한의사는 맥파의 파형과 크기를 분석해 귀에서 왜 농이 아물지 않고 염증이 반복되고 있는지 설명해주었다. 귀를 관장하는 신장맥을 보니 춥고 진액이 메마른 상태였기 때문에 항생제를 먹고 주사를 맞아도 깨끗하게 낫지 않고 재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심장맥과 간장맥을 보면 바짝 타고 메마른 데다가 심리적으로 안정되지 못하고 긴장된 상태였다. 피부도 메마르면 열이 나고 상처를 잘 입는 것처럼 오장육부도 탄력이 없고 물기가 없으면 열이 나고 상처를 잘 입는 법이다. 맥파를 보면 성격이 굉장히 꼼꼼한 걸 알 수 있었는데, 내성적이고 말이 없어서 아파도 웬만하면 참는 성격이었다. 이 학생의 몸속 상태에 맞는 한약 처방과 침 치료로 염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새 책 『맥진, 몸과 마음을 읽다』는 한의학의 진단에서 12장부의 맥을 짚어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는 맥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강조한다. 이 고등학생의 사례 외에도 40년 가까이 쌓인 임상 데이터는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하다. “요새는 한의원에서 왜 맥을 안 짚어줘요?” 저자는 이런 환자의 질문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침과 추나 치료만으로 한의원이 돌아가는 곳이 많다 보니까 환자들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고 싶은데 듣지 못하는 데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의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의사와 얼굴 마주보고 대면하는 진료 시간이 2분, 3분밖에 안 된다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병원에서 환자들은 갑갑증을 느낀다. 이건 난치병이 아닌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제 병이 뭐예요?” “제가 왜 아픈 거예요?” “고칠 수 있어요?” 이것이 그동안 환자들이 저자에게 가장 많이 질문하며 궁금해했던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책에서 맥진의 원리를 풀어냄으로써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답을 하고 있다.
손목 안쪽의 요골동맥 박동이 느껴지는 곳에 손가락을 얹고 맥을 파악하는 것을 ‘진맥’ 또는 ‘맥진’이라고 한다. 한의학의 맥진은 거창한 의료장비 없이도 언제 어디서나 진단을 내릴 수 있어 주요한 진단법으로 활용해왔지만, 손의 감각으로만 알아내려고 하면 너무 어렵고 배우고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 때문에 안타깝게도 현실에서 맥진의 고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한의학은 치료 기술이 잘 발달돼 있어 개인의 상태에 따라 맞춤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진단이 제대로 이뤄져야 치료도 정확해질 것이다. 그동안 손으로 맥을 짚는 한의학은 너무 주관적이며 가변적이라는 비평을 받아왔고, 몇몇 고수를 제외하면 너무 감으로 치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한의학 이론에 따라 디지털화된 과학적 기기로 개발된 맥진기 덕분에 정확도, 객관성, 가시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의학 이론을 적용한 12장부의 27맥을 그려낼 수 있는 전세계 유일의 의료기구인 맥진기는 1993년에 처음 의료보험에 포함되어 보건복지부 지정 한방의료기 1호가 되었다(당시엔 한 번 맥진할 때 1만 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은 가장 적은 비용으로 오장육부를 모두 살펴볼 수 있는 건강검진 방법이 바로 맥진기로 맥진검사를 하는 것이다.

“조직의 병은 서양의학, 기능의 병은 한의학”
12장부의 한의학적 해석을 알면 병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에 난치병이라 불리는 것들의 공통점은 병의 원인을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의학에서도 통합의학, 기능의학 등의 흐름이 나타나서 인체가 독립된 기관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시스템으로서 작동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나의 질병에 하나의 약물을 적용한다는 현대 의학의 문제점을 인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원래 서양철학은 유물론적 사고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사람을 보고 치료하기보다 질병만 보고 치료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조직을 관찰하고 미시적인 시각으로 더 작은 단위로 세밀하게 국소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발달해왔다. 만약 동양적 사고가 유입되지 않았다면 인체를 시스템으로 보는 시각은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학력이 높은 손자보다 공부를 많이 못했던 할머니가 우리 몸의 작용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 그 옛날 『동의보감』의 한의학적 건강 상식들이 그만큼 대중적으로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주 쓰는 말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간담이 서늘하다”, “마음이 편해야 속이 편하지”,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런 말들은 모두 한의학적 표현이다. 이것은 몸에 나타나는 질환뿐 아니라 정신 질환에도 해당된다. 분노, 공포, 슬픔, 지나친 생각 등(칠정)은 몸에 영향을 미쳐서 질병을 일으킨다. 한의학 표현으로 말하면 거센 바람, 장마, 오랜 가뭄, 심한 추위 등 외부적 환경(육음)뿐 아니라 인간의 오욕칠정도 생활습관, 자세 등과 함께 병의 원인이 된다. 만약 급성 위통이 나타난 환자가 있다고 해보자. 맥진검사를 하면 식중독처럼 음식에 의한 복통인지, 스트레스로 인한 복통인지 맥진기가 그려내는 맥파를 보고 명확하게 바로 구별할 수 있다. 콧물, 재채기가 나올 때도 감기에 의한 것인지, 비염 증상인지 맥파를 보고 알 수 있다. 우리는 한의학의 특성을 이해함으로써 몸이 아픈 원인을 찾고 몸을 회복하는 데 훨씬 효과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질병은 조직상의 질병, 기능상의 질병, 구조적 질병, 정신적 질병으로 나눌 수 있다. 조직상의 질병은 염증, 궤양, 혹이 있는지, 암이 숨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인데, 서양의학은 조직의 병을 진단하고 고치는 데 한의학보다 뛰어나다. 반면 한의학은 기능상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예를 들면 “피곤해요”, “잠이 안 와요”, “밥맛이 없어요”, “툭하면 감기 걸려요” 등의 문제들이다. 소화가 안 되는 사람은, 첫째 마음이 편하지 않은 사람, 둘째 식생활이 불규칙적이고 습관이 좋지 않은 사람, 셋째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다. 맥진검사를 하면 이런 유형을 모두 구분해서 치료할 수 있다. 서양의학도 한의학도 사람의 몸을 완벽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열을 가릴 일이 아니라 관점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면 싸울 일이 없고, 보완하면서 환자를 도울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12장부의 명칭만 설명해도 한의학적 관점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맥진에서 신장은 kidney와 일치하지 않으며 비장은 spleen과 일치하지 않는다. 방광맥에서는 오줌보인 방광(bladder)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척추를 본다. 12장부의 분류는 해부학적 분류가 아니라 기능적 분류이기 때문이다.

“몸의 문제인지, 마음의 병인지 구별할 수 있다”
40년 가까운 맥진 임상 사례로 보는 질병예방법

맥을 보는 근본적인 이유는 환자가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나 당장의 불편함은 이야기하지만 그 외에는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양의학적 사고에 젖어들어 있는 현대인들은 여러 가지 증상들이 서로 관련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들도 많다. 그런데 맥진을 하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심상, 생활습관까지 파악할 수 있다. 청소년의 비장맥을 보면 공부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다. 어린 아이들은 가정이 행복하면 12장부의 맥이 위로 뛰며, 밝고 명랑하다. 나대느라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전반적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맥인 경우에는 아이들이 움직이질 않고 말을 안 한다는 특징이 있다. 언어장애가 있다거나 어린아이라서 표현을 잘 못하는 경우라도 맥파를 보면 환자 스스로 모르고 있는 것까지 짚어낼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한의사라면 꼭 맥진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년의 한 여성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이명으로 맥진검사를 하러 왔다. 맥을 보고 나서 뭔가 불만이 있지 않은지 상담을 했는데, “빨간 자동차를 사고 싶다”는 말을 남편이 안 들어줘서 화딱지가 났던 것이 이명이 생긴 원인이었다. 단순히 자동차 이야기만 들으면 별난 여성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아내의 취향을 무시하고 남편이 20, 30년간 아내의 일에 대해 마음대로 해왔던 것이 쌓였다가 폭발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의학은 기능을 보는 데 탁월하기 때문에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뛰어난 것이며 치료약도 잘 구비되어 있다. 밤에 라면을 끓여먹고 잤더니 부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것도 안 했는데 띵띵 붓는다는 사람도 있다. 림프 순환의 문제일 수 있는데, 한의학적으로는 뇌와 화병, 즉 심적인 문제로 본다. 이럴 때 이뇨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화병 푸는 약을 쓰는 것이 다르다. 한약에는 마음에 작용하는 처방들이 발달해 있어서 곧잘 듣는다고 한다. 저자의 임상 사례를 보면 심리적인 부분도 꼭 짚어주는데, “맥을 보면 부글부글 끓고 있고 속상한 게 참 많은데 무슨 일이 있나요?” 하고 말을 거는 경우가 많다. 한의학적 용어로 병의 원인은 육음칠정으로 정리된다. 육음은 피부, 입, 코 등으로부터 시작해 바깥에서 안으로 병이 침투하는 양상이며 날씨와 관련이 있고 초기에는 오한, 발열, 두통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증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칠정(감정)은 직접적으로 내장을 상하게 하며, 기능적인 영향을 미치고, 상태를 급격히 악화시키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인간의 질병은 마음에서 비롯되었고, 마음에서 출발해 몸을 약하게 만든다는 걸 보여주는 데이터는 차고 넘친다. 40년 가까이 맥진을 하면서 환자와 대화하다 보니까 저자는 고전의 원리 원칙이 얼마나 정확한지, 얼마나 사람을 종합적으로 정밀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현대 의학은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짧은 진료 시간에 답답해진 환자는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 이 병원에서 더 이상은 나아질 것 같지 않을 때 “괜찮다”고 말해버린다. 환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이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맥진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맥진의 장점은 심신을 다 읽기 때문이다. 게다가 맥을 잘 보면 환자의 건강관리에 대해서도 해줄 이야기가 많다. 저자는 후배 한의사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학문의 깊이가 짧은 사람이 한의학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꾸 서양의학적으로 해석하고 따라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마치 부처님을 기독교 교리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과 같아서 설명이 될 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과 사물을 보는 한의학적 시선을 잃어버리는 건 잘못된 선택이라는 당부다.

맥진을 경험한 환자들의 이야기

“놀라서 혼비백산해서 위가 아픈 거네요”
한의학은 병의 원인을 찾기 위한 인체 관찰이 뛰어나다. 갑작스러운 외부적 자극이 질병을 일으켜 약을 쓸 때도 원인이 물기냐, 냉기냐, 바람이냐 개인에 맞춰서 병인을 없애는 치료를 한다. 40대 초반의 여성이 배가 꼬이는 위경련으로 찾아와 맥진검사를 했다. “나이도 젊은데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왜 이렇게 기가 안정을 못 취하고 난리법석이냐”고 물었다. 비장맥, 대장맥, 위장맥, 삼초맥이 뜨거운 냄비 위에서 콩이 튀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사연을 들어보니 어제 친정엄마가 보이스피싱에 걸려 현금 5천만 원을 날릴 뻔했다고 한다.

“할머니, 손은 왜 떠세요? 맥을 보니 파킨슨 아니에요”
서양의학은 궤양, 혹, 암 등 조직상의 질병을 진단하고 고치는 데 뛰어나다. 반면 한의학은 오장육부 기능상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최적화돼 있다. “피곤해요” “어지러워요” “잠이 안 와요” “밥맛이 없어요” 등 흔히 병원에서 이상 없다고 말하는 대부분이 기능적 질환이다. 꼬리뼈에 금이 가서 정형외과에서 심을 박는 치료를 받은 후 통증 때문에 침을 맞으러 온 할머니가 있었다. 손을 떠는 것이 눈에 들어왔는데 책상을 짚어보라고 했더니 떨지 않았다. 병원에서 파킨슨 진단을 받았다는데, 맥을 보니 근심걱정은 보이지만 잡티가 없었다. “할머니, 파킨슨 아니에요.”

“맥을 보니 울고 있네요. 얼마 떼이셨어요?”
건강한 상태에서 맥진검사를 하면 기질적인 것도 보인다. 맥파를 보고 그 사람 성격까지 금방 포착할 수 있다. 마치 12개의 파이프를 통해 내부 감정의 주파수를 듣는 것과 같다. 나이, 성별 등을 확인하고 12장부의 맥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며 진료실에 이제 막 앉은 환자에게 물었다. “얼마 떼이셨어요?” 깜짝 놀라며 환자가 “7억이요. 전 재산이었어요”라며 울먹였다. 7억이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그 이상 떼인 사람도 많다며 50억 원을 떼인 사람 얘기를 들려주었다. 환자는 울음을 뚝 그치고 차분해졌다.

“무릎이 왜 그렇게 부었어요?”
맥진이 보여주는 12장부의 맥파 중 비장맥, 방광맥, 신장맥을 보면 경추, 요추, 무릎 등 척추 문제, 구조적 질환을 파악할 수 있다. 언젠가 환자의 맥을 보고 “무릎이 왜 그렇게 부었어요?”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며 ‘맥에 무릎이 어딨어요?’라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긴 바지를 입고 왔고 이제 막 앉아서 얼굴만 봤는데 그런 말을 하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신장맥이 작고 본맥에 이어 꼬리를 달고 있는 가지맥을 보니 무릎 관절이 띵띵 부어서 온 사람이었다.







오늘 사회 발코니

박세미 저 / 12,000원 / 문학과지성사

“제 앞에 펼쳐진 것은 그저 바다. 아름답고 무섭고 아득한 사회의 바다.
파도가 밀려오면, 발코니가 흔들거립니다.”

친애하는 나의 이웃들에게
‘다정한 이웃집 시인’ 박세미가 부치는 전언
오늘과 사회와 발코니에서 늘 안전한 항해이기를
모든 것이 예측 불가능하고 파편화된 이 시대에, 오로지 현재만을 휘발시키며 살고 있는 나에게 어딘가로 치켜들 손가락 따윈 없다. 나는 다만, 하루하루 주먹을 쥐고 생활과 겨룰 뿐이다.
-산문 「다만 나는 오늘의 맥락이 된다」,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2년 여름호에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다정한 이웃집 시인’ 박세미의 두번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594번째로 출간되었다. 2019년 첫 시집 『내가 나일 확률』을 펴낸 지 4년 만에 돌아온 시인은 그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시적 풍경을 펼쳐 보인다. 이번 시집에 해설 대신 수록한 인터뷰는 그 공백에 대한 궁금증을 채워줄 가장 흥미로운 선택이다. ‘되고 싶은 것’이 되었느냐는 물음에 ‘전혀’라고 답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더 멀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무수한 지금을 지나 한 시절을 단락 지은 시인의 얼굴이 여기에 있다. 체념과 용기 같은 것을 한데 섞은 미묘한 표정, 그런데 어딘지 성숙하고 단단해진 느낌, 그러나 여전히 사랑스러운 표정을 잃지 않은 채로.
시집을 짓는 일을 집짓기에 비유한다면, 3부로 나뉘어 수록된 51편의 시는 그간 시인이 하루하루 성실하게 고르고 다듬어 쌓아 올린 재료일 테다. 이 집은 화려하기보다 단정하고, 남들 눈에 띄지 않지만 견고하다. 이 집에 살고 있는 이들도 집과 꼭 닮았다. 첫 시집에서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슬픔을 고백하면서도, 이내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 “깊고 연약해 보이는 땅”(「뜻밖의 먼」, 『내가 나일 확률』)으로 향하던 박세미의 화자들은 뚜벅뚜벅 걸어 지금 여기, 오늘 사회에 도착했다. 그리고 발코니에 올라서서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기별을 전한다. 오늘과 사회와 발코니에서 늘 안전한 항해이기를 응원한다.
그러므로 『오늘 사회 발코니』는 이 땅 위에 발 디디고 살아가는 당신, 눈앞의 오늘을 살아가는 데 열중하는 당신을 위해 마련한 선물이다. 이 시집에는 언제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이 불현듯 출현한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의 사람, 다음 역으로 가는 사람, 사라진 동료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사람, 무의미를 위해 노동하는 사람, 술을 삼키고 웃는 사람, 기어코 쓰려는 사람…… 평범한 생활을 영위해가는 인물들을 호명하는 사이 당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이 시집을 덮는 순간 자신만의 유일한 발코니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한 걸음걸이를 가졌지”
─걷고 뛰다가 멈춰 서서 생각하기

시의 화자들은 어느덧 제법 안정적이고 평온한 하루를 보내게 된 듯하지만, “절대 상하지 않겠다”(「일조권」)는 다짐을 되새기듯 끊임없이 걷고 뛴다. “늪에/빠지지 않기 위한”(「현실의 앞뒤」) 걸음걸이로, “두 팔목이 잡힌 채로”(「사회의 시간」)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아슬아슬하고 숨 가쁘다. “팔다리를 효율적으로 가동”해 “최대한의 속도를”(「육상선수」) 내는 법을 훈련하지만 누군가를 제치거나 결승선에 닿는 데 그 목적을 두진 않는다. 오히려 때로는 “한 발자국씩 뒤로”(「뒤로 걷는 사람」) 가거나, “스툴의 다리 끝에 올라서는 연습을”(「기능」) 하며 시간을 유예한다.
‘시간’은 박세미식 세계에서 사회를 주관하는 개념이다. 시인은 과거와 미래의 양 끝을 연결한 고리에 현재의 몸이 묶여 있다고 느끼며, “다른 존재들과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감각한다. 매일같이 걷고 뛰는 동작을 반복하는 인물들이 이러한 시간의 자장에서 벗어나는 공간은 오직 ‘발코니’뿐이다. “안에도 속하지 않고 밖에도 속하지 않은, 안과 밖의 자장에서 벗어난 무중력의 시간”(인터뷰)이 흐르는 곳이다. 「Balkon」에서 ‘나’의 딸 리자는 안온한 발코니 위에 선 채로 “아름답고 무섭고 아득한 사회의 바다”를 항해한다.

나의 딸 리자는 발코니를 건물의 정면에 정박해 있는 작은 배라고 한다
오늘도 리자는 작은 배를 타고 항해 중이다
등 뒤에서 다른 가족들이 식사를 하든 말든, 집 안 청소를 하든 말든, 노랫소리가 들리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 앞에 펼쳐진 바다만을 경험한다
뒤돌아보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방금 돛을 펼친 사람처럼
-「Balkon」 부분

앞선 시의 제목은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의 사진집 『Balkon』에서 따왔다. 파무크는 반년간 매일 발코니에서 바라본 풍경을 8천5백여 장의 사진으로 남겼고, 그중 5백여 장을 책으로 엮었다. 소설 쓰기가 막힐 때마다 발코니에 서서 바깥 풍경을 찍고 그 꾸준한 기록을 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낸 파무크처럼, 『오늘 사회 발코니』에는 성실한 생활의 포즈를 묘사한 시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 20년간 화이트 셔츠 공장에서 일해온 ‘나’는 “마흔 가지가 넘는 와이셔츠 제작 공정에서 칼라와 커프스를 다는” 작업을 수행한다(「생산 라인」). 1인 운영 국숫집의 주인인 ‘그’는 “국수 한 그릇이 손님에게 나가기까지 필요한 모든 과정”을 도맡는다(「일」). 생각이 끼어들 틈 없는 반복적인 일상을 멈추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사고다. “검붉은 피가 번지”고, “노릇하게 구운 냄새가 나”고, 얼굴도 모르는 “옆자리의 동료가 사라”(「생산 라인」)지는가 하면, “기계가 그의 손을 반죽인 양 빨아들인”(「일」)다. 사고(事故)가 일어난 순간에서야 사고(思考)가 시작된다.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가끔씩 “스스로를 인질 삼아 겁박”(「일 앞에서」)한 후에야 비로소 무언가를 생각할 여유를 얻는다.

“나의 사회와 너의 사회가 만나는
촉촉한 뽀뽀”
─오늘의 맥락 위에 지어 올린 ‘실시간 시’

「모빌」은 시인이 처한 일상, 노동, 예술의 균형감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그림자처럼 살던 한 사람이 전시를 열기로 한다. 그는 “몸에서 가장 먼 곳부터/아프지 않을 만큼” 오려 실에 걸지만 “그림자는 줄어들지 않”는다. “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잘라”내자 “전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며 탄생하는 ‘실시간 예술’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시인에겐 “아무것도 예술 작품이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 예술 작품”(「가난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방」)이다. 출근하고, 노동하고, 웃거나 울고, 저녁을 먹고, 잠드는 생활인인 동시에 곧 시를 쓰고 그림을 보고 전시를 관람하는 예술인이다.

(중요한 것은)
그는 매일 한 권의 도록을 꺼내는 사람
그날그날의 기쁜 페이지를 펼쳐 테이블 한가운데에 두는 사람
전화를 받다가 정확히 거기에 커피를 쏟는 사람
한 달에 한 번 회화 작품을 프린트해 벽에 붙여두는 사람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시를 쓰는 사람
필요하다면 그것을 떼어 바닥에 깔고 짜장면을 먹는 사람

침대에 누워 시스티나성당의 천장을 바라보는 사람
이윽고 코를 고는 사람
-「가난한 미술 수집가를 위한 방」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생활과 예술이 서로를 간섭하고 침범하는 공간 속에 놓여 있다. 이십대를 통과하며 엮은 첫 시집이 일상에서 분리해낸 시적 순간들을 영감으로 삼았다면, 그다음 10년을 지나고 있는 시인은 다만 오늘의 맥락 속에서 새로운 맥락을 지어 올린다. 생활의 토대 위에 시적 풍경을 건설한다. 시인이자 직장인, 한 집안의 맏딸이자 한국에 거주하는 삼십대 여성으로서, “오늘 나의 노동에 관해, 오늘 읽은 책에 관해, 오늘 걸은 도시에 관해, 오늘 만난 사람에 관해, 오늘 꾼 꿈 위에 시적 언어를 대응시키고, 중첩시키고, 충돌시키고, 균열을 발생시키면서”(인터뷰) 충실하게 다음 보폭을 내디딘다.
누군가는 한집에 모이기보다 발코니 너머로 안부를 전하는 시인에게 모종의 거리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박세미는 그런 의문에 이렇게 답할 것 같다. ‘즐거운 사회’는 이해받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애써 욕심내지 않는 것, 곁에 있는 사람들의 고유한 영역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각자의 내면에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불”(「짐작 속」)이 쉬이 꺼지지 않도록 서로를 지켜봐주는 일이라고. 「빈집에 갇혀 나는 쓰네」의 화자는 “빈집에 초대되”어 “스스로를 가두고” 다만 “쓰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가 너무 막막하게 느껴질 때면 그저 발코니로 나가봐도 좋을 것이다. 그곳에 서면 맞은편에도 발코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어떤 순간에는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구하기도 할 것이다.





 

국토박물관 순례
1권: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
2권: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유홍준 저 / 각권 20,000원 / 창비

유홍준의 새로운 출발, 『국토박물관 순례』
각 시대의 대표 유적을 찾아가는 역사 기행
우리 시대 ‘문화 전도사’ 유홍준이 새로운 시리즈의 첫 삽을 떴다. 우리 역사를 시대순으로 살펴보며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지역과 문화유산을 만나는 『국토박물관 순례』 시리즈다.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를 외치며 시작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출간 이후 30년, 답사기에서 다 담아내지 못했던 우리 역사의 진수를 국토박물관 속에서 차근차근 찾아가는 새로운 답사기이자 진화한 답사기인 셈이다. 선사시대와 고대사를 다룬 이번 1~2권을 시작으로 근현대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국토박물관 순례』에는 역사와 문화, 유물과 현장을 아우르며 수십 년간 우리 역사의 현장을 두루 순례하고 소개해온 유홍준의 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통찰과 매력으로 가득하다. 또한 우리 역사를 차근히 알아갈 수 있도록 답사지 소개와 더불어 해당 시대에 대한 친절하고도 깊이있는 설명을 붙여, 성인과 청소년 독자들에게 두루 유익한 역사 교재로 손색이 없다. 부족한 한국사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려는 독자, 가족이나 지인과 역사기행을 떠나고자 하는 독자, 답사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학교 현장이나 동호회가 있다면 이 책이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국토박물관이 들려주는 새로운 역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한반도는 선사시대 유물의 보물창고


이번에 출간되는 『국토박물관 순례』 1~2권은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우리 역사와 문화유산을 소개했다. 1권 ‘선사시대에서 고구려까지’는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고구려시대의 핵심 유적을 다뤘다.
연천 전곡리 유적은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꾼 획기적인 발굴이 이뤄진 곳이다. 1978년 미국 병사 그레그 보엔이 이곳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를 발견하면서 동아시아에는 주먹도끼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기존 학설이 뒤집혔다. 이후 유적 전체가 공원으로 조성되고 전곡선사박물관이 들어서면서 이곳은 우리 구석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자 배움터로 거듭났다. 연천에는 그밖에도 다양한 역사ㆍ자연 문화유산이 분포해 있어 역사기행 목적지로 추천할 만하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150곳 이상이다. 이 책에서는 전국에 분포한 유적 중에서도 유물이 풍성하게 출토되어 역사적 가치가 돋보이는 부산 영도의 패총 유적을 둘러보며 한반도 신석기시대를 소개한다. 신석기인들의 식생활과 주거 환경을 보여주는 이 조개더미에서는 빗살무늬토기, 덧띠무늬토기, 조개 가면 등이 출토되어 과거를 전하고 있다. 유적이 있는 영도의 유래와 내력뿐 아니라 부산의 대표적인 유적지와 박물관도 소개하는데,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부산을 다룬 것은 놀랍게도 이번이 처음이다.
울산 언양 대곡천에는 역사 유적이 마치 고대의 보물처럼 숨겨져 있다.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유적뿐 아니라 신라시대와 조선시대의 흔적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유적을 대표하는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은 선사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귀한 문화유산이다. 그저 신기하게만 보이던 이 바위그림과 글씨도 유홍준의 안내를 따라 살펴보면 옛사람들의 눈빛과 손짓이 살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선사시대의 각양각색이 여기에 응축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구려의 ‘흥(興)’과 ‘성(盛)’을 찾아서
만주 벌판 속 우리가 몰랐던 문화유산들


이어서 고구려 역사의 중심이었던 만주를 탐방한다. 먼저 우리 고대사의 무대였던 만주의 지도를 익히는 것을 시작으로 고구려 기행 대장정을 시작한다. 첫 번째 코스는 중국 동북삼성의 중심 심양에서 봉황산성과 단동, 호산장성을 거쳐 압록강의 아름다움을 만나는 과정이다. 봉황산성과 호산장성은 각각 고구려 오골성과 박작성으로 추정(비정)되는 곳으로, 고구려 산성 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본격적인 탐방을 위해 잠시 들른 단동에서는 압록강의 아름다움과 분단을 포함한 우리 역사의 숭고함과 아픔을 느껴본다.
이어서 고구려의 첫 도읍이었던 중국 요령성 환인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곳에 위치한 왕성이자 산성이었던 오녀산성은 고구려 유적 중에서도 웅장함과 장대함이 남다르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를 구축해놓아 신생 왕국 고구려의 패기와 단단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이곳에 도읍한 지 얼마 안 있어 길림성 집안 지역의 국내성으로 천도했다. 그렇게 저자는 고주몽의 건국 이야기를 떠올리며 천도 경로를 따라 길림성 집안으로 이동한다.
집안은 고구려 국내성과 환도산성이 한 쌍을 이루어 400년간 고구려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만큼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들이 밀집해 있다. 고구려 유적 탐사단은 이 집안에서 여러 날 머무르며 역사의 향기와 압록강변의 서정을 느낀다. 시내에 있는 국내성은 심하게 훼손되었고 환도산성 안쪽은 과수원이 되어 있었지만, 중국은 이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수년 전 정비를 마쳤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의 대형 왕릉과 고분을 만나는 것은 대략으로도 하루가 부족할 지경이다. 우리 역사의 자부심을 지탱하는 고구려 전성기의 유적인 태왕릉, 장군총, 벽화고분 등 ‘무덤 순례’를 마치고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국토박물관 순례』 1권은 마무리된다.
 
부여 왕릉원의 우아함과 금동대향로의 예술성
백제 문화의 전성기는 부여에서


2권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는 1권 고구려사에 이어 백제와 통일 전 신라의 역사, 그리고 가야의 일부였던 비화가야의 이야기를 담았다.
백제를 대표하는 답사처는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다. 실제 프로그램인 ‘유홍준과 함께하는 부여 답사’ 경로를 따라가며 백제 문화의 전성기와 최후의 장면을 그린다. 최근 정비된 부여 왕릉원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되며 백제 문화의 융성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을 수도로 삼은 백제의 왕들은 백제를 한층 강성한 고대국가로 이끌었지만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패망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기 백제를 단순히 군사적으로 쇠약해진 뒤 사라져버린 나라가 아니라 당당한 문화 강국으로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제금동대향로라는 희대의 명작이 그것을 증명한다.
부여 백마강은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이 당나라로 압송된 경로기도 했다. ‘유홍준과 함께하는 부여 답사’ 팀은 이 경로를 따라가며 낙화암, 대재각, 부산서원, 유왕산 등 백제와 백제 이후의 부여 역사를 되짚는다. 백성들이 의자왕을 전송하며 슬퍼했다는 유왕산 설화는 이후 민속에도 남아 유왕산 추모제와 반보기 놀이를, 사라진 나라 백제의 역사는 「산유화가」를 남겼다. 이렇게 저자와 답사객이 과거를 회상하며 동행하는 모습이 정답게 느껴진다.

신라 금관의 빛나는 역사를 맛본다
옛 무덤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서
가야 답사의 시작은 창녕 비화가야

통일 전 신라, 즉 ‘고신라’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단연 경주 시내의 고분군이다. 대릉원 일대의 이 고분군은 신라 마립간 시기(356~500)의 유적으로, 금관을 비롯한 화려한 부장품들이 출토된 곳이다. 우리가 신라 하면 떠올리는 유물들이 이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기존 답사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 핵심 유적을 이번 『국토박물관 순례』에서 만난다. 금관 발굴을 중심으로 백년간 이어진 경주 고분 발굴의 역사와 빛나는 유물들이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신라 고분 발굴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전후로 시작된다. 제국주의 일본은 고대사, 특히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는 데 관심이 컸다. 경주의 신라 고분 발굴도 그 맥락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신라 고분에 대한 관심이 경주 밖으로 퍼져가던 중 1921년 9월, 우연히 시내 노서동 고분군 금관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어 신라의 금빛 문화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비전문가들에 의해 잘못된 방식으로 발굴이 이뤄졌고, 나중에는 유물이 도난당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나 금관총 발굴은 이후 경주박물관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소중한 발견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금관총에서 금관이 발견되면서 전문적인 발굴이 이어진 결과 금령총, 서봉총 등 봉황로 일대에서 다시 금관이 출토되었다. 금관 외에도 신라의 황금 문화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과 함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를 좀 더 체계적으로 알게 되는 등의 큰 성과가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손으로 직접 신라 고분을 발굴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특히 국립박물관을 중심으로 왕릉으로 추정되는 오늘날 대릉원의 대형 고분들을 발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다. 여기는 경주를 관광도시로 개발하려는 정부의 호응도 가세했다. 이렇게 발굴된 고분이 천마총과 황남대총이다. 이 두 무덤에서는 모두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도 말다래와 금동관 등 금관 외에도 수많은 부장품 유물들이 나왔다. 이로써 신라 금관의 특색과 유래를 연구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최근에는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이 재발굴되어 새로운 발견과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가야의 역사는 이른바 ‘6가야’에 포함되지 않은 비화가야를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야의 고분 발굴 성과와 함께 비화가야가 있던 창녕 지역의 풍성한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문화적, 정치적으로 신라에 종속된 것으로만 여겨졌던 가야의 문화가 독자적이고 뛰어난 수준을 갖추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고분 출토 유물이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우포늪, 비봉리 패총, 진흥왕 척경비, 술정리 삼층석탑, 관룡사 등 창녕에는 다른 문화유산도 참 많다. 대가야, 금관가야 등 가야의 주요 역사는 다음 권에서 본격적으로 서술될 것이다.

국토박물관의 문이 열린다. 역사가 나에게 다가온다!
아는 만큼 보이는 유홍준의 역사 순례


저자 유홍준은 『국토박물관 순례』를 구상한 이유로 “즐겁게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도 겸하는 답사기를 쓰는 것”을 들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0년이 그런 답사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지만, 더 체계적이고 접근하기 좋은 방식을 고민한 결과가 이 『국토박물관 순례』로 결실을 맺었다.
30년 전 저자 유홍준이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라고 선언했을 때, 많은 독자들이 이 말에 기쁘게 동의하면서도, 반쯤은 민족적인 자부심에서 나온 표현으로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탬이나 왜곡 없이 우리 국토가 진정 박물관이라고 믿는 저자의 신념을 입증하기 위해서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는 모든 국민에게 국토 박물관의 가치를 확실하게 알리기 위해 유홍준 교수는 『국토박물관 순례』 대장정을 시작한다. 우리 역사의 가치를 알아가는 여정은 곧 우리 삶의 가치를 느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니들의 시간

김해자 저 / 11,000원 / 창비

“때가 되었다, 가자”

사람 곁에서 먹고 자고 숨 쉬는 시들,
끝내 우리는 이를 악물고 희망하는 법을 배운다

한국 민중시의 도도한 물줄기를 이어가는 동시에 만해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권위 있는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문학성을 입증받은 김해자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줄곧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곁에서 목소리를 함께 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온몸으로 쓰는 리얼리즘의 시세계를 한층 벼려내 인간과 비인간을 넘나들며 “삶과 세계의 비극을 증언”(안희연, 추천사)한다. 구상문학상 수상작 『해자네 점집』(걷는사람 2018) 이후 5년, 암 투병 중의 생(生)체험과 사회적 죽음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소시집 『해피랜드』(아시아 2020)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시대의 고통과 슬픔을 관통하는 역사 인식과, 폭력과 탐욕으로 얼룩진 야만적 현실을 직시하는 냉철한 시선으로 가득하다. 이 시집의 매력은 그뿐만이 아니다. 삶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진정성 있는 시편들이 무겁고 아프게 다가오는 한편, 시인은 곳곳에 익살스러운 유머를 배치해놓았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웃음을 찾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바 『니들의 시간』은 그야말로 민중과 발걸음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는 시집이다. “두 눈을 뜨고 읽어야 하는”(송종원, 해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곱씹고 주위의 삶을 둘러보게 되며, 이윽고 벼랑 끝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희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안간힘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곁,
그 모든 곳에 김해자의 시가 있다


일찍이 한 시인이 “가난한 영혼이 고통을 받는 모든 곳에 김해자의 시가 있다”(문동만, 『축제』 추천사)라고 말했듯이 김해자의 시는 쓸쓸하고 외롭고 가녀린 영혼들을 향한 끝없는 사랑의 노래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정의롭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해설)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발 디딜 땅 한뼘 없”고 “허공마저 비싸서/숨 쉴 만큼의 공기도 허락되지 않”(「감긴 눈꺼풀 곁에서」)는 자본의 땅을 떠나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늘 희푸른 말”(「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이 살아 숨 쉬는 마을로 내려온 지 벌써 십오년째, 시인은 “희망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 같은 마음”(「어마어마한 도시락」)을 다독이며 “살자 살아보자”(「양미숙의 철화분청사기」) 다짐한다.
김해자의 시는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탄생한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개인과 시대의 기억을 더듬으며 시간여행을 떠난다(「시간 여행」 연작). 이 연작은 역사의 아픔을 격정적인 목소리로 토해내기보다는 차지고 구성진 사투리를 통해 그날의 마음들을 해학적으로 풀어놓는다. 물론 가볍지만은 않다. 전쟁 당시 양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장소에서 “탄피 박힌 두개골”과 “불에 탄 뼈”(「수철리 산 174-1번지」)가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는 침묵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비명을 깨물다 돌처럼 굳어간 아무개”들의 “관짝 같은 백비(白碑)”(「비명 곁에서 비명도 없이」)를 돌아보며 한국 현대사의 그늘진 이면과 암흑의 시대를 살아온 민중의 삶을 간곡한 언어로 되살려낸다. 시인의 관심은 후쿠시마 원전수 방류(「내 이름은 아르카」)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달이 내 창문을 서성이고 있다」)으로 이어지는바 “십년 삼십년 육십년 백년 후에 올”(「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 세대에게 우리가 어떤 세상을 물려줘야 할지를 독자로 하여금 곰곰 생각해보게 한다.

세상에 가득한 신음과 고통,
아직 부를 노래가 이렇게나 많이 남은 이유


시인은 1998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노동자 시의 대모’(김정환)로 불리며 세상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리얼리즘 시의 영토를 굳건히 지켜왔다.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공생하는 자리”(해설)에서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민중의 삶을 시로 써온 지 사반세기, 그러나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한세기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살과 뼈 타는 냄새”(「두통의 환각」)가 진동하고, “늙어보지도 못한 어린 노동자의 머리통이 스크린도어에 끼이고” “컨베이어벨트 속으로 반죽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두통의 환각」)는 비참한 현실 앞에서 시인은 “신음과 비명이 터져 나오는 시절에 시라니?”(시인의 말) 자문한다. 그럼에도 쓴다. “아직 부를 노래가 남아”(「농담」) 있기에, “죽어가는 나무에게 물을 주는” 간절한 마음으로 “작은 봄맞이꽃 같은 희망”(「바다에 달이 뜨고 쪽파 같은 오늘이 운다」)의 불빛 같은 시를 써나간다. “내가 아닌 것이 떨어져 나가고 바로 너인 것이 내가 될 때까지”(시인의 말). 김해자의 시를 읽는다는 것이 희망을 읽는다는 것과 똑같은 말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터다.









우리는 왜 혼자이고 싶은가

냇 세그니트 저 / 김성환 역 / 25,000원 / 한문화

은거의 역사와 의미,
명과 암을 탐구한 인문학적 역작!
‘물러서기’여도 ‘은거’여도 좋은,
인류의 오랜 열망을 탐색하다
은거를 꿈꿔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은거’라는 단어가 어색하다면 ‘물러서기’ 정도라도 상관없다. 변화를 향한 열망, 사람에 대한 혐오, 고요함에 대한 동경…. 이유야 무엇이든 이 정신없는 세상을 사는 현대인이라면 주변 사람과 처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순간을 한 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테다. 관계된 모든 것과 잠시 결별하고 물러서서 가만히 나와 세상을 바라보며 다시 나아갈 힘을 얻고자 하는 충동, 바로 은거에 대한 열망이다.
은거는 오래전부터 인류의 압력 해소 장치였는데, 그 필요성이 지금보다 컸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숨 쉴 공간을 찾아 헤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며, 잠시 현실을 떠나 있고 싶은 모두에게 호소력이 있다. 역사적인 은거가 대개 종교적 의식이나 수행에 한정되는 것에 비해, 현대적 은거는 명상과 기도에 온 삶을 바치는 가장 엄격한 형태에서부터 예술가들의 창작 작업을 위한 은둔과 상업화한 자기 계발 수련회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넓다. 심지어 이 책에는 온라인게임에 빠져 스스로를 방에 가둔 게임중독자의 경우까지 포함된다.
 
현재 780억 명의 세계 인구 중 역사상 처음으로 그 절반 이상이 도심에 거주한다고 하며, 유엔은 2030년쯤이면 전체 인구의 1/3가량이 주민 수가 최소 50만이 넘는 도시에 살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글로벌 웰니스 연구소는 2017년에 세계적으로 명상과 같은 은거 수행이 주류인 웰니스 관광이 884조 원 규모의 가치를 창출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현재 미국 성인의 14퍼센트 이상이 마음챙김 명상을 한다는 보고도 있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는 사람의 수는 수십 년간 감소세였지만, 중・단기간 수도원에 머무는 은거 생활은 점점 더 인기가 치솟고 있다. 이 모든 현상은 문화, 정치, 환경 문제에 시달리는 터질 듯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충동을 대변한다. 사회라는 직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는 관념은 직물 그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개념인데, 고대의 개념들 중 이보다 더 현대적인 것은 찾아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고립의 두려움과 고독에의 이끌림…
물러나 본 후에야 얻는 나아감의 힘
힌두 철학에 근거해 인생을 4단계로 나눈 체계에 따르면, 사십 대 후반인 저자는 세속적 관심사에서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하는 세 번째 단계인 ‘숲속 생활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중년의 위기에 대한 고대 인도인들의 반응이었다. 숲속 생활기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인 ‘포기의 시기’로 이어지는데, 이 지점에 이른 사람은 오두막으로 물러나 사색과 명상을 하면서 여생을 살아간다. 최근까지만 해도 저자는 대화가 영적인 문제로 방향을 틀 때마다 인문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대화 주제가 바뀌기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자신의 인생이 아내와 아이들, 부모, 친구, 자연, 예술, 일에 대한 사랑과 다름없다는 신념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이런 것들을 잃었을 때조차 다른 것을 기대하거나 원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문주의자답게 힌두교와 불교에 공통적인 무집착의 원리에 관해서도 다소 의구심을 품었다. 우리는 분명 열정적으로 삶에 집착하며,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그런 집착의 대가로 상실과 이별 등을 겪지 않는가. 숲속에 거주한다니, 어린 두 아들의 아버지인 자신이 세속적 관심사에서 서서히 물러난다는 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무언가가 끝난 것 같았고, 변화가 필요하다는 느낌이 절실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비자발적 은거는 상황을 증폭시켰고, 그 느낌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최선의 방법은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물러섬이 어떤 형태일지, 자신이 그 일에 얼마나 소질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이성으로 조각했다고 자부한 자신의 삶에서도 함께함의 따뜻함뿐 아니라, 고독에 이끌리는 동시에 고립의 두려움 또한 느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은거의 역사와 의미, 명과 암을 탐구하는 인문 에세이인 동시에 그 여정을 기록한 여행기이기도 한 책에 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책이 주관적인 렌즈를 통해서나마 은거라는 현상을 광범위하게 맛보는 대표적인 연구 사례이자, 은거라는, 나도 몰래 점점 더 이끌린 행동양식 속으로 빠져든 경험을 묘사한 하나의 보고서가 되기를 희망한다.’

삶으로부터의 은거가 아닌,
삶으로의 은거를 만난다!

은거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인간의 아주 오래된 충동이다. 역사 이래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은거를 선택했고, 현대를 사는 우리는 점점 더 많이 은거하고 있다. 《우리는 왜 혼자이고 싶은가》는 이러한 인간의 은거에 대한 열망과 집착을 탐색한다. 신경과학과 심리학, 역사 등의 영역을 파헤쳐 우리가 고독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고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우리가 혼자일 때 뇌와 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밝히고, 은거는 세상의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어떤 의미였으며, 그것을 위해 비용까지 지불하는 이 시대에는 또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그렇다면 은거는 일종의 현실 도피에 불과한가? 아니면 현실에 더 깊이 참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가? 전례가 없을 정도로 온 인류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도록 강요받았던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은거는 어떤 의미였을까?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그는 세계 전역의 은거지에서 직접 은거하면서, 요가 학자와 인지과학자, 종교 지도자, 철학자, 예술가뿐 아니라 게임중독자들까지 은거를 경험했을 법한 이들을 두루 만나고 인터뷰한다.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학, 신경과학 등을 깊이 탐색하고 다양한 전통과 문헌을 살피며 우리는 왜 은거하려 하는지, 은거의 보상은 무엇이며 어떤 위험이 따르는지, 히말라야의 은둔 수행자와 온천에서 휴양하는 팔자 좋은 명상가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탐구한다.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한 고독한 세계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 은거를 해부해 본 것이다.
이 책은 끊임없이 정신을 일깨우며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동시에 인간적인 만남의 기쁨들로도 가득하다. 궁극적으로는 은거가 수도원이나 쇼핑센터, 동굴 등을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이를 수 있는 하나의 정신 상태라는 발견에 이르게 하여, 마침내는 ‘삶으로부터의 은거’가 아니라 ‘삶으로의 은거’를 이끌어낸다.


“이 놀라운 책을 읽다 보면 은거에 관한 작가의 탐색 속으로 빨려드는 동시에,
과학과 예술에 관한 박학한 지식에 감탄하게 된다.
삶의 근본 요인 중 하나를 말하는 생생하고 잘 쓰인 책 속으로 은거하는 듯하다.”
- 지아 하이더 라흐만, 《우리가 아는 것에 비춰 보면(In the Light of What We Know)》 저자 -

“바쁜 일상에 얽혀 사는 우리를, 물러서고 떠나고 발견하는
역사적이고 기쁨에 찬 탐험 속으로 이끌어 준다.”
-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Livewired)》 저자 -

“은거의 역사와 의미에 관한 작가의 탐색은
방대한 연구 자료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처럼
생생한 개인적 여정과 멋지게 하나로 통합해 냈다.”
- 윌리엄 파인즈, 《흰 기러기(The Snow Geese)》 저자 -
 





지구법학

지구법학회 , 박태현 , 오동석 , 정준영 , 안병진 , 김준수 , 최정호 저 / 김왕배 역 / 25,000원 / 문학과지성사

인간이 아니라 자연에게도 법적 권리가 있는가
나무와 돌고래, 숲과 강은 어떻게 법적·정치적 주체가 되는가
동식물과 자연이 참여하는 새 정치체제와 거버넌스는 가능한가
“우리는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자연에 권리를 부여하고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자연을 참여시키기 위한 철학과 방법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_강금실(재단법인 지구와사람 이사장, 변호사), 「총서를 내며」에서

지난 11월 13일, 제주특별자치도는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 남방큰돌고래Tursiops aduncus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는 법 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는 무엇보다 개체 수 120여 마리 수준으로 멸종 위기에 처한 제주 남방큰돌고래를 보호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제주 남방큰돌고래가 국내 생태법인 제1호가 된다면, 남방큰돌고래는 자신의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소송에 나서 법적 다툼을 벌일 수 있게 된다. 이때 이들의 권리는 어떤 법적 근거에 의해 뒷받침되어, 어떤 절차로 행사될 수 있을까?
문학과지성사와 재단법인 ‘지구와사람’이 이번에 함께 선보이는 〈지구와사람〉 총서의 첫 책 『지구법학─자연의 권리선언과 정치 참여』는 이처럼 우리 사회에 새로이 떠오른 질문들을 마주하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대안적 시스템으로서 ‘지구법학’을 소개한다. 지구법학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생태계와 자연까지 법적 주체로 삼는 법사상 혹은 법체계의 학문이다. 즉 인간이나 기업, 선박 등에만 주어지던 법인격이 자연에도 주어진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철학적 논의를 펼쳐 보이는 한편, 석호나 국립공원처럼 구체적 대상을 생태법인으로 지정하는 등 실정법 차원의 실천 행위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움직임에는 지구 곳곳에서 감지되는 기후위기와 ‘여섯번째 대멸종’의 원인이 무분별한 인간 활동에 있다는 위기의식과 더불어, 과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망이 더욱더 촘촘해지고 있다는 신유물론적 인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렇게 인류세에 접어들어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주체/객체의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비인간의 행위주체성에 주목하는 경향은 인문학과 사회학, 정치학, 법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나타나고 있다. 『지구법학』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지구법학을 헌법학과 법철학, 정치학, 사회학, 정치생태학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에서 논한 10편의 글을 사회학자 김왕배(연세대) 교수가 엮은 모음집이다. 이 책은 아직 우리에게 낯선 지구법학의 사상적 내용을 개괄하고 지구법학적 관점을 요청하는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을 살펴본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비인간 생명이 정치에 참여하는 정치체제인 바이오크라시biocracy, 사유재산권 제도의 대안으로서 인간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동등하게 돌보는 공동의 것인 코먼스commons 등, 사회를 생태적으로 재구성하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을 담아낸다.

인간 너머 존재들을 위한 법학

이 책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지구법학의 이론과 전개」는 지구법학의 기본 개념을 살핀다. 먼저 박태현(강원대 법전원 교수, 환경법학)은 지금 우리가 지구법학을 이야기해야 하는 까닭으로서 ‘인류세’라는 시대적 배경을 지적한 뒤, 지구법학의 주요 내용과 그 법적 의미를 살펴본다. 오동석(아주대 법전원 교수, 헌법학)은 한국 헌법의 여러 개별 조문을 근거 삼아 생태적 헌법 해석론을 펼치는 한편, 헌법재판소나 법원 등 “개별 사안을 해결하는 동시에 법의 원칙을 선언”하는 역할을 맡는 사법부에 생태적 관점을 요청한다. 정준영(서울대 법학과 박사 과정, 법철학)은 비인간 자연에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데 있어 기존 법철학의 권리 이론이 갖는 한계를 지적하는 한편, 주체/객체 이분법 위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비인간에 대한 사유재산권 제도를 지구법학의 관점에서 검토하면서 대안적 관점을 모색한다.
2부 「인간 너머의 정치, 바이오크라시를 향하여」는 생명주의 정치체제로서 ‘바이오크라시’를 소개한다. 김왕배는 비교적 최근에 사회 이론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주목받고 있는 신유물론, 사변적 실재론 등의 이론을 개괄하면서, ‘비인간’이 행위주체로 자리매김한 사회와 정치는 어떠한 식으로 변모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이후 안병진(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 정치학)은 ‘민주주의는 우리가 마주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국가 권력을 입법, 사법, 행정부로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한 대의민주주의 모델의 메커니즘이, 상호 견제 기능이 약화되는 오작동을 일으키며 현재의 생태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한다. 아울러 그는 삼권분립에 ‘심의적 미래부’를 추가해, 비인간 주체와의 공존을 과제로 안은 미래 세대의 정치 참여를 제안한다.
3부 「한국 사회의 사례들─실험과 도전」은 인간과 비인간이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 얽혀 있는 한국 사회의 여러 단면들을 포착해낸다. 김준수(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 수료, 정치생태학)는 2020년 생태계 교란 생물로 지정된 붉은가재Procambarus clarkii의 사례를 제시한다. 붉은가재의 교란 생물 지정은 국민국가가 자신의 영토 안에서 토착종을 보호하고 외래종은 퇴치·제거하는 생명 안보biosecurity의 한 장면으로, 이를 통해 필자는 인간 중심적 생명 안보 지식의 생산과 정책 수행 과정에 대한 성찰을 요청한다. 최정호(서울대 빅데이터 혁신융합대학 사업단 연구교수, 헌법학)는 2021년 10월 한국 행정부가 제출한 ‘민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동물의 법적 지위 문제를 살펴본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여러 법률안의 내용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아울러 고찰한 뒤, 유사 입법례로서 독일과 스위스의 논의를 통해 시사점을 도출한다. 박태현은 최근 한국에서도 논의가 본격화하는 남방큰돌고래의 법인격 부여에 대해, 특정 생물 종이나 생태계, 넓게는 자연 전체를 권리주체로 인정하는 해외 입법례를 소개한다. 그 후 현행 법체계 내에서 제주 남방큰돌고래를 생태법인으로 창설하는 방안들을 검토해본다.





호로요이의 시간
“일본 아마존 1위, 연쇄 의문사 사건 실화 소설” 《버터》 유즈키 아사코,
“일본 호러소설 대상 독자상” 《기억술사》 오리가미 교야,
“지친 하루를 위로하는 맛있는 한 끼, 시원한 한 잔” 《낮술》 하라다 히카,
“마라톤 주자들의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 《달리기의 맛》 누카가 미오,
그리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사카이 기쿠코.

일본 여성작가 5인이 담금주부터 사케, 칵테일, 위스키까지
술을 소재로 그 종류만큼 다채롭고,
해가 갈수록 깊어지는 인생,
특히 여성들의 삶을 그려낸 단편집.

《기억술사》에서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는 도시전설 속 괴인을 그린 오리가미 교야, 〈그에게는 쇼콜라와 비밀의 향이 풍긴다〉에서는 이모 도와코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속마음을 드러냈던 달콤쌉싸름한 30년 전 비밀을 품은 위스키 봉봉을 가지고 그 기억의 진실을 찾아가는 조카 히나키의 이야기를 그린다.

《달리기의 맛》에서 ‘달리며 요리하며,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그렇게 결승선으로 다가서는’ 청춘을 그린 누카가 미오. 〈양조학과의 우이치〉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사케 양조의 코하루가 부모 기대에 따라 어영부영 들어간 양조학과 기숙사 입사 첫날, 변화를 추구하는 양조의 육촌 우이치와 함께 보낸 농대의 풍경, 그 하루를, 정성스럽게 빚은 사케 맛처럼 상쾌하고 여운 있게 담는다.






양용기 건축가의 영화 속 건축물

양용기 저 / 17,000원 / 크레파스북

영화를 통해 만나는 세계의 다양한 건축물들,
건축이 품은 양식과 그 의미를 알게 된다면
영화를 또 다른 시각으로 감상하는 기회가 된다!
#1. 감독의 의도가 담겨 있는 영화 속 건축물,
건축물은 때로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영화 한 편을 감상할 때 어떤 부분에 가장 집중하는가. 만약 영화에 대해 재미있다라고 평가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면이 인상 깊었는지 물어보면 대답은 모두 제각각일 것이다. 같은 영화를 감상한 관객이지만 각자의 취향과 관심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품을 만든 감독은 이런 관객의 다양한 관심사를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관객이 잘 알아차리기 힘든 세세한 부분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속에 자신의 관심사가 등장하면 빠르게 인지한다. 그리고 그 부분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묘사되었는지 살펴보고 만족했다면 그 영화에 후한 점수를 줄 것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건축물에 시선이 꽂혔다. 저자의 관심사는 바로 건축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재료로 사용된 건축물을 보며 어떤 양식을 차용한 건물인지, 감독은 왜 그 건물을 이 영화에 끌여들였는지, 왜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세트를 제작해야 했는지 생각한다. 이 책은 저자가 온전히 영화 속에 등장한 건축물을 소개하기 위해 써내려간 ‘영화 속 건축 안내서’이다. 저자는 영화 속 다양한 요소들을 놓치지 않고 살펴본다면 이를 의도한 감독도 보람을 느낄 것이며 관객 또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진리는 여기에서도 사용된다. 건축물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자연 속에 인간적인 공간을 형성하면서 건축물은 인간과 함께 발달해 오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건축물을 창조물이라기보다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로 인식하고 있다. 건축물은 때로 보이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말이다.

#2. 영화의 주인공만큼 중요한 다채로운 풍경
영화를 통해 세계의 건축물을 여행하다

부유와 가난을 고스란히 드러낸 〈기생충〉은 감독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재미를 다 알 수 없는 영화다. 비루할 만큼 불편한 반지하의 집과 넓은 정원을 갖춘 대저택의 차이, 여기에 담긴 의도를 알게 된다면 감독과 더욱 교감할 수 있다. 빈부의 격차이자 신분의 차이를 담은 요소는 두 공간의 배치와 계단, 높낮이 등을 통해 나타난다. 영화 〈아이언맨〉에서는 하이테크한 기술을 담은 대저택을 구경할 수 있다. 영화 속 토니 스타크 하우스(Tony Stark’s House)는 월레스 E 커닝햄이라는 건축가가 디자인을 완성한 것으로, 이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주인공의 지위를 한눈에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도록 절벽에 놓인 이 저택은 외관 자체로 경이로울 정도지만 내부 공간의 설계 또한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다. 호화로움을 보여주는 장치로 토니 스타크 하우스의 등장만큼 최고의 선택은 없을 것이다.
우리 고유의 한옥집도 영화에 큰 역할을 해낸다. 바로 〈건축학 개론〉이다. 남녀 주인공이 함께 시간을 보냈던 한옥집은 영화의 배경으로 최고의 역할을 했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도시의 집들은 내부와 외부가 완벽하게 분리된 형태지만 중정식과 같은 울에 작은 마당을 두어 공동의 영역으로 사용하는 당시 서울의 일반적인 주거 형태를 가졌다. 이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오던 유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저자는 영화 속 건축물의 형태와 양식 등의 물리적인 요소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가족이 함께 사는 ‘우리 집’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집이란 바닥이 있고 벽으로 둘러쳐져 있으며 지붕이 얹혀 그 안에 생긴 공간을 말하지만, 저자는 행복한 집, 시끄러운 집, 사랑이 넘치는 집 등 가족의 보금자리로서의 집에 몰두한다. 우리 집은 어떤 집인가는 그곳에 사는 가족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영화 〈우리집〉은 부모님의 싸움으로 큰소리가 잦은 집과 생계로 인해 집을 비워 어린 자매만 살아가는 집이 등장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른이 생각하는 집과 아이가 인식하는 집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 책은 영화의 스토리, 멋진 배우들의 연기만큼 다채로운 풍경과 그 풍경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세계의 건축물을 알아가는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펜화로 읽는 사찰 1, 2
김유식 글/그림 / 20,000원 / 불교시대사

사찰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
아는 만큼 보인다.
전국에 유명한 관광지라 하면 사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우리 고유의 전통을 이어주는 사찰 문화에서 배우는 의식과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저자는 직접 스님들과의 대화를 글로 옮기고 눈에 들어오는 사찰 풍광을 그림으로 그렸다.
1권에는 이름 난 말사 23편을 싣고 삼보(불.법.승)사찰을 더해 26편을 소개하였고
2권은 23교구 본사를 싣고 아쉬움에 말사와 암자 4편을 보태어 27편을 소개하여 총 53개 사찰 136점을 그렸고 삽화 60여 점을 그렸다.

여행은 알고 다니면 아는 것이 보이고 느끼는 재미가 있어야 더욱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어디를 여행하더라도 알고 가는 것과 모르고 가서 보는 여행은 질적으로 다르다. 모르고 보면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아 후일에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소개하는 곳마다 상세하게 설명을 하였고 그림으로 표현을 해서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사찰마다 간직하고 있는 숨은 이야기들을 찾아보는 재미를 한껏 느끼게 한다.

사찰문화는 살아있는 우리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다.
각 사찰에 숨겨진 옛 이야기에 깃들어 있는 재미있는 전설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등사 처마 네 귀퉁이에 있는 여인을 왜 조각해 놓았는지.’ ‘부석사에 부석은 왜 생겼는지’ 등 각각 절들의 궁금증을 풀어 줄 이야기들이 가득 들어 있다.
전국의 수많은 사찰들이 있지만 지면의 한계로 1. 2권에 53개 사찰들을 먼저 소개하였다.
이어서 3.4.5. 권이 출간되어 더 많은 사찰들이 소개되기를 바라본다.
 


 
동경일일 1 · 2  (동시출간)
마츠모토 타이요 만화 / 이주향 역 / 각 11,000원 / 문학동네

확실한 것 하나 없는 시대라도, 동경의 나날은 계속된다
만화가들의 만화가, 마츠모토 타이요가 그리는 만화인의 삶, 애정, 철학.
대형 출판사의 중년 만화 편집자 ‘시오자와’. 그는 자신이 창간한 만화 잡지가 폐간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30년 넘게 일한 출판사를 그만둔다. 방대한 양의 장서도 전부 팔아버리고, 만화와 연을 끊을 작정이었던 시오자와. 눈앞에 놓인 만화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는, 고심 끝에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신만의 이상을 담은 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시오자와는 자신이 동경했던 만화가들을 찾아간다. 경비원, 마트 캐셔, 학습지 삽화가… 저마다의 사정으로 만화가를 그만둔 이들은 시오자와의 손에 이끌려 다시금 만화의 세계로 뛰어든다.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만화 산업. 그 성공가도에서 밀려나 사회의 저변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누군가에게는 세상 물정 모르는 선택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은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새로운 불씨를 틔워낸다. 도쿄 東京 하늘 아래 펼쳐지는 만화인의 하루하루, 그들의 만화를 향한 동경 憧憬의 나날은 고요히, 그러나 치열하게 흐른다.

봉준호부터 오다 에이치로까지, 예술가들을 사로잡은 작가
‘마츠모토 타이요’를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만화

“그렇지만요, 당신이 다시금 빛났으면 좋겠습니다. 만화로부터 도망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동경일일』은 마츠모토 타이요가 처음으로 그리는 ‘만화’에 대한 만화다. 데뷔 36년 차로 어느덧 만화계의 ‘대선배’가 되어버린 마츠모토 타이요. 작품 곳곳에는 그가 거쳐온 만화계의 정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성공을 갈망했지만, 막상 작품이 대박을 터뜨리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신인 만화가 ‘아오키’. 매너리즘에 빠져 만화를 그리는 일이 버겁기만 한 중견 만화가 ‘초사쿠’. 말썽쟁이 작가를 어르고 달래며 골머리를 앓는 젊은 편집자 ‘하야시’. 문하생 신분에 익숙해져 만화가의 꿈과 점점 멀어지는 어시스턴트 ‘쿠사카리’의 이야기까지. 저자는 질책도, 격려도 하지 않고 이들의 있는 그대로를 담담한 필치로 그린다. 그들이 계속해서 만화와 함께 걸어가기 바라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을 담아.
마츠모토 타이요는 『Sunny』 『핑퐁』 등 섬세하고 개성 있는 필치와 짜임새 있는 이야기, 독창적이고 흡입력 있는 연출로 정평이 나 있는 만화가다. 이로 인해 ‘만화가들의 만화가’라 불릴 정도로 수많은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기도 하다.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는 여러 차례 마츠모토 타이요에게 ‘천재’ 만화가라 존경을 표한 바 있고, 봉준호 감독 역시 한 인터뷰에서 그를 좋아하는 만화가로 언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마츠모토 타이요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는 만화 독자와 예술가를 막론하고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마츠모토 타이요의 후기 작품 중 대표작이라 부르기에 손색없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신작 『동경일일』. 본작에는 한층 원숙해진 그의 작품 세계와 창작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주의 만화가의 대표 주자로 회자되는 그의 창작관이 궁금한 이라면, 또 『철콘 근크리트』의 거칠고 메마른 세계가 어떻게 변모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이라면, 만화인을 향한 헌사와도 같은 이 작품을 손에 들어보기를 권한다.






불 마귀를 제압하라
서경원 저 / 21,600원 / 담디
 
우리 선조들은 주로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살았다. 목조건물은 화재에 가장 취약하다. 화마로 인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기 일쑤였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불의 재앙으로부터 집과 삶을 지켜내려 애썼다. 화재를 막아내려는 다양한 상징 체계들이 실제 문화재와 문헌 속에 들어있다. 이를 찾아내 그 의미를 되짚어보는 이야기다. 한국건축 속 불조심의 인문학이다.

1, 화마로부터 경복궁을 지키려 거든 먼저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하라
2023년 10월 15일, 광화문 현판이 교체되었다.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였던 현판이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글자로 바뀌었다. 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의 형태다. 〈경복궁 영건일기〉를 보면, 고종 2년인 1865년 10월 11일 저녁 8시경에 광화문 현판을 달았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경에 조선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광화문은 헐려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되었다. 실로 100여 년 만에 본래의 현판 모양으로 복원된 셈이다. 이번에는 문 앞의 월대까지 복원되었으니, 광화문은 거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각종 언론매체에 이 사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보도 내용을 두루 찾아보았다. 그런데 왜 광화문의 현판을 검은색으로 했는지에 대한 기사는 별로 없었다. 경복궁의 얼굴 격인 광화문 현판을 아무 개념 없이 제작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광화문 현판의 검은 바탕은 물의 상징이다. 한마디로 궁궐의 화재를 예방하려는 물의 의미다.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하려는 목적으로 음양오행에서 물의 색인 검은색을 선택한 것이다. 광화문을 발굴 조사하여 형태는 거의 복원하였지만, 내용은 이를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는지 좀 의문이 든다. 이 책을 펴낸 이유다.
목조건축물은 불에 취약하다. 우리 선조들은 화재에 가장 취약한 목조건물을 짓고 살면서 어떻게 든 불로부터 집을 지켜내려고 했다. 화재와의 눈물겨운 투쟁기다. 오죽했으면 불을 마귀에 빗대어 화마火魔라 칭했을까? 화재를 진압하는 직접적인 방법보다는 미리 예방하려는 상징적인 행위들이 주를 이룬다. 이런 화재 예방의 문화는 한국 사상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궁궐의 현판 하나를 제대로 검증하여 복원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우리 문화재에 담긴 이런 의미들을 제대로 알고, 스스로를 챙기자는 게 이 책의 주제다.
갑골문의 불 화火 자는 불이 타오르는 모양이다. 뾰족뾰족한 산의 모양을 닮았다. 산세가 험한 산을 그래서 예로부터 불로도 보았다. 더군다나 남쪽은 오행으로 불의 방위다. 경복궁에서 보면 전주작인 관악산은 바로 불이 활활 타오르는 불의 산이다. 언제든 궁궐에 화재를 불러일으킨다고 여겨 내내 걱정거리였다. 화마로부터 궁궐을 지켜내려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관악산의 화기를 제압해야 했다. 그래서 숭례문 현판도 세워서 달았다. 숭례문崇禮門의 숭崇 자 위에는 뫼 산山 자가 들어있다. 관악산처럼 불이 타오르는 형상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오상의 예禮 자는 남쪽인 불의 방위를 뜻한다. 곧 불의 상징이다. 세워진 숭례崇禮 두 자는 바로 불꽃 두 개가 위로 타오르는 염炎 자를 상징하고 있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 모습을 극대화하려고 숭례문의 현판을 의도적으로 세워 단 것이다. 이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아내려는 강력한 맞불 개념이다. 불로써 불을 막는 화극화의 상징 체계다. 관악산을 향하는 경복궁 모든 전각의 현판은 물의 색인 검은 바탕이다. 물로써 불을 제압하는 수극화의 상징이다. 또한 관악산 꼭대기에 6각형으로 못도 팠다. 숫자 6은 1과 함께 하도에서 물을 상징한다. 물로써 관악산의 화마를 현장에서 곧바로 제압하려는 상징적인 예방책이었다.
2001년 6월 경복궁 근정전 중수 공사 때, 상층 종도리 하단의 장여 중앙부에서 상량문과 함께 화재 예방을 위한 유물들도 발견되었다. 고종 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거의 모든 전각에 상량문과 화재를 예방하는 일종의 부적 같은 3점의 유물들도 함께 넣은 것이다. 순은으로 만든 6각형의 돈 5점, 이들 은제 육각판에는 모서리마다 한자로 물 수水 자가 6자씩 새겨져 있다. 용龍자 천 개로 만든 물 수水 자 2점, 먹으로 그린 용의 그림 1점이다. 모두 물을 상징하는 유물들이다. 물로써 불을 억눌러 제압하려는 상징 체계들이다. 물을 상징하는 부적 같은 유물을 건물의 가장 중요한 도리 부근에 넣었다. 이는 물로써 각 전각의 화마를 사전에 물리치려는 염원이다. 우리 선조들이 경복궁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상상 이상의 비보들을 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2, 화마를 막아 저지하는 진언
통도사는 매년 단오절에 소금단지를 차려 놓고 구룡지에서 용왕제를 지낸다. 이 소금단지들은 모든 사찰 전각의 처마 밑 사방 기둥머리에 올려진다. 소금은 바다를 상징하고 바다는 부처님의 진리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직접 동해 바닷물을 떠다 용왕제를 지내기도 했다. 물의 신 용왕님이 화마를 막아 물리쳐,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금당들을 지켜줄 거라는 믿음이다. 바로 대광명전의 평방에 붙어 있는 항화마진언抗火魔眞言이다.
“우리 집에 손님이 한 분 계시니
바로 바닷속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입에는 하늘을 삼킬 만한 큰물을 머금고 계시니
능히 불 마귀[火魔]를 막아 제압하실 분이다.
吾家有一客 定是海中人 口呑天漲水 能殺火精神”

3, 남산제일봉의 화기를 억눌러 제압하라.
화마로부터 해인사를 지켜내려면 불을 불러오는 남산제일봉의 화기를 억눌러야 했다. 이를 위해서 해인사에서는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째로 산의 이름을 바꿨다. 앞산의 불기운을 아예 땅속에 파묻어 버린다는 “매화산埋火山”으로 개명했다. 두 번째로는 대적광전을 중건할 때, 전각의 축을 불의 산인 남산제일봉을 피해 서쪽으로 틀어지었다. 세 번째로는 지금도 매년 단오절에 사찰 경내와 남산 꼭대기에 소금단지를 묻어 화기를 제압하는 방책을 세운다.
 





도덕적 해이
안나래, 김달, 스미마 그림/만화 / 12,000원 / 빗금
 
문제적 작가들이 그린 진짜 엄마, 진짜 여자, 진짜 사랑 이야기
나만 봐야 할 것 같은 은밀한 만화
안나래, 김달, 스미마 작가가 ‘도덕적 해이’라는 주제로 만났다. 비엘부터 중후한 19금 웹툰 〈미완결〉 등 장르를 오가며 어른용 이야기를 그려온 안나래 작가, 〈환관 제조일기〉 〈레이디 셜록〉과 같은 과감한 초기작에서 현재까지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블랙코미디를 그리는 김달 작가, 〈그녀의 사적인 날들〉 〈선생님의 은혜〉 등의 진성 성인웹툰으로 웃음과 꼴림을 동시에 선사하는 ‘성인만화가’ 스미마 작가. 이들에게 청탁한 단편 원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한번쯤 그려보고 싶었던 것, 혹은 그동안 그리고 싶었지만 못 그렸던 것을 그려주세요.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것으로요.’
그렇게 그려진 단편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새 만화 브랜드 ‘빗금’은 『도덕적 해이』를 시작으로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즐기고 싶은 만화를 선보이고자 한다. 독자의 확고한 취향과 창작자의 거침없는 발상을 존중하는 빗금의 목적은 오직 재미의 추구. 문제작들이 모인 이 첫 단편만화집은 홍조 띤 캐릭터의 뺨 위 빗금을 독자의 얼굴에도 띠울 것이다.

무엇도 거치지 않고 쏟아낸 이야기, 역린과 말초를 동시에 건드리다
좋은 만화와 나쁜 만화 사이에서 ‘빻았다’는 말을 재고하다

유쾌한 성인웹툰과 고약한 블랙코미디로 두터운 마니아 독자층을 형성한 안나래, 김달, 스미마 작가가 은밀한 주제로 만났다. 비엘부터 중후한 19금 웹툰 〈미완결〉 등 장르를 오가며 어른용 이야기를 그려온 안나래 작가, 〈환관 제조일기〉 〈레이디 셜록〉과 같은 과감한 초기작에서 현재까지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풍자극을 그리는 김달 작가, 〈그녀의 사적인 날들〉 〈선생님의 은혜〉 등의 진성 성인웹툰으로 웃음과 꼴림을 동시에 선사하는 ‘성인만화가’ 스미마 작가. 이들에게 청탁한 단편 원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한번쯤 그려보고 싶었던 것, 혹은 그동안 그리고 싶었지만 못 그렸던 것을 그려주세요. 무엇도 재지 말고, 도덕적으로 문제 있는 것으로요.’ 그렇게 그려져 모인 단편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그런 소재는 좀…’이라는 주변의 뜨악할 반응에 묵혀두었던 이야기, 상업성을 고려하느라 그리지 못했던 이야기 등, 무엇도 거치지 않고 쏟아낸 수작들이 모였다.
좋은 만화와 나쁜 만화를 가르고 후자를 ‘빻았다’고 이야기한다. 나쁜 만화와 빻은 만화는 같은 말일까. 빻았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빻았지만 재밌는, 빻아서 재밌는 세 작품은 그러한 질문을 가뿐히 넘어 독자들의 말초와 역린을 마구 건드린다. 나만 보고 싶고 나만 봐야 할 것 같은 만화가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열 명의 독자 대신 재미를 찾아 헤매는 한 명의 독자를 위한 새 만화 브랜드 ‘빗금’

새 만화 브랜드 빗금은 수많은 독자 대신 먹이를 찾듯 재미를 찾아 헤매는 독자를 모시고자 한다. 이들에게는 확고한 취향을 반영하는 만화들을 선사할 예정이며, 마찬가지로 창작자와는 본인의 취향과 거침없는 발상을 담은 작품을 함께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빗금의 목적은 오직 재미의 추구. 『도덕적 해이』를 시작으로, 일본만화로는 흡혈귀 소녀와 인간 여학생의 기묘한 사랑을 그린 GL×코믹×액션×학원로맨스 『뱀피어즈』가 빗금의 라인업을 이어간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즐기고 싶은 만화를 보고픈 독자들은 빗금의 귀추를 주목해보자. (빗금 SNS 계정 : https://twitter.com/bitgeum_comics)
 






프린키피아: 해설서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아이작 뉴턴 지음 / I. 버나드 코헨 해설 / 배지은 역 / 90,000원 / 승산
 
아이작 뉴턴은 1687년 출간한 기념비적인 저서인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즉 『프린키피아』에서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이끈 ‘시간’, ‘힘’, ‘운동의 원리’를 수학적인 용어로 설명했다. 사실상 과학과 종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지금처럼 학문이 세분화되기 이전인 17세기에 오직 수학적 원리로 세상의 체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뉴턴의 시도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3세기가 지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고 양자 혁명이 일어난 뒤인 오늘까지도 뉴턴의 물리학은 관측되는 세계의 수많은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라틴어로 쓰인 『프린키피아』는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중 영역본은 1729년 앤드류 모트(Andrew Motte) 판본에 근거하고 있었는데, 1999년 I. 버나드 코헨은 앤 휘트먼과 함께 공인된 3판을 새로 번역한 다음 해설서를 덧붙여서 한 권으로 된 완역본을 출간했다. 코헨이 근 3세기 만에 영어로 완역한 이 권위 있는 현대판은 뉴턴이 최종 승인한 1726년 판에 기반한다. 이전 판본에서 발췌한 내용을 포함했을 뿐 아니라 기존 번역의 오류를 수정하고, 고풍스러운 영어를 현대 산문체와 최신 수학적 형식으로 대체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도서출판 승산에서는 지난 2008년 제임스 글릭의 『아이작 뉴턴』을 시작으로 여러 책을 통해서 뉴턴을 직간접적으로 알리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그리고 본서에 이르러 뉴턴을 향한 여정의 작은 방점을 찍고자 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오늘날 우리에게 아이작 뉴턴은 거인을 넘어선 어떤 풍경이나 배경에 가깝다. 따라서 그 업적 전체를 단번에 눈에 담기는 쉽지 않으며, 버나드 코헨이라는 과학사의 선구 세대의 어깨에 올라타는 일이야말로 뉴턴을 곡해하지 않고 제대로 바라보는 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영역본을 기준으로 약 400페이지에 달하는 해설서가 덧붙여진 이 책을 통해 오늘날 독자들이 섬세하게 복원해낸 뉴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1678년 아이작 뉴턴이 출간한 『프린키피아』
그 구성과 간략한 역사, 그리고 오늘날 『프린키피아』의 가치

1678년 아이작 뉴턴은 과학사의 기틀을 세웠다고 일컬어지는 업적을 이룬다. 다름 아닌 『프린키피아』의 출간이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책은 초판 출간 이후 1713년에 개정판이, 그리고 뉴턴이 죽기 1년 전인 1726년에 최종 3판이 출간되었다. 초판 서문에서 보듯 『프린키피아』의 주제는 이론 역학(rational mechanics)이며, 이후 라이프니츠가 동역학(dynamics)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책의 주요한 첫 번째 개념이 ‘힘’이기 때문이다. 뉴턴은 다양한 힘과 그 힘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유형의 운동을 연구하고자 했으며 궁극적으로 앞선 연구를 “세계의 체계”, 즉 천체 운동에 적용하고자 했다. 자연히 책도 3권으로 구성되어 뉴턴의 사고과정을 잘 보여주도록 구조화되었음을 오늘날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먼저 1권에서 자유 공간 즉 마찰이 전혀 없는 공간에서 힘과 운동을 다루고, 2권에서 논의를 확장하여 저항이 있는 매질 안의 운동과 진자 운동, 파동, 소용돌이 물리학을 다룬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3권에서 1권과 2권의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세상의 체계를 다룬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린키피아』는 에드먼드 핼리의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1684년 여름, 천문학자 핼리와 크리스토퍼 렌, 그리고 로버트 후크는 거리 제곱에 반비례하는 힘이 만들어내는 행성 궤도를 구하는 문제로 고심 중이었다. 당시 뉴턴은 그 답이 타원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전해 들은 핼리는 뉴턴에게 연구 내용을 책으로 써 달라고 간청했다. 그렇게 『운동에 관하여(De Motu)』라는 소책자가 탄생하였는데 이는 후일 『프린키피아』라는 최종 결과물의 초석이 된다. 뉴턴은 초기 단계에서 책 두 권 분량을 구상했지만 “경험적 기반의 수리 과학을 토대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구상은 몇 배나 확장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서 집필되었다고 인정한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원제에서부터 이미 데카르트의 저서인 『철학의 원리(Principia Philosophiae)』가 연상된다. 다만 제목에서 뉴턴은 자신의 원리가 수학적임을 한정하고 있다. 일례로 본문에서 뉴턴은 데카르트의 표현을 사용하는 등 그 영향을 드러내지만 근원적으로 데카르트의 소용돌이 이론이 케플러의 법칙과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이렇게 한 시대의 성취는 이전 시대를 계승함과 동시에 반박하며 반박함으로써 계승한다는 진리에 복속한다.

1729년 모트 판본 이후 근 3세기 만에 완역한 권위 있는 영역본, 거기에 더한 해설서
버나드 코헨의 어깨에 올라타서 『프린키피아』를 바라보다

『프린키피아』는 그동안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영역본으로는 앤드류 모트가 1729년에 출간한 번역이 지난 세기 후반까지도 사실상 유일한 완역본이었다. 모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으나, 그레셤 칼리지의 강사이자 수학자로서 뉴턴 역학의 기본을 알았으며 솜씨 좋은 제도사이자 판화가였다고 한다. 이후 로버트 소프와 헨리 펨버튼 같은 인물들이 번역을 시도했지만 완역에 이르지 못했고, 1934년에 이르러 플로리안 캐조리를 필두로 모트 판본의 개정이 이뤄졌다. 모트 판본의 위치는 그만큼 공고했다. 코헨도 썼듯, 모트의 영역본은 “모험적인 기획의 결과물”이며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는 같은 노력을 해본 사람”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트의 번역은 예스러운 문체와 이따금 익숙하지 않은 표현들이 사용되었던 터라 뉴턴의 라틴어 원전만큼이나 모호해서 독자들의 접근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일부 내용은 최종 공인된 3판이 아니라 2판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트-캐조리 개정판은 몇몇 부분에서 라틴어 원전을 참조하지 않은 탓에 오류를 답습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모트의 문장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모트의 번역뿐 아니라 뉴턴의 사고까지 현대화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뉴턴의 목소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이에 과학사의 선구 세대이자 뉴턴 연구가였던 I. 버나드 코헨은 앤 휘트먼을 비롯한 동료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번역에 착수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1999년 공인된 라틴어 3판에 근거한 『프린키피아』의 완역본이 출간된다. 모트 판본의 최초 출간 이후 근 3세기 만에 이룬 결과였다. 코헨의 업적은 번역에 그치지 않았다. 『프린키피아』 앞쪽에 직접 집필한 해설서도 덧붙였는데 이는 영역본 기준으로 약 400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해설서에서는 『프린키피아』의 유구한 번역사를 소개한 다음 새 번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뉴턴의 라틴어 원전이 개정을 거듭하면서 발전시켜 온 생각의 궤도를 추적하는 한편, 오늘날 『프린키피아』가 가지는 현대적 의의를 상술했다. 또한 이전 판본에서 발췌한 내용을 꼼꼼히 주석으로 수록함으로써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코헨은 이 과정에서 단순히 “뉴턴이 쓴 글을 번역”하기보다 “뉴턴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애썼다고 전한다. 애당초 목표한 대로 『프린키피아』의 문체와 형태를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옛 말투나 고어는 최대한 지양하고, 지난 300년 가까이 영어권 독자들에게 표준으로 자리했던 모트 판본과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번역문 상당수를 모트의 번역본과 일치시켰다. 뉴턴이 자기 시대에서 얻어낸 지식을 바탕으로 『프린키피아』에서 자신의 연구와 사상을 한데 모았다면, 코헨 또한 동시대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모트 판본이라는 연속된 흐름의 연장선에서 완역을 이룬 셈이다.

쓴 것과 쓰지 않은 것 사이에서
아이작 뉴턴이라는 한 시대의 인물을 섬세하게 복원하다


20세기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 유명한 ‘논고’의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기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기 작품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본문에서 제시한 부분과 자신이 쓰지 않은 부분이 그것인데, 쓰지 않은 후자 쪽이 중요하다고. 어쩌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버나드 코헨은 뉴턴이 『프린키피아』가 개정을 거듭하며 끊임없이 수정되었음을 밝히고, 마지막 3판에서 여러 이유로 빠졌거나 달라진 부분, 뉴턴이 썼지만 싣지 않은 부분을 수록하여 뉴턴의 원의를 훼손하지 않고 당시의 그것에 가깝게 복원하고자 했다. 아마 독자들은 특정 단락을 읽으면서 냉철한 이성과 합리로 무장한 현대 과학자의 원형으로서 면모를 발견하기보다 간혹 신실한 종교인이나 연금술에 심취한 학자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주목할 점은 뉴턴이 소위 “뉴턴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자신만의 독창성을 발휘하여 마지막 순간에 “오늘날 우리가 비과학적이라고 여기는 주제”들에 관하여 “고민했던 흔적을 완벽하게 제거”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라도 자기 시대의 한계와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뉴턴처럼 걸출한 인물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을 두고 그가 자기 시대를 초월했다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한 인물을 단순 영웅으로 묘사하고 휘광을 덧씌움으로써 제대로 다루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본서는 천재로서 뉴턴의 면모를 새삼 조명하기보다, 종교와 과학의 경계가 모호하던 시대에 뉴턴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과정에 왜 수학적 기술에 천착하였는지 함께 연구하고 탐구하기 위함이다. 독자들은 버나드 코헨의 상세한 해설서와 정교하게 복원된 『프린키피아』를 읽으면서 17세기 뉴턴에게서 당대 학자의 고민과 굴곡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버나드 코헨은 뉴턴을 정확히 번역하기 위해서 여러 판본을 참고했고, 그 해설을 쓰기 위해 많은 논문과 책, 뉴턴이 주고받은 서신을 참조했으며, 여러 동료에게 의견을 구했다. 해설서 10장에 초반부에서 코헨이 읽기를 권하는 참고서적의 목록을 보면, 코헨 본인도 이 한 권으로 뉴턴을 모두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본서는 뉴턴의 사상과 연구를 한 권으로 끝내기 위한 결정판이 아니다. 뉴턴과 그의 시대를 둘러싼,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방대한 물리 세계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다. 이로써 오늘날 독자들은 버나드 코헨이라는 걸출한 과학사가의 어깨를 빌려서 섬세하게 복원한 뉴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비대칭 인간

이은정 저 17,000원 / 득수

전망이 아닌 희망의 서사

이은정의 「비대칭 인간」은 밀실과 광장이라는 소설적 배경에 대한 시대적ㆍ문학사적 흐름 속에서 전망이 아닌 희망의 방식으로 삶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독특한 작품집이다. 이는 한국소설 독자들이 거의 받아본 적 없는 ‘희망의 정언명령’이라는 근사한 선물을 가득 안겨주고 있다. 이 때의 희망은 밀실과 광장의 변증법을 거쳐, 우리에게 다가온 선물이라는 점에서 한층 뜻깊게 다가온다.

이은정의 「비대칭 인간」은 한국문학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소설의 역능을 떠올리게 하는 문제작이다. 그것은 바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소설의 윤리적 기능과 연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이 창공의 별이 사라진 시대의 서사시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근대의 산물인 소설은 고독한 밀실에 갇힌 개인이 쓰고, 또 다른 밀실에서 그것을 읽는 개인에 의해 유지되는 예술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밀실의 고독을 뛰어넘어 언제든지 광장을 지향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충동은 함께 바라보고 의지하는 ‘창공의 별’을 향한 지향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그 지향은 삶의 방향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소설은 광장 지향성과 밀실 지향성의 변증법을 통해 전개되는 예술 장르인 것이다.

「유령 가족」은 끔찍한 가족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로서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악인이라기보다는 정신병자에가까운 사람들이다. …… ‘나’는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는 게 삶의 목표였지만, 그리해서 피나는 노력으로 학력과 커리어를 쌓아나갔지만, 그것들은“내가 갖지 못한 배경에 가려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것이 삐까번쩍한 하와이의 유령 가족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령 가족은 현대인의 필수적인 덕목으로까지 그려진다.

「엄마 같은 말」은 피를 나눈 진짜 가족이 얼마나 따뜻하고 끈끈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 결국 옥자 씨는 수진에게, 자식은 자신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가라는, 역시나“엄마 같은 말”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옥자 씨 수혁으로부터 받은 천만 원이 든 봉투까지 수진에게 건넨다. 작품은 집으로 돌아온 옥자 씨가, 자신의 다음 학기 강좌가 폐강됐다는 문자메시지를 받고도 손주들을 정성껏 돌보는 것으로 끝난다. 「유령 가족」의 정신병자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은 「엄마 같은 말」의 옥자 씨가 엄연한 지배인으로 군림하는 진짜 가족의 따뜻함을 더욱 부각시킨다고 할 수 있다.

「입금하는 사람」의‘나’는 시간제 알바생으로서 고향을 떠나 서울의 작은 원룸‘해피하우스’에서 살아간다. 생존 자체가 삶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자 유일한 목표인‘내’가 관심을 가지는 단 한 가지는, 벽의 곰팡이를 제거하는 것이다. …… 이 지지리 궁상의 풍경에는 어떠한 전망도 없다. 오히려 정의감에 불타던 청년은 자신이 마주한“벽”에 좌절하여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만다.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그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내’가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이 절망의 자리는 참으로 투명하여 담담하기까지하다. 어쩌면 이은정은 때묻은 희망보다는 투명한 절망으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고, 가만히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침대는 잘못이 없었다」의 주인공 화영은“논두렁에 네 다리가 얽매인 소처럼 손발 아끼지 않고 살아도 겨우 학교를 졸업하고 운 좋으면 겨우 취직할 수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이십대”여성이다. …… 102호 여자는 진짜 성자였던 것일까? 102호 여자와의 만남이 있은 이후, 축복과도 같은 일들이 화영에게 밀려들어 온다. 결별을 선언했던 태호는 화영의 집에 다시 찾아와서 복음을 들려주는 것이다. 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졸업할 때까지 누나와 함께 살던 집을 혼자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태호는 화영에게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는 제안까지 한다. 화영은“자신의 인생에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은 없었다”라며, 힘차게 웃으며 작품은 끝난다.

표제작이기도 한「비대칭 인간」은 무척이나 사변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나’는 이십 대 취준생으로서 선글라스를 끼면 자꾸 어긋나고 삐뚤어지는 증상을 겪는다. 이것은 너무나 미세한 증상이어서‘나’만 민감하게 느낀다고도 볼 수 있는 정도이다. …… 수오가‘나’에게 던지는 “너는 그냥 너의 모든 것이야!”라는 말은‘적당한 거리’라는 삶의 지혜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한 긍정과 사소하지만 구체적 실천을 통해 비대칭은 대칭으로 변모될 가능성이 비로소 개시되는 것이다. 「비대칭 인간」에서 제시된 삶의 방향성은 이은정이 제안하는 한국 소설의 방향성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소란」은 십오 년 전에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어버린 소란이 파주에 사는 수진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진은 조그만 집에서 대필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소란의 삶에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겪은 불행한 삶이 그대로 압축되어 있다. …… “인생은 너무나 제각각이라서 타인의 인생을 함부로 예상하고 규정하는 것은 무례하거나 바보 같은 일이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에는“자신은 거의 모든 삶의 피해자이고 타인은 대체로 삶의 가해자라는 피해의식 속에서 우린 그토록 이기적인 것이된다”라는 아포리즘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희망의 정언명령’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눈이 와요」는 예외적인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은 눈 내리는 겨울밤의 포장마차를 무대로 하여 펼쳐지는 한 편의 연극과 같은 작품이다. …… .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아를 응징하는 이 낭만적인 살해의 방식은 그 악마적 인간성마저 순백의 아름다움 속에 파묻어버리는 미학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현실의 미학화는 때로 아름답지만 이토록 치명적이기도 한 것이다.

문학사에서 개인이 문제되는 것은 특정한 역사철학적 상황에서이다. 특정한 이념이나 담론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개인의 존재방식은 문제되지 않는다. 권위적인 대타자의 가장 큰 역할은 총체성의 우주 속에 개별 인간들의 자리를 배치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문제는 그 주어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개별 주체의 신의나 능력에 대한 것이지, 존재방식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그러나 상징계적 효력이 소멸하고 대타자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삶의 주체로서의 개인이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 다시 개인의 가치지향을 묻는다면, 그것은 개별적 존재자의 삶에 대한 성찰인 동시에 새로운 공동체의 전망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은정의 「비대칭 인간」은 이러한 시대적ㆍ문학사적 흐름 속에서 전망이 아닌 희망의 방식으로 삶의 가능성을 질문하는 독특한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해설 ‘전망이 아닌 희망의 서사(이경재 문학평론가)’에서
 






신시아 오직 저 / 오숙은 역 / 10,000원 / 문학과지성사

반복되는 역사, 끝나지 않은 비극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돌아보는 인간 조건의 무게

“「숄」「로사」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해준다.
그것은 홀로코스트의 공포와 그로 인한 채울 수 없는 공허감이다.”
‘오헨리 상’ 최다 수상 작가 신시아 오직의 대표작 『숄』, 국내 초역!

“최근 떠오른 미국 최고의 작가.” _『뉴욕 타임스 북 리뷰』
“눈부시고도 충격적! 페이지마다 슬픔과 진실이 가득하다.” _『시카고 트리뷴』
“단편과 중편이 한데 묶여 매우 가슴 아프고 아름답게 주조된 결과물이 나왔다.” _해럴드 블룸

『안네의 일기』『이것이 인간인가』『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등의 작품들과 더불어 홀로코스트 문학의 필독서이자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한 신시아 오직의 대표작 『숄』(오숙은 옮김)이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의 전쟁이 연일 계속되며 이들 전쟁의 비극적 참상이 지금 이 시각에도 시시각각 우리에게 전해지는 오늘, 홀로코스트라는 역사 속 참혹한 사건을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비극에 닥쳐 인간의 존재 의미, 인간 조건의 무게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이 책에 실린 「숄」과 「로사」는 1980년과 1983년 『뉴요커』지에 각각 발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작품 모두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어지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오헨리 상을 수상(1981년과 1984년)했으며, 나중에 한 권으로 묶여 소설집 『숄』로 나오면서 각각의 울림과 무게를 더욱 증폭시켰다.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단편 「숄」은 엽편소설에 가까울 만큼 매우 짧지만 그만큼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특이하게도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임에도 ‘나치’나 ‘수용소’ 같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그 대신 ‘코트에 꿰매어 단 별’이라든가 ‘아리아인’ 같은 단어에서 이 작품이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행렬과 수용소에서의 참혹한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시적인 문체로 간결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묘파되고 있는 사건은 그 자체로 오래 기억되고 또 널리 회자되어야 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뒤이어 이어지는 작품 「로사」는 「숄」의 배경이 된 시대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후를 다루는 일종의 후일담으로, 「숄」이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에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 비대칭성이 오히려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요인이 된다.
 
「숄」에서 폴란드 출신 유대인 로사 루블린은 강제수용소 경비병이 어린 딸을 살해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30여 년 후 그녀는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한 호텔에서 “미친 여자이자 과거의 쓰레기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 두 작품에는 ‘숄’이 있다. 그것은 굶주린 어린아이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숄, 뜻하지 않게 그 아이를 파멸시키는 숄, 나아가 마법처럼 그 아이를 되살리는 숄이다.

“댁의 삶이 없다고?”
“도둑들이 빼앗아갔어요.”


작가 신시아 오직은 유대계 미국인으로 유대인들의 삶의 경험, 홀로코스트와 그 여파 등을 다룬 작품과 에세이, 비평을 발표하며 크게 주목받아왔다. 『뉴욕 타임스』 등 주요 언론이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라 찬사를 보냈으며, “브롱크스의 에밀리 디킨슨” “이 시대의 가장 우아한 문학 스타일리스트”로도 불린다. 특히 “미국 단편소설의 대가”로 손꼽히는데 최고의 단편소설에 주어지는 ‘오헨리 상’의 최다 수상자(총 4회)이자, 2000년에는 에세이 『언쟁과 곤경』으로 전미 도서 비평가협회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홀로코스트 문학의 경우 대체로 아우슈비츠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거나 유럽 작가 및 지식인의 작품이 주로 소개되고 읽혀온 데 반해 신시아 오직은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전쟁의 광기를 직접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생존자 중 상당수가 이후 미국에서 생을 꾸려간 사실을 감안하면, 미국 작가의 증언 문학 역시 조명하고 음미해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할 수 있다. 게다가 「숄」을 읽은 어느 정신과 의사가 이 작품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 믿고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는 이야기는, 오직의 이 작품이 얼마나 강렬하고 생생한지를 말해준다. 창작이 기록 못지않은 진실성과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실제로 이 작품은 발표 이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숄」에서 폴란드 출신 유대인 로사는 어린 딸 마그다를 품에 안은 채 열네 살 조카 스텔라와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는 중이다. 극심한 배고픔으로 인해 몸이 너무나 가벼워진 나머지, 그들은 마치 공기 중을 떠다니듯 걷고 있다. 잠깐이라도 행렬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로사에게는 마그다를 빼돌릴 방도가 없었다. 젊은 엄마 로사는 수용소에서 딸 마그다를 숄로 감싸 숨기고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는데, 다행히 아이는 엄마의 젖 대신 숄을 얌전히 입에 문 채 쉼 없이 빨았고 그 덕분에 울거나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카 스텔라가 추위를 이기지 못해 숄을 가져가는 바람에 마그다는 죽음을 맞이한다. “추웠어요.” 스텔라의 대답이었다.
「숄」이 이처럼 뼛속까지 추운 지옥에서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로사」는 온몸이 튀겨질 정도로 뜨거운 지옥(“플로리다, 왜 플로리다였을까? 왜냐하면 여기 사람들은 이미 태양에 튀겨져, 그녀처럼 껍데기였기 때문이다”)을 배경으로 한다.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로사와 스텔라는 미국으로 이주하지만, 미국 생활에 적응하고 새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스텔라와는 달리 로사는 도무지 적응하지 못한다. 여전히 마그다가 살아 있다고 믿는 로사는 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스텔라의 속물성을 비난한다. 하지만 로사는 미국에서의 삶이 조카의 도움 덕분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과거와 단절하고 미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는 스텔라와 달리, 로사의 시간은 여전히 ‘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그녀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에게 시간은 지금도 진행 중인 홀로코스트의 시간뿐이다. “‘그’ 이전은 꿈이에요. ‘그’ 이후는 농담이고. 오직 진행 중인 것만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걸 삶이라 부르는 건 거짓말이에요”라는 로사의 말처럼, 그녀의 삶은 송두리째 도둑맞았다.
우리가 지금, 다시 홀로코스트의 역사적 진실을 읽고 기억하고 새삼 돌이켜보는 것은 단순히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정하고 비난하거나 피해자에게 현재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의 참혹한 비극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빼앗고 망가뜨리고 파괴하는지, 그 처절한 고통을 인간의 차원으로 보편화하면서 우리가 이 비극의 역사를 진정으로 반성하고 극복하는 길을 모색하게끔 한다.







전자적 숲; 더 멀리 도망치기

이미상 , 김연수 , 한유주 , 안미린 , 이제니 , 임솔아 , 김리윤 , 박세미 , 서이제 , 손보미 , 위수정 , 강성은 , 송승언 저 17,000원 /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사×국립현대미술관
“갑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도망치고 싶었다.”

탐닉의 시대, 평정을 얻기 위해 스스로
전자적 숲에 들어서는 현대인의 초상

#피로 사회 #우울 사회 #마음 챙김
#명상에서 칠 아웃 #전자 명상 #유튜브에서 명상
현대 사회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곤 한다. 피로 사회, 성과 사회, 과잉 사회, 하이텐션 사회…… 각 명칭이 짚고 있는 문제는 조금씩 다르지만 이 모든 면면이 삶의 가속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과연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언제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시·소설 앤솔러지 『전자적 숲; 더 멀리 도망치기』는 고도의 경쟁을 독려하는 동시에 정신 건강을 위한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는 기묘한 현실 속에서 마음 챙김을 부추기는 사회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전자적 숲’은 과잉 자극에 맞서 휴식을 취할 때조차 전자 매체와 온라인 플랫폼에 둘러싸인 환경을 의미한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숲속 한가운데서 요가 자세를 취하거나 명상에 빠져들 수 있다. ‘불면증에 좋은 숲 소리 ASMR’ ‘내 인생을 바꾸는 100일 마음 챙김’ ‘누워서 하는 10분 명상’ 따위의 플레이리스트는 터치 몇 번 만에 정제된 자연의 소리를 귓가에 재생시키고, 유명한 심리상담자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세계적인 구루까지 눈앞에 데려다준다.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에 따르면, 한국인 세네 명 중 한 명이 정신 건강 문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통계는 전자적 숲으로 도망치는 현대인의 삶이 여전히 행복하거나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전자적 숲; 더 멀리 도망치기』는 멀리, 더 멀리의 어딘가를 꿈꾸는 시대, 동시대 감수성을 기민하게 포착하고 발명해온 작가 13인의 글을 선보인다. 피로 사회, 우울 사회, 전자 명상, 칠 아웃 등의 키워드에서 출발한 6편의 시와 7편의 소설을 3부로 나누어 엮었다. 이 책은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23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2023년 5월 26일~2024년 2월 25일)과 연계한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여러분은 편안함에 이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그 노력은 괜찮은 시도였나요?”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이 책은 그에 대한 13편의 문학적 응답이다.


1부 로사르믹제─이미상 임솔아 김리윤 박세미
‘로사르믹제’는 티베트어로 ‘새로운 마음의 눈을 여는 말씀’을 뜻한다. 주어진 ‘퀘스트’를 완수하듯 살아가는 일상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하는 ‘말씀’이 어떠한 환상에서 비롯한 건 아닌지, 심리상담이나 명상이 진정한 위안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묻는 작품을 담았다.
1부에 수록된 두 편의 소설에는 잠들지 못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미상의 「상담방랑자」에서 ‘나’는 상담과 명상, 동료 ‘환자’와의 만남을 거치며 정신 건강의 거처를 찾아다닌다. 소설은 ‘고백-저항-수용-확장’의 빤한 사이클을 순환하다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환자’의 고백과 함께 다시 시작된다. 임솔아의 「퀘스트」에는 캠핑을 떠나는 네 친구가 있다. 이들은 “무슨 얘기라도 좋으니 아무 얘기나 계속 들려달라고” 부탁하고, 캠핑장에서도 “어떤 얘기라도 나눠야 할 것 같”은 불안을 느낀다. 눈을 감지 못하는 이들에겐 쏟아지는 걱정을 소화시키기 위한 고백 또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어지는 두 편의 시 중 김리윤의 「조명하지 않는 빛」은 눈을 감아도 언제나 환한 방에 있는 인물들을 그린다. 끊임없이 고해상도의 디테일을 바라봐야 하는 피로 속에서, 보기를 중단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기보다 끝까지 봄으로써 얻게 되는 새로운 동력을 상상한다. 박세미의 「아사나를 향하여」는 “따라 하다,라는 수행이 난무”하는 시대에 무엇이든 너무 쉽게 이뤄지는 화면 속의 세계까지 신체의 일부로 감각한다. 눈빛의 단순성 끝에 따라오는 고요하고도 고유한 합일의 세계를 기다린다.

2부 소진된 인간─서이제 손보미 위수정 강성은 송승언
‘소진된 인간’은 들뢰즈의 에세이에서 따온 제목이다. 들뢰즈에게 ‘피로’가 무언가를 실현할 수 없는 상태라면, ‘소진’은 더 이상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이 책의 바탕이 된 전시 제목 〈전자적 숲; 소진된 인간〉이 ‘Meditation on Youtube(유튜브에서 명상)’로 번역되었듯, 2부의 인물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가능성을 무화시키기 위해 ‘유튜브’라는 거대 플랫폼으로 상징화된 유희에 천착한다.
서이제의 「더 멀리 도망치기」에서 ‘나’는 폭력적인 인물 ‘종’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유튜브 쇼츠 영상을 밤새 재생한다. 이 소설에서 ‘쇼츠 감상’은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목적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동물의 정형행동에 비유된다. 손보미의 「빚」과 위수정의 「제인의 허밍」은 인기 유튜버와 그들의 ‘친구’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빚」의 ‘그녀’는 유튜브 채널명 ‘하나의 완전한 삶’과 다를 바 없는 옛 친구의 모습이 자신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우월감을 느낀다. 반면, 「제인의 허밍」에서 유튜버로 활동 중인 ‘한나’는 영상 속의 자신이 친구 ‘규희’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식한다. 두 소설의 초점 화자는 다르지만, 각 작품에서 ‘그녀’와 ‘규희’의 존재는 마치 카메라를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렌즈’가 되어 유튜브 프레임 속의 공간을 재프레임화한다.
세 작품에 등장하는 ‘소진된 인간’의 초상은 다음 두 편의 시를 통해 모든 것이 소진된 이후 찾아올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간다. 강성은의 「미니멀라이프」에서 인간조차 제거된 무인無人세계의 ‘나’가 “비로소 숨을 쉬”게 되자 “손톱과 모발이 무섭게 자”라는 장면은 송승언의 시에서 “주어진 삶을 끝까지 누리”며 “우리의 세상을 위해서 죽어갑시다” 하고 촉구하는 대목과 궤를 같이한다. 송승언의 작품은 「영원의 고향 같은 숲, 옛 친구, 그리고 음률이 붙지 못할 다크 포크Dark Folk를 위한 몇 편의 짧은 시」라는 긴 제목 아래 여섯 편의 작은 시를 묶었다.

3부 어두운 곳에서 홀로─김연수 한유주 안미린 이제니
3부의 제목은 ‘어두운 곳에서 홀로’이다. 모든 것이 소진된 공간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명상(冥想)’의 사전적 의미는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이다.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볼지는 오로지 관객의 선택에 달려 있다.
김연수의 SF소설 「신의 마음 아래에서」는 ‘명상’의 거리 두기 방식을 차용해, 몸과 분리된 ‘인공마음’ 개념을 만들어낸다. 밤하늘에 오로라가 관측된 후로, 피해자의 치료를 돕기 위해 복원된 범죄자의 마음이 초기화된다. 그 마음을 찾아내고 제거하려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타인의 행동과 결부될 때 이뤄지는 연대의 방식을 강구한다. 한유주의 「작별하는 각별한 사람들」은 새벽녘의 어스름한 풍경 속에서 저도 모르게 만나고 스치고 그리하여 영원히 작별하는 인물들을 그린다. 정처 없이 흐르는 시선으로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듯 살아가는 우리 곁의 평범한 이들을 좇는다.
3부를 맺는 두 편의 시는 어두울 때 더욱 선명해지는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그린다. 안미린의 「첫눈의 미래」에서 화자는 “불을 켜지 않”고 “생일을 기다”린다. 암흑 속에서 하얀 케이크 위에 서 있는 촛불의 이미지는 “어둠에 매설된 작고 우주적인 빛”처럼 다가오는 미래를 예감한다. 한편, 이제니의 「맑은 물은 맑은 물을 만진다」는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반복되고 변주되는 문장들 속에서 ‘나’와 내 안에서 태어난 타자들이 무한히 서로를 되비추는 모습은 모든 것이 ‘나’에서 출발한다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리란 감각으로 이어진다.





추월의 방정식

윤석진 저 17,000원 /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또 다른 추월의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과거의 해법이 ‘추격’이었다면,
지금의 해결책은 ‘선도’다.”
과학 연구 25년, 연구개발 경영 10년
윤석진이 현장에서 찾은 한국 과학기술 혁신의 전략

내게 이 책은 앞으로 펼쳐질 한국 공공 연구개발 혁신의 마중물 같은 느낌이다. 선도형 과학기술 리더십이 왜 필요한지, 어떤 리더십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깊은 고민은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는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줄 것이다. 이 책이 대한민국 과학기술 혁신의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한다. _최정우(포스코홀딩스 회장)

이 책은 과학도이자 연구자, 경영자로서 한국의 과학, 나아가 사회 발전을 위해 고뇌한 저자의 살아 있는 증언이다. “배는 산으로도 가야 한다”며 두려움 없는 도전의 필요성을 역설할 뿐만 아니라, 지난 35년 동안의 불타오르는 정열, 개방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책임감을 가감 없이 담고 있다. 많은 후학에게 미래 준비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_문길주(홍릉포럼 이사장)

과학 연구 25년, 연구개발 경영 10년. 연구자이자 경영자로서 한국 과학기술계의 기반을 단단하게 다져온 제25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원장 윤석진의 『추월의 방정식』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 윤석진은 자신의 35년 현장 경험을 바탕 삼아 제도와 정책 차원에서 한국 과학기술계의 성과와 한계를 짚고, 향후 나아가야 할 미래 방향으로 ‘선도형 과학기술’을 제시하면서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탐문한다.
1966년 출범한 KIST는 한국 최초의 정부 출연 연구기관으로서, 16개 전문 출연 연구소의 모태가 되는 등 한국 과학기술 인력의 저수조 역할을 해왔다. 이곳에서 저자 윤석진은 2000년대 초 세계 최초로 초소형 선형 모터를 개발하고 상용화에 성공해 연구자로서 한국 연구개발의 역할모델을 새로 쓴 한편, 2020년부터는 KIST 원장으로서 연구소의 혁신을 진두지휘했다. 그런 그가 현장에서 절감한 것은 위기의식이다. 우선 한국을 둘러싼 상황이 심상치 않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한국은 미국과 일본, 유럽의 견제를 물리치는 동시에, 이미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기술 수준이 한국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중국의 추격을 따돌려야 한다. 그런가 하면 생산연령인구의 감소와 ‘챗GPT’로 대표되는 새로운 산업 질서의 개편까지 예고되고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노동력과 토지, 자본 등의 생산요소를 투입해 선진국의 기술 수준을 뒤쫓는 요소 주도 성장은 더 이상 한국에 유효하지 않다고 저자 윤석진은 진단한다. 이제는 문제를 이해하고 구조화해, 연구개발 주제를 스스로 정의하는 역량이 요구되는 때라는 것이다.
과거 한국이 추격하던 시기에는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추월의 방정식’에 걸맞은 답은, ‘배가 산으로 가는’ 의도된 비효율성까지 용납하는 데 있다. 세상에 없었던 혁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회의 필요를 현장에서 날카롭게 포착하고 성과를 내려면 오랜 기간 숙성한 다양한 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책은 저자 윤석진이 한국 연구개발 현장의 최전선에서 증명해 보인 실효성 있는 제도와 정책을 한국 과학기술계, 나아가 한국 사회에도 적용해보자고 제언한다. 여기에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 등 과학기술계 오피니언 리더 4인의 인터뷰를 덧붙여 책의 논의를 더욱 풍성하게 갖춘 것은 물론, 혁신을 위한 이들의 진지한 고민과 날카로운 제언을 함께 나눈다. “선진국에서 이미 하고 있어 실패할 확률이 낮음을 입증한 연구만 이른바 벤치마킹한다며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최재천)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문제의식은 하나로 수렴한다.

한국이 최고 기술 보유국이 되는 꿈

“변화를 위한 첫걸음은 다시 한번 우리 연구자들에게 지금의 무모하지만, 미래의 탁월한 도전을 허락하는 일이다. 새로운 지평을 열 길은 제한 없는 아이디어와 이에 대한 지원이다.”(98쪽)

재임 기간 동안 선도형 과학기술의 실험실을 구축하기 위한 저자의 미래 실행 전략은 KIST에서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2021년에는 S등급부터 D등급까지 5단계 줄 세우기식 평가를 과감하게 개편해, S등급과 A등급의 2단계 평가를 도입했다. 한국의 국가 연구개발 사업 성공률 98퍼센트가 나타내듯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해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안정적 연구 관행에서 벗어나, 장기적이면서도 도전적인 연구를 장려한 것이다. 그 결과는 영향력 있는 학술지에 발표되는 초수월성 연구 성과가 1년 사이에 20건에서 40건으로 증가하는 질적 향상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초고난도 연구에 과감히 도전하도록 ‘그랜드 챌린지’ 사업을 운영하며, 사회 난제를 해결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 윤석진이 특별히 주목하는 점은 선도형 과학기술의 연구 주체로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역할이다. “개발도상국에 최고 수준의 연구 시설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불식시키듯 KIST는 600조 원 이상의 사회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며 한국 사회의 도약을 견인했다. 이러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 연구의 정체성은 ‘국가의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기업이나 대학 등 민간 연구기관으로서는 뛰어들기 어려운 국가적 난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는 임무 지향적 연구가 정부 출연 연구기관만의 차별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는 선도형 연구의 본산으로 KIST가 다시 한번 도약하고 있듯, “앞으로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전체가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매일경제』 『서울경제』 『중앙일보』 등에 연재한 칼럼을 묶어 펴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 「추격의 시대는 끝났다」에서는 한국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재도약의 해법’으로서 선도형 과학기술이라는 목표를 세운다. 2부 「미래 실행의 전략」에서는 선도형 과학기술을 가능케 하는 연구 환경으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혁신과 전략을 제시한다. 3부 「배는 산으로도 가야 하기에」에서는 새로운 연구 문화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 정책을 구상하며, 4부 「빅사이언스, 과학의 공공성」에서는 국가적 난제를 연구하며 민간 영역과 차별성을 이루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을 통해 과학의 공공성을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5부 「보이는 것보다 가까운 미래」에서는 인공지능이나 탄소중립, 양자 컴퓨터처럼 KIST에서 가열하게 본격적으로 준비 중인 미래 기술의 현재를 확인함으로써, 한국 연구개발의 무한한 가능성을 전망해본다.




목소리들

이승우 저 16,000원 / 문학과지성사
 
“집이, 없었다. 아니, 집은 있었다.
그러나 집이 있다고 할 수 없었다.”
2021 이상문학상 수상작 「마음의 부력」 수록

대산문학상·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 수상 작가
이승우 3년 만의 신작 소설집 출간

“아마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탄식 없이 슬퍼하고 변명 없이 애도하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이해받으려는 간절함’이 아니라 ‘간절함을 이해하는’ 글의 저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1981년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지난 42년간 한국 문단에서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온 작가 이승우의 열두번째 소설집 『목소리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사랑을 받으며 “한국에서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르 클레지오, 인터뷰에서)로 언급되기도 한 이승우는 프랑스 갈리마르출판사의 세계 명작 총서인 폴리오 시리즈에 『식물들의 사생활』과 『그곳이 어디든』 두 편이 실리는 등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인간의 불안과 욕망의 기저, 죄의식 및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 등은 이승우 작품의 주요 화두였다. 이렇듯 “인간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관념적 성찰의 형식으로 탐문해”(황순원문학상 심사평)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화자들의 어두운 내면의 근원이자 가족을 상징하는 ‘집’을 다양한 관점에서 섬세한 언어로 쌓아 올렸다. 여덟 편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가족을 잃거나 관계에 균열이 생겨 갈등과 위기를 겪으며 삶의 방향을 점점 잃어간다.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을 배회하며 버티다가 끝내 다시 집을 떠올리는 저마다의 “목소리들”이 마치 건축물처럼 설계된 각각의 작품에는 부조리한 현실, 안식처를 잃은 자들의 행로, 관계에 대한 사유 들이 담겨 있다. 결국 처음 시작된 곳,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전작들이 보여준 문제의식을 껴안으면서 그 너머의 방향성을 넌지시 보인 소설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불안의 바깥과 그 끝의 허무
기나긴 방황이 내뱉은 절실한 목소리들

이 책의 제목처럼 여덟 편의 작품 속 화자들의 ‘목소리’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에서는 부조리한 세태에 대항하는 과감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배낭의 아가리 밖으로 길쭉한 장대가 하나 삐져나”온 것처럼 도로 위에 불쑥 나타난 깡마른 여자가 청소를 한다. 소화전의 밸브를 돌려 “길들일 수 없는 짐승처럼 요란하게 날뛰”는 물줄기를 양동이에 받아 중앙 차선에 뿌리고 청소용 솔로 문지르는 것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관이 도착하고 그들은 그녀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여자를 강제로 연행하려 한다. “경찰들이 그녀를 경찰차의 뒷좌석에 억지로 태우려고 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몸은 휴지처럼 마구 구겨졌다 펴”진다. 그때 한 남성이 나타난다.

“당신들은 저분이 무얼 하고 있는지, 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 거지요. 그렇지만 무지가 당신들의 무례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당신들이 모르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니까요. 무지가 당신들을 무례하게 행동하게 한 거라면 무지야말로 나쁘지요. 무례보다 나쁘지요.” _「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에서

경찰도 얼어붙게 만들 만큼 초월적 존재처럼 보이는 남성이 그녀를 대변한다. 남성은 어떤 행동도 보여주지 않고 그저 말만으로 경찰과 행인들을 압도한다. 사건의 정황이라는 구조물 위로 화자의 목소리를 덧입혀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작업은 「목소리들」에서도 이어진다. 엄마와 아들 ‘나’가 각각 독백 형식으로 속마음을 토로하는 이 작품 속 두 화자는 “잠이 안 오”는 것은 물론 “잠을 자는 게 두려”운 상태다. 막내 아들 ‘준호’의 죽음 이후 똑같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네가 만나줬으면,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 그 애가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 안” 드느냐며 죽은 아들에 대한 책임을 남은 자식에게 미룬다. ‘나’는 “엄마의 방식으로 자기를 벌주고 있는 거지.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 남들을 탓하면서, 남들에게 돌릴 수 없는 책임을 물으면서, 자기를 지목하고 있는 거”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전화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 속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주인공의 내면에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나’의 곁에는 퇴근 후 안식처와 같은 ‘거기’에 함께 가 술잔을 기울이는 직장 동료 ‘형배’가 있다. 어느 날 형배가 회사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다. 거래처에서 갑질 및 성추행을 했다는 소문이 돌더니 곧 사내 징계위원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함께 소환된다. 징계위원회가 열리기 전날 밤 ‘나’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괴로워하던 형배는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어느 날, 휴대폰에서 형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형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목소리들이 켜켜이 쌓은 세계는 인간의 본성을 집요하게 추적해 건드린다. “이런 말 안 하려고 했”지만 할 수밖에 없어서 말하는 것이라며 “아마 틀림없이 후회”하겠지만 기어이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은 이제 그만 “목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목소리들」)다고 말하며 다른 이에게 상처를 준다. 『목소리들』은 이 음성들이 만든 고통의 쳇바퀴에 우리를 슬며시 밀어놓고 고통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생각하게 한다. “문득 되살아나 현재를 덮치는 과거”(「소화전의 밸브를 돌리자 물이 쏟아졌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마음속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설계된
가족이라는 헤어날 수 없는 집

집은 가족 구성원이 사는 보금자리이자 삶을 유지하는 중요한 영역이다. 이렇게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이 제 기능을 상실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할까. 이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실험적 시선이 『목소리들』 안에 녹아 있다. 「공가空家」의 남성 화자는 과거 새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했다. 새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기도방’이라는 곳에 갇혔는데 “창문이 없고 벽이 온통 하얀색이던 아주 작은 방”이자 “스피커를 통해 ‘선견자’의 말이 반복해서 재생”되는 곳이었다. 그 방에서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던 그는 그곳을 도망치듯 떠나야 했고, 돌아갈 수밖에 없을 때까지 버틴 후에야 다시 집을 찾는다.

집은 마지막에 있었다. 마지막은 끝. 끝은 일의 결국을 이르는 말이니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끝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끝에 이르기 전까지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끝에 이르러서는 무엇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없어지는 것이 끝이다. 끝의 다음은 없기 때문이다. 다음이 없는 것이 끝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음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고 세뇌하는 데 지쳤고, 지쳐서 아직은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주문을 외는 데 실패했다. _「공가空家」에서

「마음의 부력」 속 주인공 ‘나’는 불가항력에 의해 가족과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형과 ‘나’의 목소리를 헷갈리는 어머니는 통화할 때마다 ‘나’를 형의 이름으로 부른다. ‘나’에게 자꾸 본인이 보잘것없어 “면목이 없다”고 말하던 “형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 아직도 형을 찾는 것이다. 어머니는 계속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형에게 쓸 돈을 빌려달라 요구하고, 아들 내외가 방문하기로 약속한 날짜를 까맣게 잊는 등 점점 기억을 잃는다. ‘나’는 또다시 가족을 잃을 위기에 직면한다.
「물 위의 잠」에서도 주인공과 형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자꾸만 형 ‘영식’을 찾는 어머니를 만나러 ‘영수’는 요양원에 간다. 병세가 점점 악화되는 어머니의 “그 목소리는 그의 내부에서 메아리”친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꾸린 그와 달리 영식은 하고 싶은 것을 좇아 세계를 떠돌며 방황하다 타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형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한 후 부고를 들은 영수는 “자책의 목소리를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 크게 키”운다.
작품 속 화자들은 가족과 함께한 집이라는 공간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소본능처럼 “세상이 내 뜻을 비껴가거나 내 뜻이 세상과 겉돌 때면 거의 자동적으로 집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이처럼 『목소리들』은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질문들을 던지며 미로처럼 설계된 여덟 채의 집 내부로 우리를 초대한다. 사이사이 작가가 밝혀놓은 등을 따라 걷다 보면 문득 “현실감을 찾”(「공가空家」)고 “그제야 깨닫”(「전화를 받(지 않)았어야 했다」)게 될 것이다. 불안과 고통의 나날을 끊기 위해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주인공들의 절실한 “목소리들”에 어느새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삶에서 꼭 필요한 질문들을 그간 외면해왔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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