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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뉴스

10월 신간 도서 소개(종합) - 매주 업데이트 됩니다.
등록일
2023-10-05
조회수
329

 

어촌설화 대백과

김상곤 저 / 22,000원 / 소나기크리에이티브

〈어촌설화 대백과〉는 전국의 어촌에서 유래된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낸 모음집이다.
자료를 통해 수집한 전설부터 어촌에서 지내고 있는 주민들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은 구전까지. 어촌의 생활을 고스란히 담아낸 다양한 설화를 읽다 보면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 생각들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형태로, 까마득히 먼 시절부터 바다는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이어왔다. 배를 타고 나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거나, 혹은 반대로 거친 파도에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다. 이렇게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만들었고,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생겨나게 된다.

어촌의 생활은 주로 바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위험을 가까이 두고 있다. 어획량은 해마다, 또 계절에 따라 다르며, 매일의 어획량조차 예측할 수 없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바다의 불안정함 때문인지, [어촌설화 대백과]에는 고요하지만 애달프고 슬픈 이야기들이 많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어촌설화 대백과]의 설화들은 비록 먼 과거의 이야기지만 이 속에 담겨있는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 지혜는 우리에게 특별한 교훈을 선사한다.








예수처럼 리드하라

켄 블랜차드, 필 하지스, 필리스 헨드리 저 / 22,000원 / 도서출판 CUP(씨유피)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저자 켄 블랜차드가 성경에서 발견한 최고의 리더십 모델
성경에 제시된 리더십의 지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풍부하다
전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십 전문가 켄 블랜차드 팀이 사상 최고의 예수 리더십을 집중 분석했다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면 우리는 모두 리더이다!
리더십이란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다. 개인적으로든 직장에서든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발달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리더이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리더이다.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더 자신이고, 리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마음이다. 본서는 리더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게 연결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심을 핵심으로, 성경 속 예수의 리더십을 심층 분석하여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예수는 사상 최고의 리더십 역할 모델이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는 세계 역사상 그 어떤 리더의 경우보다도 많다. 예수는 섬기는 리더일 뿐 아니라 비전을 제시하시고, 팀을 세우시고, 팀에 동기를 부여하시고, 변화를 주도하는 면에서도 사상 최고다.

예수 같은 리더가 되면, 우리 삶은 물론 우리 영향권 내에 있는 사람들의 삶까지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며, 성경을 바탕으로 섬세하고 친절하며 분명하게 예수 리더십의 핵심을 간파하고 적용하도록 돕는다.






MBC를 날리면


박성제 저 / 17,000원 / 창비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MBC 죽이기’가 시작된 것이다.”
전 MBC 사장 박성제가 기록한 언론장악 막전막후

‘바이든’이냐 ‘날리면’이냐?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두고 현 정권과 MBC의 불화가 본격화됐고, 그 줄다리기는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그 논란의 중심에 있던 전 MBC 사장 박성제의 저서 『MBC를 날리면』이 출간되었다. 저자 박성제는 1993년 MBC 문화방송에 기자로 입사해 보도국 사회부·정치부 등을 거쳐 탐사보도팀에서 일했고, MBC 기자회장, 전국언론노동조합 MBC 본부 7대 위원장 등을 지낸 인물로, 이명박 정권 말기에 정부의 방송장악에 맞서 싸우다 2012년 해고되었다. 2017년 복직해 2018년 MBC 보도국장을 거쳐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제35대 MBC 대표이사 사장을 지냈다.
이 책에서 그는 지난 30년간 대한민국 공영방송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언론인 박성제만이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최초로 공개되는 ‘날리면’ 논란의 놀라운 뒷이야기부터 현재 진행형인 ‘MBC 죽이기’와 구성원들의 투쟁까지, 언론인 박성제가 직접 보고 겪은 대한민국 언론의 수난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저자는 “MBC를 살리는 것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고 싶다”고 말하며 이 책에서 대한민국 공영방송의 막전막후를 최초로 공개한다. 진실을 보도하기 위한 저널리즘과 이를 막기 위한 권력의 민낯. 언론장악의 실체를 알리는 화제작!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

최의택 저 / 16,800원 / 교양인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고, 읽고 나면 가슴이 찡해지는
경쾌하면서도 단단한 에세이

자신의 언어로 세상과 만나기를 열망하는 한 작가의
평범하지 않은 분투기이자 모든 순간을 나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한 인간의 굴하지 않는 자기 탐험기!
배제와 소외를 주제로 삼아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어 온 작가 최의택이 시선을 내부로 돌려 자신의 장애 경험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가장 보통의 인간》은 저자가 근육병(선천성 근위축증)으로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되었던 경험에서 벗어나 자신의 장애 문제를 마주보고 직시하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낸 유쾌하고도 묵직한 에세이다. 낄낄거리며 읽다 보면 가슴이 찡해진다.
휠체어를 타고 영화관에 가는 일의 고단함이나 시상식에 초대받으면 무대의 단차부터 걱정해야 하는 씁쓸함, 장애 보장구를 구입할 때마다 겪는 난감함 등 작가의 익숙한 일상 속에서 건져낸 에피소드들부터, 장애를 소재로 삼은 소설이 장애를 대상화, 타자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윤리적 고민에 이르기까지 작가 최의택의 경험과 생각이 한 편의 성장기 혹은 여행기처럼 펼쳐진다.
최의택의 문장들은 경쾌하면서도 단단하다. 길었던 10여 년의 작가 지망생 시절, 판타지를 쓰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 음모론으로 빠져들고, 추리 형사물을 쓰던 중에 EBS 강의로 미적분까지 공부하고, 인물들 사이의 대화가 어색하다는 지적에 자연스러운 말투를 찾다 급기야 랩(rap)까지 불러댄 이야기들은 읽는 내내 독자를 웃게 만들지만 그 서툴고도 간절한 진심이 마음을 울린다. 이 책은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과 만나기를 열망하는 한 작가의 평범하지 않은 분투기이자, 모든 순간을 나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한 인간의 굴하지 않는 자기 탐험기이다.

최의택의 글은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SF 작가’에게 기대하는 요소들을 슬쩍 재치 있게 내보이다가, 모른 척 툭 손에서 떨궈버린다. 키보드를 개조해 한 번에 한 자모씩 써 내려가는 사이보그적 글쓰기의 고단함(혹은 귀찮음)을 보여주다가도, 자신의 장애를 ‘장애’로 여겨본 적 없던 오랜 시간들에 대해 들려주는 등 그의 이야기는 시니컬함과 씩씩함을 오가는 역동적 매력을 가득 품고 있다. 입담에 이끌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최의택의 글은 어떤 이름으로도 라벨링할 수 없는, 오직 ‘최의택’의 글인 것이구나, 고개 끄덕이게 되는 개성 넘치는 에세이.






지각의 정지
조너선 크레리 저 / 유운성 역 / 36,000원 / 문학과지성사
 
마네, 쇠라, 세잔의 작품에 형상화된 시각성의 문제를 경유해
근대의 문턱에서 이뤄진 지각 방식의 중대한 변화를 포착하고
스펙터클과 주의 관리 기술이 중첩된 현시대까지 아우르는 학술적 모험
“크레리는 우리의 스펙터클한 삶에 관한 역사가-철학자이다. _『아트포럼』

“부단히 매혹적이다… 이 책의 함의는 매우 광범위하고 독서의 즐거움이 너무도 크기에, 덧붙일 조언이라고는 가능한 모든 사람이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이 책을 읽으라는 것뿐이다.” _에두아르도 프라도 코엘료(문화비평가)

예술비평가이자 인문학자로서 19세기 근대성과 시각의 문제를 탐구하는 일련의 연구서로 학문적 명성을 얻은 조너선 크레리의 대표작 『지각의 정지: 주의ㆍ스펙터클ㆍ근대문화』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크레리는 19세기 후반의 사회적ㆍ철학적ㆍ과학적 담론들과 당대의 시청각적 기술들, 그리고 예술적ㆍ문화적 실천들이 뒤얽히는 가운데, 주의라는 논쟁적 개념이 어떻게 부상하고 변형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해나간다. 19세기 말에 주의의 문제는 생산적이고 관리 가능한 주체성을 제도적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 사안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세심하고 고정적인 고전적 관찰자가 점차 주의력이 불안정한 주체로 대체되는 과정과 주의력에 초래된 위기를 고찰하고, 변화하는 자본주의적 편성들이 주의집중과 주의분산을 새로운 한계와 문턱으로 밀어 넣으면서, 어떻게 지각을 관리하고 규제하고자 했는지 살펴본다. 특히 이 책은 1879년부터 1900년까지 대략 10년 간격으로 발표된 마네, 쇠라, 세잔의 작품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구속에서 풀려난 시각, 근대적 각성의 경험, 그리고 지각의 종합으로 요약되는 주의의 계보학을 치밀하게 그려 보인다. 이 책은 2001년 라이어널 트릴링 북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이상이 일상이 되도록 상상하라
유범상 저 / 유기훈 그림 / 19,000원 / 마북
 
누구나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는 세상을 마중하는
인권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
인권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민달팽이와 곤충들의 우화에 담았다. 민달팽이 ‘마중’이가 누구나 존중받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통해 자유권, 사회권, 차별받지 않을 권리, 안전하게 일할 권리, 생명권, 이동권, 사회적 우정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쉽게 읽을 수 있는 우화와, 인권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40여 컷의 생생한 삽화가 보는 재미를 더한다.

하나의 스토리에 담긴, 인권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

『이상이 일상이 되도록 상상하라』는 인권의 다양한 영역을 다룬다. 인종, 국적, 장애, 성 정체성 등 어떤 이유로도 차별받지 않을 권리, 자유권, 사회권, 안전하게 일할 권리, 생명권 등 인권의 주요한 주제를 망라하여 다룬다. 특히 자유권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우리 사회의 인권에 대한 논의를 사회권, 나아가 인간 종(種)을 넘어 생명권의 범주까지 확장한 것이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이다.

또한 인권의 다양한 주제들을 단순 나열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에 담아 흡입력을 더한다. 어느새 우화에 스며든 독자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며 주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게 될 것이다. 청소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들이 함께 읽고 가정이나 학교, 독서 모임 등에서 인권에 대해 토론하기에 적절하다.

인권 우화에 최적인 등장 동물들과 생생한 삽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민달팽이와 개미, 나비, 딱정벌레, 매미 등 곤충들의 특징이 우화의 내용과 잘 맞물려 읽는 재미를 더한다. 느리고 징그럽게 생긴 민달팽이는 차별과 혐오에 맞서 인권을 말하는 우화의 최적의 주인공이다. ‘지구 생태계의 왕’으로 불리는 딱정벌레들이 지배자로 군림하고, 일개미 ‘일만이’는 일하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잘 우는 매미 ‘목청이’는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구령을 붙이는 역할을 하고, 이 꽃 저 꽃을 오가며 꽃가루를 나르는 나비 ‘미노’는 택배 노동자로 설정하였다.

40여 컷의 생생하면서도 풍부한 삽화가 우화의 재미를 더해 준다. 포식자 개구리가 곤충들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존재인지, 거짓 울음도 서슴지 않는 정치인으로서의 꽃뱅이의 면모는 물론 갖가지 소문에 휩싸인 마중이의 심정 등이 생생하게 묘사된 그림은 독자들에게 우화를 더 실감나게 전달한다.

깊이 있는 해설

‘해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는 독자들이 인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화의 배경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 프레이리, 알린스키, 루소 등의 철학과 이론이 쉽게 소개되어 있다.
저자인 유범상 교수(한국방송통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는 시민들의 광장에서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정치에 대해 소통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우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하는 시민을 위한 정치우화’ 시리즈를 기획하고, 자본주의 역사를 다룬 『이매진 빌리지에서 생긴 일』, 정의에 대한 다양한 철학을 다룬 『정의를 찾는 소녀』를 출간하였다. 『이상이 일상이 되도록 상상하라』는 유 교수가 쓴 세 번째 정치우화이다.






기억의 양식들

김병익 저 / 26,000원 / 문학과지성사

풍성한 경험으로 이룬 양식(良識)을 담는
빛나는 언어와 사유의 양식(樣式)

두 겹의 양식을 통과하며
촘촘하고 넉넉해지는 기억들
시대를 진단하고 흐름을 전망하는 자유 지식인으로서 문단과 지성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겨온 김병익의 글 모음집 『기억의 양식들』이 출간되었다. 기자, 문학평론가, 번역가, 출판 편집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김병익이 2년여 만에 펴내는 책이다. ‘글 모음’이라는 표현에 충실하도록, 근래에 발표한 글들은 물론 중년 시절의 저작, 어릴 적의 시와 산문, 내군(內君)의 글, 각종 수상 소감 및 대담 등까지 총망라하였다.
삶은, 그리고 문학은 단순히 시간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해 적극적으로 구성된다. 저자는 인간의 안팎을 채우는 이 ‘기억’에, 나아가 기억이 거치는 두 겹의 ‘양식’에 주목한다. 기억은 ‘양식(良識)’화됨으로써 시간과 체험의 의미를 붙들고, 언어, 사상, 예술 등을 통해 ‘양식(樣式)’화됨으로써 이를 널리 공유한다. “인간의 발전과 성숙”이 “기억의 이 두 가지 작업”(「책머리에」)을 통해 진전되어왔듯, 그 작업의 결실인 이 책 또한 독자의 ‘기억의 양식들’로 편입되어 커다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7년 전부터의 근래의 글들에, 기왕의 책 안에 들지 못한 오래전의 글들도 함께 모아 묶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그래서 한창 문단 활동을 하던 때에 썼으면서도 단행본에 끼지 못한 글들과 젊을 때의 뜨겁지만 수선스러운 글들, 십대의 속셈 없이 어린 글들까지, 한자리에 몰아보았다. [……] 그 경험들을 그냥 기억이라 해야겠다. 어머니 등에 열로 들뜬 몸이 업혀 약방에 가던 가장 오랜 추억으로부터 묵은 시절을 회상하기 며칠 전까지의 내 존재는, 그래, 그 갖가지 기억들이 얽힌 덩어리라는 것들로 응어리지고, 흩어지고 다시 뭉쳐지고 아련해지며 더불어 일구는 잇달음, 돌이킴, 이어짐, 밀림, 쌓임 들에 나는 젖어 있었다. 그 덕택에 인간이란 기억의 존재란 것을 새삼 더욱 깊이 깨닫는다.
_「책머리에」


세상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문명비평가,
그리고 책을 사랑하는 평생의 독서가

총 다섯 개의 부로 구성된 『기억의 양식들』은 언제나 치열하게 읽고 쓰며 살아온 저자의 삶을 너르게 아우른다. 특히 Ⅰ~Ⅲ은 저자가 중년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지런히 발표해온 글들로 묶였다. 〈Ⅰ 기억의 자리들〉은 저자가 그동안 축적해온 세월과 경험이 어떠한 자리에 놓일 수 있을지 고민한 흔적들로, 문학은 물론 사회, 예술, 인문, 역사 등 폭넓은 분야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돋보인다. 문학평론가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Ⅱ 기억의 형상들〉에서는 시, 소설 그리고 문인에 대한 저자의 구체적인 관점을 확인해볼 수 있다. 한편 저자가 1960~70년대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Ⅲ 기억 일구기〉는 지금 이 시점에도 여전히 유의미한 느낌표와 물음표를 묵직하게 던진다. 이상의 세 부는 저자가 시대의 변화를 생애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한, 또 이를 총체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역사적 전망을 지향하는 ‘문명비평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어지는 〈Ⅳ 숨어 있는 기억들〉에서는 저자의 청소년ㆍ청년 시절 모습과 순수한 열정이 곳곳 엿보이며, 기록과 회고를 중심으로 여물어진 〈Ⅴ 기억을 밝히다〉는 그간 문사(文士)의 이름으로 활약해온 저자의 역정을 포괄적으로 그러모은다. 두 부로 나뉘어 실린 글들이 각각 삶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해당함에도 나란히 놓고 보았을 때 시차가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저자가 항상 변함없이 독자의 자리에서 책의 곁에 머물며 글을 아껴왔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토록 성실한 독서가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저자의 음성은 전 생애에 걸친 그의 기억을, 그리고 그 양식들을 관통한다.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저 / 이태연,최애영,백민경,원혜연 역 / 16,000원 / 문학과지성사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허용하는 유일한 해학이다”
한국문학 연구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를 따라 걷는 한국 소설의 숲
내가 프로방스 숲속을 걷는 동안 동행하던 책들이 떠올랐다. 이 팬데믹을 견디고 한정할, 적을 만들기도 무력화시키기도 하는 방법은 한국문학 속에서 오웰George Orwell과 궤를 달리하는 디스토피아의 징조를 끌어내는 것이다. 내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신체 활동이 두뇌 활동으로 변모하며 내가 하고 있는 육체적 산책이 한국문학 속 산책으로 이어졌다.
-「책머리에」에서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한국문학 연구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의 새 연구서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 엑스마르세유 대학교에서 한국학과를 창설하고 주임교수를 역임한 그는 아시아학연구소IRASIA의 일원이자 한국문학 공동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또한 한국문학 전문 웹진 〈글마당〉을 운영하며 프랑스에 드크레센조 출판사를 설립해 한국 현대 작품을 프랑스에 널리 알리고 있다.
전작 『다나이데스의 물통-이승우의 작품 세계』에서 한 작가의 장편소설 6권을 유럽 문학·철학과 연결 지으며 분석했다면 이번 신작은 끊임없이 형태를 변형해 세계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처럼 한국 소설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적(敵)의 형상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아홉 명의 작가(김애란, 박민규, 편혜영, 장강명, 이승우, 은희경, 한유주, 이인성, 황석영)의 작품들을 들여다본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인류의 적에서 출발해 한국 소설에서 나타난 적으로 확장되는 장클로드 드크레센조의 분석은 현 시국을 은유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의 ‘예견적인 시각’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짚어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한국 작가들과의 특별한 추억이 담긴 저자의 에피소드들에서는 한국 작품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서양 철학을 접목해 한국 소설을 분석한 이 연구서는 우리 문학의 현재를 가늠케 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이상해

헤이란 저 / 17,000원 / 사유와 공감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이상하지만 아름다운 세상, 그리고
4대가 함께 보금자리를 짓고 살아가는 오래된 동네
그 속에서 펼쳐지는 소박하고 뭉클한 반려 생활의 기록
「딸과 나, 나의 엄마, 그리고 할머니까지 4대가 가까이에 각자의 보금자리를 짓고 살아가는 동네. 손가락으로 세어도 헷갈리는 가계도 때문인지 딸은 종종 나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왕할머니’인 거지? 엄마. 왕할머니는 이상해. 같은 질문을 자꾸 하고 먹은 걸 또 먹으라구 해.”」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이상해》의 저자 헤이란은 날이 갈수록 희소해지고 있는 대가족의 구성원이다. 그가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저자의 엄마가 할머니를 보살피며 사는 외갓집이 있다. 치매를 앓고 있는 그의 할머니는 어느 순간에 기억이 멈춘 채로 고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끊임없이 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며 때로는 저승사자 저리 가라 할 만큼 지독한 분노를 쏟아내는 도깨비가 되기도 한다. 저자는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는 할머니를 오랜 시간 미워했지만, 다시금 할머니만의 ‘사랑’의 언어를 이해하고자 그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사려 깊은 마음과 재치 있는 문장으로 가득한 이 에세이집은 저자와 그의 가족, 나아가 친구와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단란한 삶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정든 집과 동네에서 서로 안부를 묻고 마음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다정한 기록을 담은 《엄마의 엄마의 엄마는 이상해》는 타인과 부대끼며 사는 생활의 정겨움을 상기시키며 작은 불씨처럼 삭막해져가는 사회에 따스한 온기를 전할 것이다.





시티 픽션 (전 5권)

런던: 버지니아 울프, 캐서린 맨스필드, 헨리 제임스 저 / 김영희, 한기욱 역 / 7,000원 / 창비
뉴욕: 허먼 멜빌·F, 스콧 피츠제럴드 저 / 한기욱 역 / 7,000원 / 창비
도쿄: 다자이 오사무 저 / 신현선 역 / 6,000원 / 창비
파리: 기 드 모파상·드니 디드로 저 / 이규현 역 / 5,000원 / 창비
더블린: 제임스 조이스 저 / 성은애 역 / 5,000원 / 창비
세트: 30,000원 / 창비
 
설레는 여정 앞에 선 당신에게 가장 먼저 도착한 초대
거장들의 명단편과 함께 떠나는 세계 도시 여행
 
금방이라도 여행을 떠나고 싶은 세계 각국 도시를 중심으로 고전문학 단편을 새롭게 엮은 ‘시티 픽션’ 시리즈가 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오랜 기간 전세계 단편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창비세계문학 단편선집들로부터 영국의 런던, 미국의 뉴욕, 일본의 도쿄, 프랑스의 파리, 아일랜드의 더블린 각 도시의 정서를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는 고전 단편 열여섯편을 엄선하여 총 다섯권에 담아냈다.
다섯권은 각각 런던(버지니아 울프 외), 뉴욕(스콧 피츠제럴드 외), 도쿄(다자이 오사무), 파리(기 드 모파상 외), 더블린(제임스 조이스)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나 가볍게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판형과 부담 없는 가격으로 펴내 고전 읽기에 장벽을 느꼈을 독자들이 쉽게 소설을 접할 수 있도록 접근성을 높였고 세계적인 거장들의 저명한 작품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까지 두루 만날 수 있도록 수록작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특징으로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한정판으로 먼저 선보였을 당시 독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은 동시에 정식 출간 요청이 쇄도했을 정도로 이미 그 화제성을 증명한 바 있다.
다섯 도시 각각의 개성을 담은 일러스트와 색감으로 제작된 표지는 이 책의 성격을 대변하는 산뜻한 디자인으로 제작되었다. 아울러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 수 있는 경량의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문학의 세계는 다채롭고 풍성하다. 이 책은 더 깊이 있는 고전의 세계로 독자를 이끄는 출발점이 되고 꼭 읽어보아야 할 작품들을 그 배경이 되는 도시의 관점으로 새롭게 읽는 경험 또한 선물한다.
여행을 꿈꾸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날들을 지나 새로운 출발이 가능해진 지금, 두근대는 여정 앞에 선 독자들에게 이 책을 건넨다. 소설을 따라 읽으며 마주할 다섯 도시의 풍경은 결국 우리가 오래 간직해두었던 꿈을 한발 앞서 선보일 것이다. 이름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하는 작가들이 그려낸 그때 그들의 도시를 따라 걷다보면 오랜 시간을 건너왔어도 여전히 존재하는 삶의 환희를 발견하고 이 책과 함께 세계 곳곳을 누비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가와우치 아리오 저 / 김영현 역 / 22,000원 / 다다서재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는 닛타 지로 문학상, 가이코 다케시 논픽션상 등을 수상한 저자가 선천적 전맹인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일본 각지의 미술관을 방문하여 다양한 작품을 감상한 기록을 담은 책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미술 작품을 볼까? 시라토리 겐지는 눈이 보이는 사람과 동행해 작품에 관한 시각적 설명을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품을 감상한다. 그 과정에서 대화는 미술의 경계를 넘어 예술, 인간, 사회, 역사, 장애, 정상성 등 다양한 주제로 확장된다. 시라토리가 작품을 보는 방식은 익숙한 미술 감상법을 탈피할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도 변화시킨다. 그와 함께 보면 그림도 인간도 이 세계도 완전히 다른 빛깔과 질감으로 다가온다.

이 책은 일본에서 출간 즉시 화제를 모으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제53회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일본의 서점원들이 한 해 동안 최고의 책을 선정하는 2022 서점대상 논픽션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말과 말 아닌 것


김나영 저 / 26,000원 / 문학과지성사

최소한의 자리에서 ‘평론가’라는 개인이
‘미지의 세계’를 상대로 최대한의 질문을 하는 것
“유려하고도 섬세한 문체는 비평적 글쓰기의 기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라는 찬사와 함께 데뷔한 문학평론가 김나영의 첫번째 평론집 『말과 말 아닌 것』(문학과지성사, 2023)이 출간되었다. 2009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평론 부문에 당선된 ‘김선우론’은 시인의 작품 세계를 해석하고 부연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닌, ‘새로운 비평적 호명’을 달성해냈다는 평과 함께 당대 문단의 뜨거운 주목을 받는다. 이후로도 김나영은 탁월한 비평적 감수성과 텍스트의 맥락을 발견해내는 발견술을 통해 단연 뛰어난 해설들을 발표해왔다. 문학 비평을 해석한 지 햇수로 15년 차에 접어든 저자는 그 시간 동안 한국 사회의 중대한 사건을 온몸으로 겪어내야만 했다. “차벽과 물대포와 촛불 광장을 마주했고, 여러 번의 참사를 목도”했다. 그 혼란 속에서도 문학 비평이 지켜야 할 자리에 대해 고민하며 “그에 맞선 목숨을 건 투쟁들을 빠짐없이 알고자” 했다. 이렇듯 평론가 김나영에게 문학 비평이란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는 동시에 매 순간 타자의 세계를 탐문하고 함께 살아가고자 한 다짐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김나영은 자신의 첫 책, 『말과 말 아닌 것』에서 비평의 특성과 숙명에 대해 다시금 짚어나간다. 이는 비평이 작품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나 ‘태도’에서 머무는 게 아닌, 자기 자신을 둘러싼 변화를 유연하게 수긍하고 확장시키는 과정임을 의미한다. 이렇듯 김나영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비평이 가져야만 하는 ‘책임감’이었다.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체하여 다시 그 속의 의미를 헤아리는 작업은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책임지려는 태도를 갖췄을 때야 비로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한가운데서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더 창조적인 텍스트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돌봄’의 시간을 받아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순히 “좋아해서” 시작했던 문학 비평은 삶에 관한 탐구와 질문으로 이어졌고, 평론가 개인과 세계를 온당하게 책임지려는 시도가 되어주었다. 이렇듯 나와 타인과의 연대를 바탕으로 삶에 대한 집요한 탐구를 이어가는 평론가 김나영은 “믿음이 헛되지 않도록, 진실과 성실을 다하고자 노력할 것”(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 소감)이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켜왔다. 오랜 시간 성실하게 문학으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작가의 첫 책은, 오랜 약속에 대한 응답이자 한국 문학이 오래도록 지켜오고자 했던 순수한 열망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말과 말 아닌 것’은 언어의 방법으로 포착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간단히 분별하고자 하는 의도로 붙인 제목이라기보다는, 문학이 애초에 언어로 씌어졌으나 언어에 미달하거나 초과하는 것들을 말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나의 믿음에 대한 표현이다. 문학은 말을 통해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준다. 언제나 문학은 이 밖의 것을 거듭 말의 안으로 껴안아보려는 시도일 것이다. _「책머리에」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

배윤민정,보란,윤은성,은수,이상현,이은지,이충열,장수정,최지원,희음 저 / 17,000원 / 한티재

지금 여기에 도래한 기후생태위기 앞에서 소위 전문가들이 쏟아내는 말들이 홍수를 이루는 시대다. 하지만 우리 곁의 존재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엇을 고민하며 어디를 바라보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만나기 어렵다.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는 한국 사회에서 기후생태위기를 살아가는 다양한 동시대 여성 시민의 구체적인 고민과 삶에 대한 부분적인 해법을 나누고 전하는 책이다.
이 책은 각기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열 명의 여성 및 젠더퀴어 필자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해 ‘함께’의 한가운데로 나아가고 거듭나는 사유의 실천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여기의 기후생태위기 앞에서, 생존, 생계, 일상의 존속이 철저하게 각자의 몫으로 맡겨진 삶의 위기 앞에서, 멈춰 서서 자신의 앞과 옆과 뒤를 돌아보고 사회 전체를 돌아보는 글이다. 필자들은 이 세계의 보편 가치로 자리 잡은 자본주의, 능력주의, 각자도생, 타자화의 논리가 어떻게 필자들의 삶에도 뿌리내려 왔는지를 각기 다른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고백한다. 또한 이 같은 논리가 지금의 기후생태위기를 불러온 원인과도 다르지 않음을 성찰하면서, 다시 함께 서로를 일으키며 공동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과 방향이 무엇일지를 모색한다.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곽효환 저 / 12,000원 / 문학과지성사

“사람이 그리고 사랑만이 기적이다”
소리 없이 남기고 간 뜨거운 눈물
아롱진 자국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

특유의 예민함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시대의 풍경을 그려내는 시인 곽효환의 다섯번째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4부로 나뉘어 총 68편의 시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전작 『너는』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것으로, 시련과 상처를 견디며 눈물짓는 이들을 너른 품으로 끌어안아 보듬는다.

시대의 곡절과 흐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주로 나열하곤 하지만, 사실 우리의 터전을 이루어온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어진 삶과 사랑하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의 순간순간을 소리 없는 눈물로 버텨낸다. 이때 소리 내지 않음은 자칫 힘없고 유약한 수용처럼 보이지만, 역경의 무게와 어둠을 기꺼이 감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단단하고 뜨겁다. 이 무명의 눈물들이야말로 진정 우리 사회를 추동해온 동력이며,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은 근현대사의 뒤꼍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가만히 쓸어보고 기억하고 되짚어보려는 문학적 시도다.

‘소리 없이 울다 간’ 존재들을 조명하는 시인에게 “차단된 삶의 여로이고, 단절된 역사의 현장이며, 잊혀가는 오래된 정감의 고향이자,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그리움의 진원지”(『슬픔의 뼈대』 해설)인 북방은 특히나 유의미한 공간이다. 이에 『지도에 없는 집』(2010)에서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온, 시원과 궁극을 찾으려는 그의 북방 여정은 이번 시집에서도 계속된다. 연해주, 북만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곽효환의 시편들은 거대한 북방의 원형을 차근히 완성해나가며, 그동안 시인이 계획하고 꾸려온 “고되고 길었던 여정”의 끝 또한 “마침내 저 너머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묵묵한 울음과 식지 않는 슬픔이 존재하는 한 그는 “오래지 않아 주섬주섬/다시 여장을 꾸릴 것”(‘시인의 말’)이다. 사람과 사랑만이 몸을 기댈 수 있는 기적이기에.

멀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넘는 북방 공간이나 베트남 등 남방 공간까지, 가까이는 그의 오랜 근무처 인근이었던 광화문이나 청계천까지 오감을 열어놓은 시인의 발걸음은 넓고 깊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걷다가 때때로 ‘시대의 정거장’이나 ‘시대의 강가’에 머물며 서성거리고 귀 기울인다. 그렇게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찻길과 물길의 내력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그래서 시인은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말한다. 소극적 수용 단계를 넘어서 적극적 회통과 그것을 위한 다가서기의 의지적 발화다. 그러다 보면 사연 많은 말들을 채록하게 되고 이런저런 소문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들을 가로지르면 사람살이의 다채로운 풍경첩을 마련하게 된다. 그렇게 마련한 ‘사람-풍경’을 독자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 곽효환의 시적 의지이고, 그 결실이 바로 이 시집이다.

-우찬제, 해설 「사람-풍경의 고현학」에서








동심이 발견한 세상

김이구 저 / 27,000원 / 창비
발명가와 같은 호기심, 창작과 비평을 향한 순수한 기쁨으로
한국 아동청소년문학의 오늘을 일군 김이구 유고 평론집
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 탁월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국 아동청소년문학 창작과 비평의 전환기를 이끈 평론가 김이구(1958~2017)의 유고 평론집 『동심이 발견한 세상』이 출간되었다. 그는 변화를 이끌어 내는 전위성을 갖추면서도 지배적 장악이 아닌 대화적 관계를 추구하는 글로 창작자와 비평가를 두루 북돋운 문학평론가이자, 1984년 창작과비평사에 입사해 예리한 시선과 눈썰미로 신인 작가 및 걸작을 다수 발굴해 낸 뛰어난 출판 편집자였다. 또한 미답지를 개척하는 도전 정신과 학구열로 동료들과 뜻을 모아 아동청소년SF를 연구하고 ‘한낙원과학소설상’ 공모를 제정하는 등 작고하기 직전까지 우리 아동청소년문학장(場)을 일구는 데 전념했다. 이 책은 김이구가 남긴 마지막 문학적 궤적으로서 그를 그리워하는 출판 관계자들은 물론 아동청소년문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도 풍부한 사유와 감성을 열어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아동청소년문학의 비평적 모험을 정점으로 이끈 문학평론가
故 김이구의 동심이 발견한 소박하고 아름다운 세상


2017년 10월 31일 세상을 떠난 문학평론가 故 김이구의 6주기를 맞아 유고 평론집 『동심이 발견한 세상』을 펴낸다. 뛰어난 출판편집자이자 기획자, 평론가로 문단에서 전방위적 활약을 했던 그의 갑작스러운 부음에 당시 수많은 문인과 출판관계자 들의 황망함이 깊었다. 특히 한국 아동청소년문학 비평이 발전해 온 갈피마다 고인의 자취가 선명하여 아동청소년문학장(場)에서 빈자리는 더욱 컸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아동청소년문학에 관한 글 중 기간된 책에 실리지 않은 것을 엮은 이번 평론집은 “작품을 시대와 현실, 어린이라는 좌표 위에서 읽어 내는 시선”이 날카로우면서도 “섬세하고 따뜻하다.”(어린이청소년SF연구공동체 플러스알파 ‘추천사’) 예리한 눈길을 견지하면서도 상호 대화적 관계를 추구하는 태도는 작가·작품·독자 간 접점을 만들어 중개하고자 하는 평론가의 책임 의식에서 비롯하는바, 『동심이 발견한 세상』은 아동청소년문학 비평의 전환기를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 그의 저서 『어린이문학을 보는 시각』(창비 2005),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창비 2014)를 잇는 비평의 본보기로서 아동문학 작가, 연구자 및 독자 들에게 믿음직스러운 이정표가 될 것이다.

동시 비평의 최전선에서 남긴 마지막 문장들
2015~2017 한국일보 연재 에세이 ‘김이구의 동시동심’ 수록


1부에는 저자가 작고하기 직전인 2017년 10월 20일까지 약 2년간 연재한 동시 에세이 ‘김이구의 동시동심’을 한데 모았다. 그는 동시대에 출간된 동시집들을 성실히 검토하며 치우치지 않은 감식안으로 유려하고도 냉철한 시평들을 쓰는 한편 ‘동시동심’과 같이 평론에 익숙지 않은 독자들도 편히 읽고 동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짧은 에세이 성격의 동시 소개 글을 꾸준히 발표했다. 철이 바뀔 때마다 계절의 풍취를 담은 동시를 인용하며 감상적인 분위기를 그리기도 하고, 섬세한 언어로 화자의 내면을 드러내는 동시를 통해 자신의 솔직한 심상을 대변하기도 했다. 권태응ㆍ류선열ㆍ윤복진ㆍ윤석중ㆍ임길택 등 앞세대 동시인의 성취를 돌아보거나 김성민ㆍ신민규ㆍ최수진 등 주목할 만한 신인 동시인의 작품 세계를 상세히 분석하며 출발선에 선 이를 응원하기도 했다. 이처럼 1부의 글은 대개 저자의 담백한 목소리로 “영양가 많고 오래도록 물리지 않는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을 주지만, 동시에 읽는 이를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쑥 들어온 비수에 놀라”(원종찬 「책을 펴내며」)게 만드는 묘미도 크다.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게이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논란 등 사회 이슈에 대해 상황에 적실한 작품을 들어 비판하는 글(「자꾸 바다 밑을 생각한다」「재치 있고 가벼운 말놀이」「‘블랙리스트 예술가’의 마음」 등)은 사회적 참사 희생자에 대한 진정성 있는 추모의 부재, 책임 소재 규명 문제가 반복되는 오늘날에도 시의적절하게 읽히며 묵직한 경종을 울린다.

당대 현실과 작품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독자와의 접점을 만드는 ‘현장 발언’으로서의 평론


2부에는 동시집 및 청소년소설 해설과 서평, 3부는 어린이문학의 장르 용어 및 동시의 난해성 문제를 다룬 글, 잡지 인터뷰 등을 실었다. 2부의 당대 비평들은 작품의 개성적인 세계를 탁월하게 분석하고 작품을 풍성하게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글로, 생생한 현장성을 바탕으로 글쓴이의 시각을 밝히는 비평의 표상으로 삼을 만하다. 3부에서는 십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유효한 문제의식을 일찍이 간파한 저자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여러 동시인 및 연구자들은 저자가 2007년 발표한 평론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 이후 동시단이 ‘뿌리 깊은 어린이 인식(어린이는 좁은 사고, 제한된 경험, 제한된 희로애락의 감정을 지닌 존재)’과 ‘낡은 감각(해묵은 관습에 얽매여 낡은 작법 반복)’의 갱신을 목표로 부단히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 동시가 일대 전환기를 맞았으며 비평의 수준 또한 한 단계 도약한 것으로 평가하는바, 3부 「인터뷰: 김이구 평론가에게 듣다」(2013)에는 당시 동시단에서 벌어진 논쟁의 주요 내용과 일련의 토론 흐름 속에서 저자가 느낀 솔직한 심정이 가감 없이 담겨 흥미롭다. 2015년 이른바 ‘잔혹 동시 파문’ 이후 발표한 「오늘의 우리 동시를 말하다」(3부)는 동시를 읽고 쓰는 사람들이 “아이들의 심리를 관습적ㆍ피상적으로 쉽게 판단”하지 않아야 하며 “더 심층적”으로 어린이를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가 강조한 ‘어린이 인식’ 진전이 여전히 아동문학장 전체의 과제로 남아 있음을 일깨우고 새로운 가능성 모색을 촉구하는 글이다.

계간 『창비어린이』 창간, ‘한낙원과학소설상’ 공모 제정 등
아동청소년문학의 미답지를 끊임없이 개척한 기획ㆍ편집자


한편 2부에는 한낙원의 『금성 탐험대』(창비 2003) 서평 두 편과 제1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작품집 『안녕, 베타』(사계절 2015) 서평, 그리고 작가 한낙원을 상세히 소개한 글까지 총 네 편의 글이 실렸다. 저자의 아동청소년SF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명감이 엿보이는 글들로, 그는 “연구를 기다리는 미답지”(「어린이 청소년 과학모험소설을 개척한 작가 한낙원」)인 한낙원을 꾸준한 공부 대상으로 삼아 2013년 『한낙원 과학소설 선집』(현대문학 2013)을 엮어 펴내고, 2014년 한낙원과학소설상 공모를 제정하는 데 힘썼다. 아동청소년SF 장르만을 모집하여 시상하는 한낙원과학소설상 공모는 지난 10년간 작가들에게 SF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으며 개성 있는 신인 작가들을 배출해 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에 앞서 김이구의 주도로 1996년 제정된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 역시 걸출한 작가를 다수 발굴해 온바, 아동청소년문학의 다양성, 어린 독자들이 읽는 문학 작품의 진취성을 중시한 편집자 김이구의 도전 정신이 이룬 성취라 할 만하다. 그 자신이 편집자이자 평론가로서 아동청소년문학에서 ‘주례사 비평’이 일관하는 문제점을 진단하고 아동문학 담론의 활성화를 위해 2003년 계간 『창비어린이』의 창간을 이끈 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기까지 『창비어린이』는 우리 아동청소년문학 비평의 중심 역할을 하며 고인의 뜻을 이어 왔다. 새로운 평론가와 작가 발굴이라는 과제가 오늘의 편집자와 평론가 들에게도 긴요한 지금, 『동심이 발견한 세상』을 읽는 일은 그가 남긴 귀중한 씨앗을 소중히 거두는 일과 맞닿는다. 치열했던 문학적 생애를 뒤로하고 “지친 몸을 쉬러 안온한 보금자리로 귀소”(「둥지에서 넓은 세상으로」)한 고인의 마지막 행보를 총망라한 이번 유고 평론집이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게 “평범하고 소박한데, 아름답고 찡”(「진짜 이웃 사이」)한 감동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아Q정전
루쉰 저 / 전형준 역 / 13,000원 / 창비
『교수신문』이 선정한 최고의 번역본
루쉰의 색다른 역작 「상서」를 추가 수록한 개정증보판 출간!
중국 현대소설의 선구자, 시대의 사상가로 평가받는 루쉰의 주요작들을 가려 뽑은 루쉰 소설선 『아Q정전』이 개정증보판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이 책은 1996년 초판 출간 이래 루쉰 문학에 접근하기 위한 가장 빼어난 필독서로 꼽히며,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여러 독자층에 두루 사랑받아 왔다. 이번 개정증보판은 루쉰의 색다른 역작 「상서傷逝」를 추가 수록했을 뿐 아니라 표지와 장정을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재단장함으로써 신선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루쉰 전문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번역으로 선정한 바 있는 전형준 역자의 간결하고 깊이 있는 문장이 소설의 의미와 뉘앙스를 충실히 드러낸다. 로맹 롤랑, 오에 겐자부로, 위화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찬사를 받은 루쉰 문학의 정수를 깔끔하고 유려한 우리말로 만나 보자.

중국 사회에 드리운 암흑의 근원을 파헤친
루쉰 문학의 정수가 담긴 소설 11편

『아Q정전』(개정증보판)은 루쉰 문학의 정수를 보여 주는 중단편 11편을 수록한 소설집이다. 1996년 ‘창비교양문고’로 출간되었던 것을 판형과 활자, 장정을 바꾸어 새롭게 펴냈다. 이 책에 실린 번역본은 50종이 넘는 「아Q정전」의 번역 가운데 루쉰 문학 전문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번역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중국 사회에 드리워진 암흑의 근원을 파헤치고 몽매한 민중을 일깨우는 데 혼신을 바친 루쉰은 신해혁명 전후 무기력하고 비굴한 근성을 지닌 중국 민중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풍자와 해학적인 필치로 가감 없이 보여 준다. 봉건의 극복과 근대의 실현을 위해 치열한 고투를 벌인 루쉰의 작품들은 여전히 현대적인 빛을 발한다.
루쉰의 데뷔작이자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는 사뭇 도발적이고 충격적인 이야기다. ‘광인’으로 불리는 소설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다. 단순히 망상에 빠진 사람의 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식인의 사회’나 마찬가지인 당시 중국의 봉건 사회를 통렬히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쉰의 유일한 중편소설인 「아Q정전」은 풍자의 방법으로 위선과 패배주의를 비판한다. 오늘날 ‘정신 승리’의 원조로 유명한 주인공 ‘아Q’는 날품팔이를 하면서 번 돈을 술과 도박에 소진하면서도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흔히 아Q를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중국 민중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하지만, 아Q는 그 성격이 단순하게 해명되지 않는다. 아Q는 중국 민중의 열악한 근성을 보여 주는 한편, 지배 계급에 핍박받는 하층민을 상징하기도 하며 인간적 진실성을 내보이기도 한다. 루쉰의 교묘한 해학은 아Q라는 문제적 인물에게서 냉소와 연민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번 개정증보판에 새로이 수록된 「상서」에서는 루쉰의 아이러니와 패러독스가 한층 빛난다. 이 작품은 일인칭 화자인 남성 주인공 ‘쥐엔성’이 죽은 애인 ‘쯔쥔’과의 과거를 회상하며 애도하는 수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사람은 봉건적 사랑이 아닌 자유연애를 추구했으나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다. 쥐엔성은 차츰 쯔쥔을 탓하게 되고, 두 사람의 갈등이 깊어져 쯔쥔은 쥐엔성을 떠난다. 이 수기 형식의 소설은 현재의 쥐엔성이 과거의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와 그 뒤에 숨은 작가가 현재의 쥐엔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뒤섞인 복합적인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서술 기법의 완성도나 페미니즘적 주제 의식 면에서 탁월한 이 작품을 이번 개정증보판에 수록함으로써 루쉰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욱 넓히고자 했다.


냉엄한 현실 인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지금 다시 루쉰을 읽어야 하는 이유


2023년 초, 중국에서는 ‘쿵이지 문학’이 화제가 된 바 있다. 쿵이지는 루쉰의 소설 「쿵이지」에 등장하는 인물로, 구시대의 궁핍하고 비루한 지식인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중국 청년들은 스스로를 쿵이지에 빗대며 깊이 공감했다. 이렇듯 루쉰의 소설은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거듭 읽히며 회자되고 있다. 냉엄한 현실 인식으로 시대를 들여다본 루쉰의 문학은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보여 준다.
루쉰은 인간의 삶과 사회에 드리운 어둠과 허무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지만, 그의 시선을 그저 냉소주의나 허무주의로 해석할 수는 없다. 현실을 철저히 묘파하는 가운데 피어나는 희미한 희망이 루쉰 문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가령 「고향」에서는 그 희망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고향」의 주인공은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친구와 재회하고 연민을 느낀다. 어린 시절에 친했던 친구는 생계를 위해 그릇을 훔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주인공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을 꿈꾼다.

몽롱한 가운데, 나의 눈앞에 해변의 초록빛 모래밭이 펼쳐졌다. 그 위의 쪽빛 하늘에는 황금빛 둥근 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본문 63~64면)

루쉰은 암흑의 현실을 담담히 인정하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청년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아이들을 구하자’라는, 「광인일기」의 마지막 외침과도 연결된다. 다음 세대를 향한 루쉰의 애정과 희생 의식은 이후 중국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중국 근대의 봉건적 현실을 꿰뚫어 본 루쉰의 소설은 여전히 새롭게 읽혀야 한다.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거니와, 특히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에는 더욱 절실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중국 문학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 루쉰의 문학을 지금, 다시 만나 보길 권한다.




어신을 찾아서
장웨이 저 / 최창륵 역 / 18,000원 / 문학과지성사

산들은 참으로 많은 신비한 비밀들을 감춘 채
우리가 찾아내 파헤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생태주의 문학의 효시, 장웨이산골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그린 대자연의 위엄과 인간

자연의 힘을 믿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는 현대 중국문학의 거장, 중국 생태주의 문학의 효시 장웨이의 작품집. 장웨이는 진지한 문제의식, 예술적 감수성과 문학적 형상화, 서사력, 문체의 완성에서 두루 최고의 성취를 보여주는 소설가로, 그의 작품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고도성장기 중국의 시대상과 인간 욕망의 비루함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참회가 담겨 있다.

‘개혁개방’ 초기의 시대적 변화와 젊은 세대의 열망을 담고 있는 「원두막의 밤」은 소박하면서도 익살스런 언어로 구수한 흙냄새를 풍긴다면, 중국 인민의 집단적 수난사와 개인의 인생담을 아우르며 바닷속 세상이라는 유토피아를 그려낸 「바닷가 호루라기」의 낭만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문체는 바다의 냄새, 혹은 요정의 언어를 닮았다.

한편 최근작인 「어신漁神을 찾아서」는 간결한 문체와 담담한 어조로 자연과 가장 가까이에 근접해 있는 인간의 정과 소망을 그려내 산과 물이 아우르는 노숙함과 친근함이 배어 있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은 작가가 직접 고른 초 ㆍ 중 ㆍ 후반의 대표작으로 서로 다른 문체적 특징과 영혼의 빛깔을 띠며 장웨이의 인간관과 자연관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산골 소년의 성장기를 통해 그린 대자연의 위엄과 인간
「어신을 찾아서」

장웨이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 중 하나는 만물의 조화로운 삶이다. 자연을 이루는 한 구성원이면서 자연의 주재자인 양하는 인가의 오만과, 만물을 파괴하는 세태에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집조차 드문드문한 깊은 산골에 사는 ‘나’는 아버지가 말라붙은 개울에서 주워 왔던 손가락만 한 미꾸라지의 비릿한 냄새를 평생 잊지 못한다. 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는 산골에서는 귀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되는 것만이 부자가 되는 길이기에, ‘어신魚神’의 전설을 들은 ‘나’는 그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어신을 찾아내 제자가 되기도, 또 뒤를 이어 어신이 되기도 쉽지 않다. 아버지와 함께 산속을 헤매며 힘들게 어신을 찾아내지만, 노인은 한사코 어신이 아니라고 하는데, 하지만 ‘나’는 노인 곁에 남아 그의 양아들이자 제자가 된다. 노인은 마땅히 교육을 해주지는 않지만 ‘나’는 몇 년을 곁에서 함께 살며 자연스럽게 물고기 잡는 법을 터득해간다. 또한 탐욕과 질투로 얼룩진 산속 두 어신 집안의 사연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후세대의 애절한 사랑, 살아남기 위해 숨어 살 수밖에 없었던 노인의 사연을 듣게 된다.
이 작품은 일찍부터 인간과 자연의 관계, 욕망의 문제 같은 철학적 · 우주적인 테마를 사유했던 장웨이의 사상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혹독한 자연 속에서 살아남으려 분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동시에 인간의 탐욕이 이 작품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연의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사람들은 몇몇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을 어신이라고 추앙했으나 그것은 사람들의 관점일 뿐이고, 어신은 물고기를 잘 잡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이 모든 산의 생태계를 지키는 존재인 것이다. 우주 삼라만상과의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는, 중국 생태주의의 효시로 주목받은 장웨이의 인간관과 자연관이 잘 성숙하여 녹아들어간 작품이다.

20세기 후반 변혁기 중국
성찰과 풍자, 서정성으로 버무린 그들의 초상
「바닷가 호루라기」「원두막의 밤」


10대에 문화대혁명을, 20대 초반 신시기의 풍운을 겪은 장웨이는 당시 중국의 사회 모순과 시대상을 비판하고 ‘인간에 대한 성찰’을 독창적으로 형상화했다. 동시에 고전적 테마를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며, 근대문학이 달성한 고전적 의의와 그것의 초월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바닷가 호루라기」는 마오쩌둥의 주도하에 1958년부터 1960년 사이에 벌어진 중국의 ‘대약진 운동’을 배경으로 온갖 수난을 겪는 한 바닷가 마을의 처참함을 기록하고, 환상적인 요소로 휴머니즘을 담아낸 작품이다. ‘대약진 운동’은 마을 사람들이 집단생활을 하면서 모든 식품과 재산을 공유하고 획기적인 과학 발명과 생산 혁신을 이루고자 한 사건으로, 이 시기 중국은 무리한 국가 경제 건설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촌락 등 사회 기층조직에서는 공산주의 사회를 신속히 이루기 위해 집단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는 인간적인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거짓 보고와 충성을 조장하여 심각한 경제적 파탄을 초래했으며, 그 결과 2천만 명이 넘는 사람이 아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작품에서는 배고픔에 못 이겨 피신한 사람들을 모두 품어주는 너른 자연(바다)을, 그리고 사회적 틀에서 벗어난 주인공의 근원적인 인류애를 판타지적인 요소와 함께 표현했다.
「원두막의 밤」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초기 경제 체제 전환기의 혼란과 신(新)-구(舊) 세대의 갈등과 융화, 젊은이들의 풋풋한 사랑을 발랄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던 작가의 경험이 투영된 장웨이의 소설은 농어촌 사회의 모습, 자연과 환경의 파괴, 하층민들의 고난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장웨이는 개인의 이야기와 공동체의 역사적 체험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심미적 형식, 중국 현대사의 극적인 대목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매개로서의 알레고리, 인간 본성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통찰을 보여준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에서는 모두 인간들이 다른 인간에게 주는 위안과 온기(溫氣)로서 어려움을 극복해낸다. 그 근저에 흐르는 것은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본질적인 휴머니즘이다.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
조선미 저 / 17,500원 / 북하우스
 
“좌절과 시련,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
대한민국 부모 멘토 조선미 교수의 대표적인 자녀교육서
10년간 사랑받은 자녀교육 스테디셀러, 개정판 출간!
새로운 육아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대한민국 부모 멘토 조선미 교수의 대표적인 자녀교육서. 어떻게 하면 아이가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할까? 부모가 어떤 양육 태도를 지녔는지에 따라, 아이의 ‘고통에 대응하는 능력’에 차이를 만들어낸다.『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에서 저자는 탄탄한 심리학적·과학적 연구 결과들과 수십 년 동안의 임상 심리 경험을 바탕으로, 고통 내성을 키워줘야 전 생애에 걸쳐 경험하는 행복의 절대치가 높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양육의 핵심 원칙을 제시하는 필독 육아서이자 자녀교육의 교과서 같은 책.
조선미 교수는 이 책에서, 고통과 상처는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짚어내면서, 자녀를 행복한 아이로 성장시키는 본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양육 원칙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세상에는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일이 있음을 가르쳐라”, “아이의 머리, 손발이 되어주지 마라”, “실수로 인한 고통을 겪게 하라” 등 부모들을 위한 뼈 있는 조언들을 가득 담아놓았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사회성, 좌절내구력, 문제해결 능력, 적응력, 유연성을 갖출 수 있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내면이 단단한 아이로 성장하게끔 이끌 수 있는지를 전문가로서의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명쾌하게 얘기해준다. 육아의 불안함을 잠재우고 중심을 딱 잡아주는 부모들을 위한 자녀교육서.
 
“아이를 사랑한다면 좌절을 겪게 하라”
육아 패러다임을 바꾸는 조선미 교수의 자녀교육 필독서
10년간 사랑받은 자녀교육 스테디셀러, 개정판 출간!


“상처는 아이를 쓰러뜨리는 게 아니고 그것을 딛고 넘어섬으로써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보듬을 수 있으며, 결국은 그것을 통해 영혼이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_본문 중에서

어떤 아이가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할까? 부모라면 누구나 자신의 아이가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는 새로운 육아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대한민국 ‘부모 멘토’ 조선미 교수의 대표적인 자녀교육서로, 탄탄한 심리학적·과학적 연구 결과들과 수십 년 동안의 임상 심리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아이에게 고통 내성을 키워줘야 전 생애에 걸쳐 경험하는 행복의 절대치가 높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필독 육아서이자, 양육의 핵심 원칙을 제시하는 자녀교육의 교과서 같은 책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많이 갖고 많이 누린다고 해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삶에 공식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하버드 대학교의 ‘그랜트 스터디’ 연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요인이 행복을 좌우한다. 고통에 대응하는 능력, 교육, 안정된 결혼생활, 금연, 금주, 운동, 적당한 체중. 그중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손꼽힌 것이 바로 ‘고통에 대응하는 능력’이다. 고통에 얼마나 성숙하게 대응하느냐, 힘들고 어려운 일을 얼마냐 잘 견디느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 이는 역설적으로 고통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하면 삶을 더 힘들게 느낀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이를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애지중지 키웠는데, 아이가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겠다고 하고, 힘들고 어려워서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혹시 부모들의 양육 태도가 잘못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워라』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주는 책이다.

조선미 교수의 철학이 담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자녀교육의 원칙


저자는 이 책에서, 고통과 상처는 성장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짚어내면서, 자녀를 행복한 아이로 성장시키는 본질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양육 원칙을 선명하게 제시한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게 하라”, “아이의 머리, 손발이 되어주지 마라”, “실수로 인한 고통을 겪게 하라”,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모두 소중함을 알려줘라” 등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아이로 성장하도록 이끄는 조언들을 책에 가득 담아놓았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게 사회성, 좌절내구력, 문제해결 능력, 적응력, 유연성을 갖추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내면이 단단한 아이로 성장하게끔 이끌 수 있는지를 전문가로서의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명쾌하게 얘기해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삶에서 고통은 필수적이기 때문에 고통을 줄이는 것보다 그것을 감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라면서, 부모로서 아이가 좌절내구력을 키우고, 세상의 이치를 배우고, 스스로 달래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돕는 게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세상에는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일이 있으며,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그 어떤 부모라도 아이에게 모든 것을 줄 수는 없으며,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부모가 ‘사랑’과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아이의 욕구를 무한정 다 들어주고, 아이가 느낄 불편함을 미리 제거하고, 아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나서서 해주면, 아이는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고, 아이의 좌절내구력은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부모의 마음이 오히려 아이에게 괴로움을 가중시키고, 아이에게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좌절과 실패에 맞닥뜨렸을 때 이를 잘 견디도록 훈련된 아이는 성장할수록 더 빛을 발한다. 좌절내구력이 취약한 아이에 비해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학업성취도도 더 뛰어나다.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사회 적응도 뛰어나고 행복지수도 더 높게 나타난다.
상처는 아이에게 성장의 원동력이다. 시련과 좌절을 견디고, 자기 통제를 통해 자신감을 얻고, 원만한 사회적 관계를 통해 즐거움을 경험한 아이들이 결국 성장의 기쁨을 맛본다. 좌절하고 실패해도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아이,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아이, 반복된 훈련과 연습을 통해 문제해결력을 키운 아이, 세상의 규칙과 가정의 규칙이 다름을 이해하는 융통성 있는 아이가 궁극적으로 행복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된다. “사랑할수록 좌절을 겪게 하라”,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라” 등 이 책이 제시한 양육 태도를 부모가 견지한다면, 똑같은 일을 겪어도 삶에서 느끼는 것들을 아이가 훨씬 덜 고통스럽게 느끼며 성장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 좌절내구력을 키워주는 열 가지 핵심 양육 원칙

1. 세상에는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어도 참아야 할 일이 있음을 가르쳐라.
2. 아이의 머리, 손발이 되어주지 마라.
3. 무엇을 허용할지보다 어떤 규칙이 필요한지를 먼저 결정하라.
4.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게 하라.
5. 실수로 인한 고통을 겪게 하라.
6.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님을 알게 하라.
7. 세상의 규칙은 가정과 다름을 알려주어라.
8.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이 모두 소중함을 알려주어라.
9. 자유와 자율을 줄 때 똑같은 정도의 의무와 책임을 주어라.
 
 
 

달의 웃음은 뒷면에 있었네
조선미 저 / 17,500원 / 북하우스
 
'어두움을 쓰다듬어 환하게 살이 오른 달의 진면목을 나는 보았네'
지루한 내리막을 한없이 배웅해 주는 달의 미소. 《달의 웃음은 뒷면에 있었네》는 신장련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다. '모래시계'를 비롯해 69편의 시가 실렸다.

‘어두움을 쓰다듬어 환하게 살이 오른 달의 진면목을
나는 보았네’

시인은, 어두움도 쓰다듬으면 환하게 살이 오르고, 세월을 넘어선 아픔은 말랑하게 품속을 파고든다고 속삭인다. 기다림도 사랑이고 무관심도 때로는 약이 되니 순응하며 쉬엄쉬엄 살자고. 시인의 지나간 시간은 그래서 꽃으로 다시 피었다. 참 따뜻한 위로다.



“달의 웃음은 뒷면에 있었네”

달은 언제나 미소만 지을까?

등을 느긋이 붙이려 해도 새벽이면
좀이 쑤셔 들썩이는 농군처럼
두충나무 허전한 어깨가 꿈틀거린다

미소 지을까 활짝 웃을까 생각을 만지작만지작
달이 흔들린다

여간해선 부시지 않는
은은한 온기의 원천을 찾아 진정한 얼굴이 보고팠다
기필코 찾으려 애태우다 돌아오던 달맞이 고개의
지루한 내리막을 한없이 배웅해 주던 미소

미소만으로 세상이 굴러간다면야
풀무질하며 바삐 뜀박질하다 올려다본 달은

바람에 씻겨 까풀만 남은 고도 빈혈을 벗고
어두움을 쓰다듬어 환하게 살이 오른 달의 진면목을
나는 보았네

쪽을 찌어 빛나는 아미에 땀이 흐르고
은화처럼 도톰한 계수나무잎의 무구한 인연이 사라질까

한 잎 한 잎 채색하느라 계수나무에 걸쳐 두었던
생기 넘치고 활력에 찬 얼굴을 미처 숨길 수 없었던가
파안의 사발꽃이여

달의 웃음은 뒷면에 있었네.

“바람도 사랑이다”

구부정한 가지가
암만
눈에 거슬린다

지지대를 세우려다
어련히 휜 가지로 살아갈까
요령껏 살라 했네

기다림도 사랑이다
때로는 무관심도 약이 되던가
굽은 허리 펴고
뒤늦은 화답
꽃봉오리 곧게 치켜들었다

바람의 속심을
꽃이 먼저 넘겨짚고
꽃의 눈치를 바람이 모를 리야
활갯짓치고 어깃장 부려도
기필코 꽃에게로 온다

굽은 등을 오래 어루만졌으리
꽃과 바람은
세세생생 한 몸
제아무리 어먼 길 가도

꽃 피고
씨알 영그니
바람도 사랑이다.

“함박꽃 피지 않는 함박도”

무량리행 버스는 하루에 한 차례뿐이다
이정표 앞에 멍하니 무량한 그 이름 입술에 뇌이면
순박한 사람들 떠올라

함박꽃웃음, 가리는 소매 너머
무량한 사람 만나고 싶은 꿈 뭉게뭉게 피어나
길 잃은 마음이 먼저 앞서가 닿는 곳

다 닳은 돌쩌귀에 문설주가 몸 말리고 서 있는 곳
서슬 푸르른 지난 시간들이 자글자글 졸아들어
길가에 머리 희끗희끗 풀들이 나와 있다

갱변 깊숙이 걸어 들어간 투망꾼 몇이서
왁자하게 그물을 던진다
금빛으로 날아간다

이리저리 튀는 밴댕이를 잡았다 놓아주니
밴댕이란 놈도 바다가 무료해 잡혀 주기도 하는지
잊힌 이름인데 함박웃음은 살아 있다

길에서 산짐승을 만나도 피할 일 없이 면면한 함박도
무량리 주소를 주머니에 깊숙이 접어 넣고 나니
부력을 잃고 뜬 밴댕이처럼 시간을 바다에 자빠뜨리고

느릿느릿 구멍 난 그물을 걷고 또 투망 한다
그래, 함박도
마음속 청산처럼 오고 갈 줄 모르고 거기 떠 있다.











빛과 이름
성기완 저 / 12,000원 / 문학과지성사
 
“시간은 텅 비어 흘러가네 처음처럼”
점점 넓어지는 부재의 공간을 바라보며 부르는 끝없는 사랑 노래
성기완 여섯번째 시집 출간
1994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를 통해 시단에 등장해 욕망의 파편들을 실험적이면서 감각적인 방식으로 펼쳐온 성기완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빛과 이름』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적 무정부주의자”(김현문학패 선정의 말)라는 평처럼 시인은 그간 한국 현대시의 기준을 허물고 그 자장을 끝없이 넓히며 자유분방한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불온한 욕망, 의미 없음, 사랑에 관한 언어의 실험, 시와 음악의 결합 등이 그의 30년 가까운 시력을 대변한다.
이번 시집 전반에 담긴 정서는 올해로 작고한 지 10년이 된 그의 선친 故 성찬경 시인을 비롯한 모든 이별한 존재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통탄과 그리움이다. 첫 시의 마지막 행 “누런 오후 하늘에 달무리 지”(「눈-20130226화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오후」)는 풍경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 “무릎을 말아 쥔 채/기다리”던 “어둠을”(‘시인의 말’) 짐작게 한다. 상실감에 굴복한 채 한곳에 고여 웅크리고 있을 법한 이 애절한 슬픔은 이어지는 시편들에서 다시 음악처럼 ‘들리는 것’으로 자세를 바꿔 더 깊은 울림으로 오감을 뒤흔든다. 슬프면 슬픈 대로 “끝없이 노래하”(「게으른 기타리스트의 발라드-Où sont les neiges d’antan?」)게 하는 동력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때로 이름과 함께 절절히” 사랑했던 사람들을 하나둘 꺼내며 “스테이지에 홀로 서서 부르는 사랑 노래”(황유원).

놓고 가신 님 뒤안길에/전구가 녹아 흘러 빛이 출렁여/아리랑 아리랑 우는 바람 소리/귀청을 찢고 목청으로 파고들어/곡소리가 절로 나와 부질없이 빌며/문지방 너머 맨발로 뛰쳐나오며/되뇌니이다/사랑해요/사랑했어요/사랑만을 했어요
-「놓고 가신 님」 부분
영원 너머 빛이 된 이들과의 추억을 써 내려간 출석부

『빛과 이름』은 총 51편의 작품을 5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곳곳에는 시인이 잃어버린 인물들이 편재해 있다. 그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 인생을 다 주었”(「지지난 꿈에 나왔던 지난 꿈의 사람」)을 만큼 사랑했던 이름들의 “출석을 부른다”(「영원-웅천석재에서」). 처음으로 호명되는 것은 ‘아버지’다. 아버지가 부재한 10년 동안 그를 그리워하며 쓴 시편들에는 아들이 올 걸 어찌 알고 현관문을 열면 늘 앞에 서 계셨지만 이제 문밖에서 “초인종 눌러도 당신은 없”으니 “속속들이 사무치게 그”(「마중」)리운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빤히 보이진 않아도 깃들어 계신 당신”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어디에나 있게 되는 것”(「물결-오스틴 텍사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리버 보트 셔플」)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넘실거리며 물이 떠나”고 “너도 떠나”(「untied 물이 나가네-파도의 록 스테디」)는 광경은 결코 면역되지 않는 먹먹한 슬픔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감정은 ‘할머니’(「헛기침-할머니의 절대적 모럴을 기리는 향가」), 잠정 해체한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응암동 오 남매 왈츠」), 고양이 ‘나비’(「우리집고양이녹색눈다이아몬드-떠나간 나비의 모듈러 신시사이저」)와 강아지 ‘슈’(「복숭아 소네트-슈 환상곡」) 그리고 ‘가을이’(「마이크로증폭우주밤산책-슈와 가을이에게」), ‘할아버지’ ‘괴테’ ‘재홍 아저씨’와 ‘홍성 고모’ 그리고 故 방준석 음악 감독 등으로 확장된다. “여긴 어딘가요 다들 어디 계신가요”(「죽음은 흰 천을 반으로 접는 일입니다-순간의 현상학」)라는 외침과 함께. 망망대해만큼 커다란 슬픔이 남긴 시구들은 “전구가 녹아 흘러 빛이 출렁여/아리랑 아리랑 우는 바람 소리”(「놓고 가신 님」)가 된다.
그럼에도 그는 비탄에 잠기지 않고 ‘영원’을 공감각화하고자 한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빈자리로 가득 찬 출석부를 부르다 “빛이 나”는 “영원”(「날개」)이 자리에 있는 것을 바라본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화장터에서도 “시선을 돌려도 무늬의 중심에 [……] 빛”이 있고, 빛은 영원한 이별이 아닌 항상 곁에 있다는 전언처럼 “빛을 타고 빛의 속도로”(「아뉴스 데이-화장터에서」)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리듬 위에서 일렁이던 슬픔이 허문 음악과 시의 경계

지판 가생이에 하얀 자개 스트라이프가 박혀 있는 스타일 윗줄 네 개를 검지로 한꺼번에 짚으며 한 손가락만 높은음을 따로 짚는 그런 코드 운지 코러스가 배경에 깔린다 좋은 노래다 싶은데 이걸 근데 누구랑 부르지
-「몽유세한도」 부분

잘 알려진 것처럼 시인 성기완은 록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의 리더였으며 SSAP 프로젝트로 활동하며 뮤지션이자 라디오 DJ, 문화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올해는 그가 뮤지션으로 활동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해 ‘쿰바와 영실들’이란 이름으로 싱글 앨범 『네오 소울 곡집 vol. 1』이 시집 출간과 때를 같이해 발표된다. 이 앨범에 수록된 「몽유세한도」는 이번 시집에 실린 동명의 작품을 낭송해 청각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며, 타이틀곡인 「Fever Song」은 시집 수록작 「빛-49재」에 등장하는 故 방준석 음악 감독을 추억한 곡이다. 시와 음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시각적 텍스트를 완독한 후의 여운을 청각을 통해 이어갈 수 있으니 시집을 읽고 그의 음악을 듣는다면 더욱 특별한 독서가 될 것이다.
해설을 쓴 황유원 시인이 “이름을 실컷 부른 김에 노래도 한번 불러보자. 아니, 노래를 부르듯 이름을 불러보자”고 한 것처럼 “기타에 피가”(「영원-웅천석재에서」) 튀도록 노래하던 그는 이제 “기타가 된 나무가” 된다. 넘치는 에너지와 끝없는 실험 정신으로 사랑을 노래하던 소년은 다시 “마음의 마당이 부풀어 올라/무한한 들판이”(「게으른 기타리스트의 발라드-Où sont les neiges d’antan?」) 된다. 남은 슬픔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더 곧고 넓은 사랑을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소희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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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놀라운 S, 끝없이 새로운 F
무한하게 펼쳐지는 S-F의 세계
독자의 환상적인 사유를 자극하는 특별 기획, 『SF 보다-Vol. 2 벽』이 출간되었다. 한국 SF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문학과지성사는 〈SF 보다〉를 통해 문학의 스펙트럼을 한층 더 넓혀나가고자 한다. 동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를 바탕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들의 눈부신 상상력을 가득 담은 이 시리즈는 테마와 다각도로 연결되는 하이퍼-링크와 여섯 편 이상의 단편소설, 장르 전반을 아우르는 크리티크로 구성되며, 상반기와 하반기에 나눠 1년에 두 권 출간된다. SF 스토리텔링의 선두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작가 문지혁, SF를 향한 애정으로 국내외 작품들을 누구보다 꼼꼼하게 읽고 쓰는 SF 평론가 심완선이 〈SF 보다〉의 기획위원으로 함께한다.
『SF 보다-Vol. 2 벽』에는 ‘벽’을 테마로 한 듀나의 「아레나」, 아밀의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이산화의 「깡총」, 이서영의 「월담하려다 접천」, 이유리의 「무너뜨리기」, 정보라의 「무르무란」 총 6편의 단편소설이 묶였다. 또한 시작과 끝에 붙은 하이퍼-링크와 크리티크는 제재와 장르에 대한 통찰을 더함으로써 독자의 사고를 너르게 확장한다.
SF 쓰기가 인간과 물질과 시공간을 둘러싼 미지의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일이라면, SF 읽기는 그 세계의 예측 불가능성을 경험하는 일이다. Science, Space, Speculative, Society 등의 수많은 ‘S(story)’와 Fiction, Fantasy, Fabulation, Future 등의 다채로운 ‘F(frame)’가 열어 보이는 〈SF 보다〉의 독서 공간에서 독자는 ‘낯선’ 경험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벽을 넘어 밀려오는 상상력의 개벽!

분리되고 연결되는 여섯 가지 세계
마침내 허물어지는 안과 밖의 경계

〈SF 보다〉 시리즈 두번째 책의 주제는 ‘벽’이다. 벽은 공간의 둘레를 막는 데 쓰이는 건조물이며,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관계 등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이처럼 무언가를 차단하고 제한하는 것이 벽의 쓰임이지만, 상상의 영역에서만큼은 그 반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상상력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부분, 무언가에 의해 가려진 이면, 경험해본 적 없는 미지의 일에 의해 자극되기 때문이다. 벽을 마주한 이는 그 ‘너머’를 궁금해하기 마련이고, 나아가 안과 밖, 이쪽과 저쪽, ‘너’와 ‘나’를 가름하는 기준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과 의문은 역설의 틈을 파고들고 사유의 벽을 넘어뜨리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

벽은 나누고 막고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인류의 유구한 역사가 이를 증명하며,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그러나 벽은 반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스토리텔링 이론에서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은 몇 단계로 압축된다. 그중 중요한 단계는 영웅이 현실에서 비현실로 넘어가는 순간인데, 우리는 이 지점을 문지방threshold이라 부른다.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모험 사이에는 언제나 (비록 문지방처럼 야트막할지라도) 벽이 세워져 있고, 이를 넘는 행위는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을 의미한다. 문지방 너머에는 새로운 세계, 주인공을 필요로 하는 낯선 우주가 기다리고 있다.
-문지혁, 하이퍼-링크 「넘을 수 없는, 넘어야 하는」에서

한국 SF문학 현장에서 눈부시게 활약하고 있는 여섯 작가(듀나, 아밀, 이산화, 이서영, 이유리, 정보라)가 『SF 보다-Vol. 2 벽』과 만나 다채로운 이야기를 펼친다. 오랜 옛날의 바위 벽, 인공적으로 세워진 장벽, 격리와 구분을 위한 가상의 벽, 마음의 벽, 시공간과 차원의 벽 등 다양한 형태의 벽들이 여섯 개의 특별한 세계를 창조한다. 벽을 응시하고, 두드리고, 부수고, 마침내 뛰어넘는 소설 속 인물들은 독자를 또 다른 가능성의 지평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단편들과 함께 실린 문지혁의 하이퍼-링크 「넘을 수 없는, 넘어야 하는」과 심완선의 크리티크 「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 가지 일」은 벽이라는 제재가 문학의 영역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왔는지 이야기한다. 벽으로서의 벽, 문으로서의 벽, 성으로서의 벽, 나아가 세계로서의 벽을 톺아보고 그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되짚어봄으로써 벽이 환기하는 분리와 연결의 감각을 지금 여기로 불러온다.


듀나 「아레나」
“끝나지 않는 프로레슬링, 격투장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들. 우린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하는 걸까.”

도시철도 공사장의 진홍색 젤리 지층에서 시작된 적사병. 이로 인해 남한은 물리적으로 고립된 쿼런틴 상태에 놓이며, 적사병을 일으킨 프로스페로 생태계는 생존자 일부를 초능력을 지닌 알파히어로로 만든다. 알파히어로들이 팀을 꾸려 활동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비밀이 늘어나면서 진실은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쓰일 수 있는 재료”로 전락한다. 격리의 장벽으로 둘러싸인 이 땅은 오락처럼 전투가 펼쳐지는 가공과 조작의 ‘아레나’다.


아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
“모든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 모든 피아니스트는 저마다 다른 연주를 한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다양한 화음, 유려한 강약 조절, 정확한 터치…… 손이 작은 피아노 전공생 ‘나윤’에게는 전부 어렵기만 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나윤은 우연히 ‘차원의 마녀’를 만나고, 이내 4차원의 존재가 되어 필요에 따라 손의 좌우를 반전하고 손가락의 배치를 바꾸며 자유롭게 건반을 누를 수 있게 된다. 신체적 한계를 넘어선 나윤은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각국 언론의 조명을 받지만, 계속될 듯했던 탄탄대로는 곧 끊기고 만다. 나윤에게 진정 “넘을 수 없는 벽이란 무엇이었을까”.


이산화 「깡총」
“라일리의 귀는 이전까지 간과했던 지극히 사소한 무언가를 포착하기 시작했다. 돌아오지 않는 토끼들이 깡총 뛰는 순간, 섬광과 함께 어디선가 반드시 들려오는 희미한 메아리였다.”

토끼는 수천 킬로미터 길이의 울타리도, 섬과 바다도, 황무지의 장벽도 뛰어넘는다. ‘깡총’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있는, 이 사뿐하면서도 힘찬 도약 덕에 토끼의 개체 수는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으며 그에 따라 인류는 초토화된 농지와 대기근을 맞닥뜨린다. 한편 어떤 토끼들은 시간마저 뛰어넘어 순간의 빛과 ‘찰박’ 소리만을 남긴다. 허공으로 사라진 토끼들이 닿는 곳이 어디든, 그로 인해 인간에게 어떤 일이 닥치든, 이는 그저 “오로지 토끼인 채 끝까지 깡총깡총 뛰어 도망쳐 온 결과”일 뿐일 것이다.


이서영 「월담하려다 접천」
“연경의 눈에는 모든 현정이 아름답게 빛났다. 현정은 달렸고, 춤췄고, 노래했다. 사랑하기도, 아이를 낳기도, 여러 가지를 꿈꾸기도 했다. 현정의 시간선 하나하나에 손을 댈 때마다 그 위의 현정이 꽃잎처럼 생생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모든 네트워크가 절멸한 세상. ‘연경’은 운 좋게도 방패님의 가호 아래 방패막이 둘러쳐진 서울에 산다. 그러나 친구 ‘현정’은 서울 바깥에 인터넷이 남아 있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연경은 그를 찾기 위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방패님의 뜻을 거스르며 인터넷 접속을 시도한다. 그렇게 방패막이라고 믿었던 공고한 벽과 여러 겹의 차원을 넘어서다 하늘에까지 닿아버린 연경은 끝없이 펼쳐진 수많은 시간선과 그 속의 현정들을 마주한다.


이유리 「무너뜨리기」
“그러던 와중 시원하게 방귀. 범선이 내는 뱃고동 소리 같은 우렁찬 방귀가 울려 퍼진 것이다. 심지어 저녁 식사 시간에.
그것이 뱃고동이라면 분명 항구를 떠나는 소리일 거야, 하고 수정은 생각했다.”

부부로서 7년을 함께 지내온 ‘수정’과 ‘정진’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사랑보다는 차라리 우정이나 의리에 가깝다. 이에 정진은 수정에게 마음의 벽을 쌓아 올림으로써 잃어버렸던 감정을 되찾아준다는 리빌딩rebuilding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익숙하게만 느껴지던 서로가 “벽 너머의 저 사람”이 되면서 이들의 가슴은 새롭게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동안 품고 있던 관계에 대한 회의감은 그렇게 일단락되지만, 갑작스레 집으로 들이닥친 두 괴한이 또 다른 물음표를 던진다. 다시 세워진 마음의 벽은 설렘의 재건일까 안정의 함락일까.


정보라 「무르무란」
“죽은 사람을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검은깃털은 축제 행렬 끝에서 기괴하게 몸을 비틀던 형체를 떠올린다. 양손으로 배를 감싼다.”

신석기 시대의 바위 벽은 후손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설명하는 창구다. 사냥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법, 동물의 짝짓기와 출산 시기 등을 벽에 기록하는 일은 사냥에 능한 사람에게만 허락되며, 특히 임신한 자의 그림은 사냥 실력을 새로운 생명에게 불어넣는 행위로 간주된다. 이 바위 벽에 그림을 새길 자격을 얻은 ‘검은깃털’은 어느 날 축제 행렬 끝에서 거무레하고 낯선 무언가를 발견한다. 죽은 자가 돌아왔으니 이제, 무르무란을 부를 차례다.





0번 버스는 2번 지구로 향한다
김준녕 저 / 16,800원 / 고블 (도서출판 들녘)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수상작가 김준녕 작가의 첫 SF 소설집

“한 사람이 창조한 세계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필히 마주하게 될 질문이리라. 작가는 SF라는 장르적인 틀을 유지하는 동시에 문장의 톤, 이야기의 완급조절을 단편마다 변주하며 각기 다른 장르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이 소설집에서는 블랙코미디와 사회풍자로 점철된 소설이 있는가 하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섬세히 살펴보는 소설, 관념과 사유를 중심으로 돌진하는 소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을 절묘하게 풍자한 코미디를 보며 웃음을 짓다가도, 운명적인 비극을 뼈저리게 묘사한 문장을 마주했을 때는 가슴을 칠 것이며, 인간 문명 이후의 세계를 통시하는 놀라운 광경까지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준녕 작가가 이 소설집에서 빚어낸 SF적 사고들은 우리의 피부에 맞닿아 있듯이 통렬하게 다가온다. 수많은 독자를 깊은 경이감으로 매료시킨 그 모든 SF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덮고 나면 독자들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와는 또 다른 지구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하며 위안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전에 보지 못한 다채로운 감동
사회에 대한 통렬한 시선
그리고 경이로움….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 수상작가
김준녕 작가의 첫 SF 소설집

『막 너머의 신이 있다면』으로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후 각종 매체를 통해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김준녕 작가의 단편소설을 모은 소설집 『0번 버스는 2번 지구로 향한다』가 출간됐다. 일찍이 『막 너머의 신이 있다면』에서 인간의 생존 투쟁이 담긴 기나긴 역사를 SF라는 렌즈를 통해 절묘하게 묘사해냈다는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김준녕 작가는, 이 소설집에서도 각종 스타일의 단편을 선보이며 서로 다른 인간군상이 다양하게 얽히는 지점과 사회의 다채로운 측면을 묘사한다.

“한 사람이 창조한 세계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필히 마주하게 될 질문이리라. 작가는 SF라는 장르적인 틀을 유지하는 동시에 문장의 톤, 이야기의 완급조절을 단편마다 변주하며 각기 다른 장르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이 소설집에서는 블랙코미디와 사회풍자로 점철된 소설이 있는가 하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섬세히 살펴보는 소설, 관념과 사유를 중심으로 돌진하는 소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을 절묘하게 풍자한 코미디를 보며 웃음을 짓다가도, 운명적인 비극을 뼈저리게 묘사한 문장을 마주했을 때는 가슴을 칠 것이며, 인간 문명 이후의 세계를 통시하는 놀라운 광경까지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얽매는 굴레에서 과연 빠져나갈 수 있을까?
유머가 뒤섞인, 현대의 부조리가 극대화된 사고실험

기술이 발전하면 사회의 수준도 그만큼 발전할까? 어쩌면 ‘맞다’고 할 수 있고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물음에서 말하는 ‘사회의 수준’이라는 것이 어떤 이념을 반영한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적어도 순수한 기술 발달만으로는 누구나 행복하게 사는 사회를 이룩시키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현대의 첨단 기술이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의 착취를 바탕으로 이룩되고 있기 때문이다.

「빛보다 빠른 빚」은 부채 사회가 최대한으로 발전한 세계를 그린다. 자본주의 시장은 곧 빚과 빚을 통해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개개인의 채무에 대한 안전망이 제도적으로 아예 말소된 사회라면? 개개인이 채무를 갚지 못하면 죽음을 선택할 자유마저 빼앗간다면? 심지어 그게 개인의 책임을 넘어 혈연으로 이어진다면? 미래의 첨단 기술이 부조리한 목적을 위해 개발될 시 도래할 사회풍경을 블랙 유머를 곁들여 의미심장하게 재현한다.

「망자를 위한 땅은 없다」는 온갖 우주의 외계인들이 태양계에 모여 태양이 폭발하는 광경을, 마치 오늘날의 올림픽 개막식처럼 구경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이 거대한 스케일은 마치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의 한 장면처럼 방대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소설의 목적은 태양 폭발의 경이로운 풍경 묘사에 있지 않다. 바로 부동산 투기 경쟁이 전우주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시대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핍과 핍의 오랜 조상들이 벌였던 땅 투기 경쟁, 그리고 핍이 살아가는 시대에 펼쳐지는 우주적 스케일의 투기를 보고 있자면 이 소설에 이런 이름을 붙이고 싶어진다. ‘부동산 스페이스 오페라’.

순수하게 과학적인 사고실험을 유머로 승화시킨 작품도 있다. 「블랙홀 뺑소니」는 어제까지 분명 존재했던 블랙홀이 사라지는 바람에 발생한 소동을 다룬다. 블랙홀을 관측하던 연구소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가 자신의 ‘고객’이 당신들의 ‘청소기’에 부딪치는 바람에 지구가 곧 멸망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블랙홀 뺑소니」는 양자역학과 관계된 유머 코드로 SF독자의 공감을 살 것이다.

기억과 관련된 미묘한 지점을 계급적 장벽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풀어낸 「경매」 또한, 사회적 부조리가 해소되지 않은 채 지속되기만한, 먼 미래의 어느 날에 대한 통렬한 이야기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오랜 역사적 노력.

인간이 기나긴 역사를 지나오면서도 풀지 못한 숙제는 바로 ‘타인을 이해하기’다. 어쩌면 다음 세대에도, 다다음 세대에도, 인간이 멸종했을 그 언제에도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익히지 못할 수도 있다.

「팔이 닿지 못해 슬픈 짐승」 은 전염병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의 세계에서 동거하던 두 인물을 다룬다. 비록 같은 공간에서 살았지만 너무도 다른 두 인물의 행적을 통해 인간이란 과연 동일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준’은 ‘민’의 최후를 바라보는 순간까지도, 그리고 과거의 행적을 샅샅이 알게 되면서도 ‘민’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히려 전염병 창궐 이후 흔히 비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행동을 스스럼없이 자행한 이들이 더 쉽게 이해될지도 모른다.

「사이버 피쉬 트럭」 는 오랜 기간 동안 서로만큼은 이해하려고 했던 두 인물을 다룬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길에는 인간의 환경이 시시각각 변하고,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 세계는 큰 판도로 뒤바뀐다. 이 모든 건 ‘그레이 구’라는 존재의 등장 때문이며, 이 그레이 구라는 존재로 인해 침식되어 가는 문명의 변화에 따라 두 사람이 처한 환경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한다. 주인공 둘 자신마저도.

어딘가에서는 우리를 이해해줄 존재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표제작 「0번 버스는 2번 지구로 향한다」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나를 이해해줄 이가 없다면, 다른 지구에는 나를 이해해줄 누군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은 완전히 다른 환경으로 주조된,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김준녕 작가가 이 소설집에서 빚어낸 SF적 사고들은 우리의 피부에 맞닿아 있듯이 통렬하게 다가온다. 수많은 독자들을 깊은 경이감으로 매료시킨 그 모든 SF소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을 덮고 나면 독자들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지구와는 또 다른 지구에서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상상하며 위안받을 수 있을 것이다.





쓰는 사람
강이라 , 김도일 , 조영한 , 박지음 , 유희란 , 조미해 저 / 17,000원 / 득수
 7명의 문학 거장과 그들에 대한 오마주

기드 모파상, 레이먼드 첸들러, 레이먼드 카버, 모옌, 손창섭, 오헨리, 현진건. 7명의 문학 거장들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오마주, 『쓰는 사람』. 현대 작가들이 들려주는 문학 거장들의 현대적인 의미와 그 소통에 대한 6개의 소설집이다.

오마주의 시도는 창작자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원작자의 ‘영향’에 대한 당당한 맞부딪힘 그 긍정적 작법과 다양한 변이의 발생을 부추기는 실험이면서도 결코 기껍지만은 않은 도전이기도 하다. 세익스피어가 우리를 발명했다는 에머슨의 말에 뒤따르는 문장은 ‘그가 계속 우리를 구속하고 있다’이기 때문이다.
「레이먼드 레이먼드」에서 강이라는 대가의 강점을 적절하게 솎아 쓴다. 쇠락한 어촌 마을에 잠시 머무는 외지인인 입주작가들과 폐쇄된 냉동창고의 음산함은 ‘냉동창고 위에서 떨어진 사람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심상찮은 수수께끼와 함께 소설의 분위기를 단박에 만들어낸다. 뛰어내린 사람에 대한 후사 혹은 사인은 그리 중요치 않다. 결코 서사에 대한 실패를 뜻하지 않는 이 방식은 소설이 빚지고 있는 다른 레이먼드, 즉 챈들러에서 카버로 능숙하게 옮겨갈 뿐이다.
김도일의 소설 「사방」이 달성하고 있는 성취는 얼핏 작품 자체가 단말마와 같은 한 줄의 문장을 향해 달리다 내리꽂히는 「운수 좋은 날」의 서사 작법으로 보이면서도, 그 내부에 흐르는 선배 작가에 대항하는 ‘대조적’ 줄기 그러니까 인물의 불운은 ‘어쩐지’에 담긴 운수라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사실은 온갖 개연성의 연합으로 이룩되고 있다는 차별성의 구축에 있다. 그것은 한국사의 질곡 그 역사적 맥락을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물 삼대의 삶에 겹쳐놓음으로써 역사의 권위가 결코 제출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 보통 이하의 인물들을 불러오는 일, 역사를 뒤밟으며 소란이 쓸고 간 자리를 챙겨 줍는 일. 그것이 소설이 역사와 구별되는 지점임을 명확히 제시하는 소설의 사회적 기능의 표방이기도 하다.
조영한의 「나와 당신의 머나먼 이야기」는 손창섭을 오마주한다. 어쩌면 생, 그러니까 우리의 삶의 비밀은 그 자체로 욕되고 수치스러운 일면을 지니고 있다는 그 자체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우리의 생이 대체로 무구한 채로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물의 열패감은 사실은 삶이 작동한 데 대한 결과값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인간의 조건일 수 있다. 그래서 생은 ‘쓰는 자’인지도 모른다.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문학적 패배’라는 인식 역시 어쩌면 원인으로 지목한 함구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끊임없이 회의해야 하는 자들의 숙명은 아닐는지.
박지음의 「걸음」의 따뜻함은 종종 위태로운 경계들을 향해 있곤 했다. 디아스포라, 정치적 쓸모에 의해 내몰아지고 다시 불필요에 의해 버려진 자들. 조국이 배신하고 이국이 배척한 사람들의 삶은 끝내 작가의 소설 속에서 되살려진다. 온갖 수모를 겪어내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은 평범한 삶 그러니까 강간의 위협으로부터 놓여나 성실히 노동하는 로자의 삶, 곤궁한 삶 속에서 억눌려왔던 자기 말하기를 글로 써내며 사는 기철의 삶이었다. 그것이 디아스포라의 숙명이라도 된다는 듯 한 번 제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원 자리란 영영 존재하지 않음을 숱한 전쟁과 분쟁으로 또 가난과 삶을 위해 떠나고 쫓겨가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준 현실의 증명처럼 로자와 기철의 꿈은 이룩되지 못한다.
유희란의 「사소한 일」은 각 인물들의 심리를 대단히 치밀하게 쫓으며 여성 인물의 자아 감각을 지배하는 가난의 흔적과 그래서 더 가장하는 여유에 대해 기 드 모포상의 원작을 충실히 오마주하면서도 끝내 아영이 흑진주 주머니를 잃어버리는 사건을 삽입해 그를 남루한 처지로 몰아 상미의 속앓이를 중단시킨다. 상미는 결국 자신의 열등감을 아영의 실패로 치환하면서 어줍잖게 자기 위안에 이른다. 그러니까 상미의 자아 극복 양상은 타자를 생성하며 이루어지는 철저한 자기기만으로 얻어지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면들은 인물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면서도 가난이 아닌 그로 인한 상처를 얼룩 묻은 행주처럼 쥐고 있는 상미라는 캐릭터를 작동시키는 것이 다름아닌 지극한 현실이라는 점에서 오묘한 지점에 가 닿는다.
조미해의 「선을 지키는 일」에서는 모든 이가 ‘선’을 넘는데, 그래서 소설은 줄곧 팽팽한 긴장으로 이어진다. 특히 ‘나’는 남편보다 연상이라는 점을 자신의 콤플렉스로 여겨 ‘어린’ 이웃과 남편의 친구들, 그 부인들에 대해 자못 예민하다. 유라가 가버린 자리에 새로 이사 온 이웃이 오해를 받은 김에 선배의 애인과 결혼해버린 자신의 사정을 밝힐 때, 마치 말해지지 않은 ‘진짜’ 비밀은 소설의 아래에 깔려있다는 듯 소설은 모든 인물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인물은 선을 넘지 않으면 될 거라는 다소 안일한 마무리로 자신을 다독이는데, 이 결말로부터 독자의 의심은 다시금 시작된다. 내가 남편과 주고받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전혀 다른 의미로 ‘사랑을 확인’하길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반복 속에서 만들어지는 복잡하고 묘한 구조를 일컫는 프랙탈Fractal은 자기 복제혹은 유사 패턴과 그 변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무한히 반복되는 고사리 잎의 모양 같은 것들. 이때 중요한 것은 자기 유사성과 반복성은 그러나 결코 완전히 같은 것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겐 무슨 과제처럼 깨어진 채 이어 붙여지길 기다리는 도자기의 조각들이 놓여있다. 테세라로 이어지길 기다리는 보석 같은 순간들은 조금 멀리서 보면 하나의 아름다운 프랙탈을 이룰 것이다. 이번 ‘오마주’와 같은 아름다운 기획과 도전으로 인해 우리는 이렇게나 즐거운 변이를 읽을 수 있다. 고단하고 멀리 가는 이 길 위에서 언젠가 우리는 고사리의 숲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반경 2km
박정해 저 / 14,000원 / 리아앤제시
 

반경 2km 는 비무장지대의 한계선입니다.

비무장지대는 남, 북으로 각각 2km로 지정이 되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민통선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민통선은 말 그대로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합니다. 그런 환경 속 작은 학교와 마을, 관사는 이 소설의 배경이 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희나는 군인 아빠를 따라 전학을 옵니다. 그 날 이후 벌어지는 평화 초등학교의 서열싸움, 부짱 오성균, 싸움 꼴찌 병수 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희나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평화 초등학교, 관사 마을, 그 안의 보이지 않는 미묘한 관계들, 그리고 집 안의 소소한 사정까지. 희나의 눈을 통해 내 어릴적 이야기도 함께 생각해보게 됩니다. 관사와 그들을 둘러싼 오묘한 비무장지대의 분위기는 작업을 하는 내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선정 및 수상내역
2023 경기도 우수출판물 제작지원 선정작
 

나는 철원에 있는 백골부대 철책과 사단본부에서 군복무를 했다.

내가 있던 지역이라 군 생활을 떠올리며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고단하게 근무했던 지역에서 사랑스러운 어린이들이 살았던 이야기에 지난 고단함에 의미가 지어지고 오랫동안 마음깊이 뭉쳐있던 긴장감이 풀어지는 편안함을 느꼈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추운 겨울에 동사한 두 전우로 인해 깊이 묻어둔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는 의식이 되었다. 

떠오를까 두려워 눌러두었던 기억들을 꺼내어 정화하는 것은 삶에서 참 귀한 일이다. 이책은 읽는 사람의 어린시절을 환하게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외면하고 가려두었던 오래된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신 저자 박정해님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