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월 신간 도서 소개(종합) - 매주 업데이트 됩니다. |
---|
|
일곱채의 빈집 사만타 슈웨블린 저 / 엄지영 역 / 15,000원 / 창비 2022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수상작! 지금 전세계가 주목하는 작가 사만타 슈웨블린 환상적인 필치, 숨막히는 반전, 그리고 일상에 숨겨진 낯설고 기이한 삶의 모습 “기뻐하라! 사만타 슈웨블린이 가장 날카롭고 맹렬할 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뉴욕타임스』), “이번 소설집이 조성하는 긴장감은 그의 작품 중 단연 압권이다.”(『워싱턴포스트』) “공포와 서스펜스로 온몸의 털을 곤두세운다.”(『이코노미스트』) “천재적이다.”(『뉴요커』) 이번에 창비에서 출간된 『일곱채의 빈집』에 쏟아진 찬사들이다. 세계적인 이야기꾼으로 주목받는 사만타 슈웨블린은 이 소설집으로 스페인어권 최고 권위의 리베라 델 두에로 세계 단편소설문학상을 수상한 데 이어(2015) 전미도서상(번역 부문)을 수상했다(2022). 4년간 세차례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평단은 물론 전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은 슈웨블린이지만, 그의 저작 가운데서도 단연 주목할 만한 단 한권이라는 의미다. 후안 룰포 세계 단편문학상을 수상한 「운 없는 남자」를 포함해 일곱편의 작품을 묶었다. 한 차원 높은 미학, 땀을 쥐는 몰입감 이윽고 찾아오는 짜릿한 반전 『일곱채의 빈집』은 『소란의 핵심』(2002)과 『입속의 새』(2009, 한국어판 창비 2023)에 이은 사만타 슈웨블린의 세번째 소설집이다. 실재와 환상을 넘나들며 짜릿한 긴장감을 선사하는 특유의 재미는 여전하지만 “우리는 실감나는 현실에 깊이 빠져든다. 그 현실은 손에 잡힐 듯한 공포다. 그래서 더 무섭다”(『파이낸셜 타임스』)라는 평처럼 이번 소설집은 한 차원 높은 미학을 선보인다. 수록작들은 모두 ‘집’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때로는 집을 구경하기 위해 떠돌아다니기도 하며(「그런 게 아니라니까」), 때로는 집 안에 갇혀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하고(「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 때로는 집을 잃고 떠돌기도 한다(「40제곱센티미터의 공간」). 소설집의 제목이 ‘일곱채의 빈집’인 데는 그러한 이유도 있다. 각각의 작품은 저마다 숨통을 조여 오는 긴박한 몰입감을 선사하는데, 어느 작품이든 짜릿한 결말을 만끽할 수 있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에 나오는 딸과 어머니는 매일 호화 주택을 구경하다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으면 마음대로 물건의 배치를 바꾸는 “미친 짓”을 한다. 그러고는 주인이 나오기 전에 도망치는데, 하루는 차가 진흙탕에 빠져 정원에서 집주인과 마주치고 만다. 집주인은 모든 게 궁금하다.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이걸 어떻게 배상할 건지. 엄마는 아픈 척을 하며 위기를 모면하려 한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어떤 물건’을 훔쳐서 나올 결심을 한다. 이들은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이 ‘미친 짓’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까.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숨소리」의 주인공 롤라는 어느 날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며 행동 지침이 될 만한 ‘목록’을 작성하기로 한다. ‘모든 것을 분류할 것’ ‘필요 없는 물건은 기부할 것’ ‘죽음에 집중할 것’ ‘그가 참견하면, 무시해버릴 것’. 롤라의 집 근처에는 “마약쟁이로 보이는” 아이들이 항상 시끄럽게 굴며 생활을 방해한다. 그중 한 아이는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아이로, 그는 롤라의 정원에 나타나기도 하고 또 롤라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도 한다. 어느 날 아이는 롤라의 남편에게 공구를 빌리게 되고, 롤라는 그걸 돌려받으러 옆집에 들른다. 그리고 거기서 아이의 엄마를 만나는데 충격적이게도 아이는 이미 죽었다고 한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롤라는 ‘목록’ 마지막에 이런 항목을 추가한다. ‘옆집 여자는 위험하다.’ 정말 위험한 것은 누구일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진행되는 이야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밖에도 부모, 헤어진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휴일을 보내고 있는 자리에 전처의 연인이 찾아오는 기묘한 자리에서 갑자기 아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사건을 다룬 「나의 부모와 아이들」, 실제 발생한 것은 이웃 웨이메르의 방문이라는 한가지 사건뿐이지만 상상과 환상의 이면에서 기억을 교차시키며 독자의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이 집에서는 항상 있는 일이다」, 부부싸움을 하고 길을 방황하다 ‘에스카피스타’(현실도피주의자, 배관 수리기사 혹은 탈출 곡예사의 뜻을 지닌 중의어)를 자처하는 기묘한 사람과 기묘한 동행을 나서는 「외출」 등 짧은 소설도 저마다 깊은 울림을 남긴다. 미국의 유명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발행하며 공신력을 얻은 매거진 『오프라 데일리』는 “사만타 슈웨블린은 떠오르는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의 선두에 서 있다”라며 그의 대단한 작품성을 칭찬한 바 있다. 또한 『일곱채의 빈집』에 대해서는 “피와 욕망, 자아와 원초적 본능으로 맥박 친다”라는 평을 남겼다. 넷플릭스 영화로 제작되며 세계인의 환호를 얻은 베스트셀러 『피버 드림』이나, 타인이 조종하는 ‘반려 인형’을 집에 들인다는 탁월한 상상력으로 “인물 묘사의 장인”(『LA 타임스』)이라는 평을 얻게 해준 『리틀 아이즈』를 봤을 때 어쩌면 사만타 슈웨블린의 시대는 이미 도래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시대는 당분간 이어질 듯하다. 『일곱채의 빈집』은 이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시공간 압축 김창현 저 / 16,000원 / 푸른길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의 책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그의 인생과 사회적 분위기, 그에 따른 사상의 변화를 한 권으로 만나보자!
범접하기 어려운 데이비드 하비의 책들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가 『시공간 압축: 맑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 입문』으로 출간되었다. 저명한 지리학자이며 마르크스 이론가인 데이비드 하비는 세계적인 명성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없는 편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팬층이 없고, 매니악하다’ , ‘그의 스토리에 집중하는 사람이 적다’ 등 하비가 한국에서 유명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며 이 책의 서장을 연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회적인 배경과 그 안에서 성장하고 발전해나가는 하비의 지리적 사상을 풀어낸다.
데이비드 하비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지리학을 전공하며 그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했다. 그의 연구는 단순한 지리적 경계를 넘어 자본주의, 도시화, 그리고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비는 특히 '시공간 압축'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확산과 기술 발전이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분석했다. 이 책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발간까지 하비의 생애와 그의 주요 이론을 다루며, 그가 어떻게 현대 지리학과 사회이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한다.저는 한국에서 하비 교수의 사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하비의 ‘스토리’에 집중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전통 지역지리로 박사학위 논문까지 받았으면서도 브리스틀 대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왜 『지리학에서의 설명(Explanation in Geography)』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미국으로 이주하자마자 막 폭동이 진화된 볼티모어의 기괴한 현실을 보면서 왜 마르크스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는지,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갑작스러운 성공으로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스타 학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이야기는 제법 흥미롭거든요. _10쪽 하비는 왜 마르크스사상에 매료되었을까? 1960년대는 한편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지만, 아이러니하게 세계 곳곳에 전쟁이 끊이지 않아 냉전(Cold War)이라 불리는 날 선 분위기의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무너진 삶의 터전을 재건하기 위해 인프라 투자가 시작되고, 미국이 유럽에 복구 자금을 지원해주며 경제는 살아나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긍정적이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문제가 극에 달하고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불씨가 여기저기서 큰 불꽃을 퍼트리고 있었다. 특히 1968년에 일어난 68혁명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하비가 있던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틴 루터킹의 암살로 말미암아 벌어진 시위가 폭동으로 돌변하며 거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그중에 가장 심각했던 볼티모어는 연방군을 투입해야 할 정도였다. 존스홉킨스 대학에 임용된 하비는 폭동이 일어난 원인과 문제를 조사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그는 ‘도시 내의 불평등’에 주목했다. 입찰지대곡선이 게토(ghetto)문제를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는지 해석하고 이 이론을 가능케 하는 전제를 비판해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하비의 이론에 마르크스적인 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하비는 도시의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와 변증법적 사고를 가져와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학원생들에게 마르크스를 강독하면서 이론을 다져나갔다. 『국제도시 및 지역연구학회지』에 1978년 게재된 「자본주의적 도시 과정: 분석을 위한 틀(The Urban Process under Capitalism: A Framework for Analysis)」을 통해 지리학에 마르크스를 접목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고 하비 이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자본의 한계(The Limits to Capital)』를 발표했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론』에 관한 책으로, 거의 마르크스에 대한 책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그의 이론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최초의 데이비드 하비 입문서 데이비드 하비의 생각이 변화하게 된 중요한 기점에는 68혁명이라는 세계사적 변동이 존재했고, 이후 케인스의 처방이 먹히지 않기 시작한 1972년 석유파동부터 하비 교수의 마르크스이론이 무르익는 시기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비의 사상은 마르크스라는 큰 뿌리에 기대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은 사회, 정치, 경제, 철학, 문학, 예술 등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깊고 넓다. 그는 마르크스를 읽는 데 멈추지 않고, 지리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공간의 정치, 경제를 설명할 개념적 도구로 ‘시공간 압축’, ‘공간적 조정’ 등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비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이 하비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녹색평론(2024년 가을호 통권 제187호) 녹색평론사 편집부 저 / 17,000원 / 녹색평론사 민주주의는 여전히 유일한 대안이다 올여름, 이상고온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지구 곳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구 생명이 일대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 세계 정치가 아는 유일한 방식, 즉 기술적 해결책이나 맹목적 경제성장은 오늘의 복합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민주주의가 관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지속가능성이 운위되는 오늘의 복합적 위기상황을 타개하려면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정치가 필수적인데, 지구가 망할지언정 기득권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 지배층 엘리트, 1% 특권층이 장악하고 있는 대의정부 과두집권체제 아래에서는 도저히 탈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풀어나갈 하나의 수단으로서 제안되어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 시민의회 제도를 소개하고, 그 가능성과 잠재력을 타진해본다. 동시에, 후쿠시마 핵오염수, 남북 관계, 초고령사회 등 긴급성으로도 내용으로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현안들을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현재 세계 어디에서나 주변부로 내몰려 있지만 바로 그래서 다른 사회, 다른 삶이 설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는 농촌, 농업, 농민의 방식을 살펴본다. 동아시아를 둘러싼 위기와 해법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투기가 시작된 지 1년,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한국 정부는 문제제기 자체를 ‘괴담’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와 관련한 여론도, 언론도 잠잠하다. 김해창(경성대 환경공학과)은 삼중수소를 비롯한 방사성물질의 인체 영향, 우리 정부 대응의 문제점과 IAEA의 방조 등의 현안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지금 우리와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을 일깨운다. 황인철(기후위기비상행동)은 8월 29일 최종선고가 난 기후헌법소원의 의의와 진행 과정을 소개했다. 기후재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대응은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정부의 의무라는 사실이 전 세계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대근(우석대학교 국방정책대학원)은 최근 북한이 날려 보내는 ‘쓰레기 풍선’과, 탈북자 단체가 살포해온 대북전단의 내용과 실질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오고 있는지에 대해서 분석하고, 전례 없이 고양된 남북 간 혐오 감정에 대해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때라고 경고한다. 이재봉(원광대학교 명예교수)은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정착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중립화를 제안한다. 중립화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세간의 오해를 불식하고, 남북이 여전히 대치하고 있고, 미중 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결코 평화를 향한 길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크리스 라이트(역사학자)는 이른바 신냉전을 분석한다. 자신의 패권을 위협하는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압박이 오히려 강력한 반미 블록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로 인해 미국은 더욱 호전적인 대외정책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악순환을 지적하며, 필자는 기후위기를 마주한 인류사회의 미래를 매우 어둡게 내다본다. 크리스 헤지스(독립 저널리스트)는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가 명분이 무엇이든 근 반세기 동안 실제로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지 돌아본다. 생태적 전환과 시민의회의 역할 김상준(경희대 공공대학원)은 아일랜드와 벨기에에서 소집된 시민의회들 등 10여 년 동안 진행된 국내외 시민의회 사례들을 소개하면서, 현재의 경색된 정치국면을 타개할 수단으로서 시민의회가 어떻게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게리 가드너(CASSE)는 탈성장이라는 생태주의운동의 과제를 실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오늘날 민주주의로 오인되고 있는 대의제를 극복할 방편으로 고대 아테네에서 행했던 ‘추첨제’를 주장한다. 투표와 추첨의 본질적 차이와 각각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볼프강 크노어(기후과학자)는 지금까지 기후변화에 대한 기술주의적 해법, 대의제 정부들의 해결책들이라는 것이 전부 실효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근본적으로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은 민주주의의 회복과 다른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협동의 힘으로 일구는 다른 미래 연대의 힘으로 ‘다른 삶’을 추구하는 다양한 시도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안녕을 위한 근본적 토대가 될 농촌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생각해보고자 했다. 김정섭(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현재 농촌, 농업, 농민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고유하고 다층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인구 감소이다. 정부가 무능한 탓이든 의지가 없는 것이든 살농(殺農)정책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농촌 주민들의 협동과 연대에서 희망의 싹을 찾고자 한다. 농어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는 청년 농어민 19명을 선발, 36개월간 매월 3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청년농어민기본소득 사회실험’을 진행 중이다. 김찬휘(교육홍보위원장)는 실험 참가자들의 중간 평가를 소개하며, 농민기본소득은 다중 복합위기로부터 우리 농업과 우리 사회의 미래를 구해낼 지렛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단초를 제공한다. 문영규(항꾸네협동조합)는 마을공동체를 통해서 다른 삶, 다른 미래를 엮어가는 전라남도 곡성의 ‘항꾸네협동조합’을 소개한다. 특히 자치적인 청년들의 귀농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은 지자체에서 적극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안태호(한국문화정책연구소)는 경북 문경의 공동농사모임 ‘어울려짓기’를 소개한다. 도시민이 농사를 좀더 쉽게 접할 수 있게 만들고, 수확한 농산물(쌀)을 뜻있는 사회운동, 투쟁 현장에 보내 지원하고, 농촌의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는 모임이다. 김기흥(아시아농업농촌연구원)은 일본의 귀농⋅귀촌 정책을 소개한다. 눈에 띄는 것은 지역, 즉 농촌의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정책의 중심에서 귀농 지원 체계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사실이다. 김다은(〈시사IN〉)은 인구 감소, 수입 농산물, 기후변화 등 역시 복합적 위기 속에 있는 유럽 농민들의 사정을 취재했다. 실효성 있는 정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탁상공론, 상명하달식이 아니라 농민들 속에서 농민들의 목소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초고령사회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좌담(사회학자 김찬호, 시인 이문재, 문탁네트워크 이희경)에서는 노인 인구가 20%를 차지하는 초고령사회로 접어드는 문턱에서 베이비부머 세대의 노년 진입, 노년의 계층화(양극화) 및 대상화의 문제, 의료와 사회적 돌봄이라는 의제 등을 살폈다. 노년 역시 공공의 관점이 아니라 사사로운 개인들의 문제로 치부함으로써 사안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정책과 문화의 오류를 짚었다. 소준철(사회학자)은 우리 사회가 노인과 노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분석했다. 노인이 되는 것이 두렵고 소외되고 외로운 경험이 아니라 더욱 성숙할 수 있는 기회, 풍요로운 경험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문화와 정책이 필요한 것일까? 연재, 시와 서평 강수돌(고려대 명예교수)의 ‘자본주의 다시 보기’ 연재 네 번째 글에서는 인공지능을 포함한 기술혁신이라는 문제를 자본의 상대적 잉여가치 추구의 논리로 분석하고, 잉여가치의 궁극적 원천은 인간노동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한편 부의 원천은 다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가치, 사회가치, 생명가치를 모두 포함하는 부는 상품이나 화폐로 표현되는 가치로 축소되었고, 그 결과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한 ‘약탈’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황대권(생명평화운동가)은 우리의 생명평화운동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생명평화 오디세이’ 연재 첫 번째 글에서는 생명과 평화가 합쳐져서 ‘생명평화’라는 개념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배경을 소개했다. 김지음(공유주택 키키)은 서울 용산 해방촌에서 시작하여 15년 넘게 공유주택 실험을 진행하면서 경험한 고충과 즐거움, 의미를 나누어준다. 현재에는 충남 홍성에 공유지를 마련하여 그 땅에 공유주택을 짓고 마을의 협동조합에서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필자의 경험은, 자본주의의 틀에 갇히지 않는 다른 방식의 삶을 일구는 일이 그렇게 불가능한 것도, 엄청난 용기를 내야 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단 함께할 친구들만 있다면 말이다. 김경미, 송경동 시인이 신작 시를 각각 두 편씩 발표했다. 자기 내면을 돌아보게 하면서도 현실을 명징한 눈으로 마주하고 있는 시들은 깊은 울림과 여운을 남긴다. 정형철(더불어가는배움터길)은 김누리 교수의《경쟁 교육은 야만이다》를 살펴보며 근본적인 교육혁명은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길을 탐구한다. 부희령(작가)은 에릭 잠파 앤더슨의《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소개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인간을 생명그물망의 한 일원이 아닌 특출난 존재로 여기는 인간중심주의를 다시 한번 짚으면서, 종교와 신화들에서 확인되는 인류사회의 풍부한 유산, 오늘날 대부분 잊혀 있는 생태적, 영성적 세계관을 소개한다. 이나미(경희사이버대)는 한신대 생태문명원에서 기획한《기후 돌봄》을 통해, 기후위기 시대를 돌파해낼 수 있는 중심적 가치로서 ‘돌봄’에 대해 역사적, 생태적으로 재고해본다. 황규관(시인)은 2022년 노회찬재단에서 제작, 상영했던 연극의 바탕인 희곡《산재일기》를 소개한다. 이 희곡은 산업재해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버바텀 형식(다큐멘터리 방식)으로 엮은 작품이다. 현실세계와 예술이 어떻게 서로를 반영하고 영향을 미치며 인간을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일까, 그 길을 고민하고 묻는다. 손우정(성공회대)은 더글러스 러미스의《래디컬 데모크라시》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궁구한다. 민주주의는 엄밀히 말해 어떤 완성된 형식, 제도가 아니라 민주주의, 즉 민중의 자기통치를 추구하는 상태라는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서 민주주의 그 자체로 인간답고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진정한 민주주의, 근원적 민주주의에 우리가 좀더 다가갈 수 있을 때 그런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은 현저하게 높아질 것이다. 가문의 침술 김갑기 구술·유영훈, 손중양 정리 / 25,000원 / 허임기념사업회 『가문의 침술』은 조선 침구사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침구 비술과 재야 침구사 수난의 역정을 현장 취재하여 엮은 책이다. 재야 침구사 김갑기 선생이 침술 스승의 유허지 순창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5대를 이어오며 150여 년을 침구술로 활인 공덕을 쌓아 온 의업 가문의 이야기가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그들은 가난한 환자는 무료로 치료하고 여유가 있는 환자들에게는 약간의 치료비를 받으며 인술을 베풀어 왔다. 그야말로 옛날 옛적부터 수많은 곡절과 기적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이어져 왔지만 이제는 모두 신화 같은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김갑기 선생과 그의 스승 사문 최정현 사부님 가문의 침술은 보통 한 곳, 많아야 두세 곳에 침을 놓아 병증을 치료한다. 이렇게 한두 개의 침만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비결은 정확한 혈을 찾아, 정성을 다하는 손기술로 확실하게 보사(補瀉)를 하기 때문이다. 즉 침 한대를 가지고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보태주어 신체 장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특히 『가문의 침술』보사법은 음양의 이치를 철저히 고려하고, 엄지와 검지로 침대를 잡고 호흡에 따라 시계방향 또는 반대 방향으로 염전하며 기운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이는 허임 선생을 비롯한 조선의 침의(鍼醫)들이 수많은 병자를 치료한 바로 그 침법이다. 어렵게나마 음지에서 조선의 정통 침구술을 전승해온 침구사들은 재야에서 수난을 겪어오다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가문의 침술』은 이 조선 침구사 가문의 침구 비술 전승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재야 침구사의 한 많은 사연을 담았다. 김갑기 선생은 196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침구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관인대한침구학원을 수료, 침구사 시험 준비를 했다. 하지만 5.16 군사정부에 의해 시험을 볼 수 있는 길이 막히고, 그 후 6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무면허 침술'로 전과가 쌓이고 쌓여 보호관찰 대상까지 되었다. 그는 곧 될 듯 될듯한 침구사 시험을 고대하다 이제 백발이 되고 말았다. 침구사 면허제가 봉쇄된 상태에서 ‘무면허 침구술’의 단속 대상이 되어온 재야 침구사들. 침구술의 맥을 이으려는 침구인들의 수는 여전히 수만~수십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침구사 제도 시행을 간절하게 요구하고 있다. 『가문의 침술』은 호남의 조선 침구사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침구 비술과 재야 침구사 수난의 역정을 현장 취재하여 엮은 책이다. 이 책에서는 앞 부분에서 김갑기 선생의 스승인 사문 최정현 선생 집안 전주 최씨 가문에서 5대를 이어온 침구술 내용과 그 전승 과정을 먼저 밝혀냈다. 뿐만아니라 내의원 침의를 배출한 옥천(순창) 조씨 가문과 남원 양씨 가문의 침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추적했다. 그리고 2장에서 김갑기 선생 집안 나주 김씨 가문의 5대를 이어온 침구술과 그 전승 과정을 수록했다. 이 이야기는 호남의 재야 침구사 사연이지만 전국 각지 조선 침구사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 결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수렁에 빠지게 하는지도 들여다볼 수 있다. 김갑기 선생이 옛 스승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호남의 조선의 침구사들이 어떠한 침구술을 어떠한 과정을 통해 전수하여 활동했는지 알 수 있는 스토리도 흥미롭다. 전승 침구술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민족의 자산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국가적 지적재산이 사멸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라도 침구사제도를 양성화하여 초고령 사회 국민보건의료에도 활용하고, 해외 진출의 길도 열어주어야 한다. 동남아는 물론, 중남미, 아프리카, 아랍 등 수많은 나라에서 중국과 일본이 경쟁하며 침구 영토를 확장해 가고 있다. 한국도 하루빨리 침구사제도의 복원을 통해 K-POP, K-FOOD와 함께 K-TAM(Korea Traditional Acupuncture & Moxibustion)이 세계인들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침구사제도는 수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모쪼록 『가문의 침술』을 보고 으뜸이었던 조선의 침구술과 침구사제도 부활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며 일독을 추천한다. 시험에 절대 안 나오는 영단어와 하찮고도 재미진 이야기 전은지 저 / 19,000원 / 도서출판 들녘 영어책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상식력 UP 교양력 UP 시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면 영어의 재미와 외국어 공부의 즐거움이 보인다!
유쾌한 언어 탐험으로 가득한 한국에 단 하나뿐인 괴상한 꼬꼬무 영단어책!! 영단어 공부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책. 단순히 시험에 나오는 단어를 암기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영어 단어 14개와 그에 얽힌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통해, 영어와 인문학적 교양을 동시에 쌓을 수 있는 특별한 읽기 경험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humbug’라는 단어는 단순히 ‘사기’라는 뜻을 넘어, 영국의 사기꾼 P.T. 바넘(영화 〈위대한 쇼맨〉의 주인공)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소개된다. 바넘은 “미국인들은 속임 당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로 유명한 사기꾼으로, 그의 다양한 사기 행각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의 허풍과 기만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늘어진 옆구리 뱃살’을 의미하는 ‘love handles’는 단순히 신체적인 특징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의 혐오적인) 표현들이 어떻게 현대인의 신체 이미지 집착과 외모지상주의를 보여주는지 비판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신체를 심하게 훼손하다’는 의미의 ‘mutilation’은 러시아의 잔혹한 역사와 결부된다. 이반 4세와 엘리자베터 여제가 그 주인공이다. 공포정치를 예화로 인권유린의 사례도 톺아본다. ‘spendthrift’는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와 함께 역사적으로 사치가 심했던 최악의 빌런도 만나볼 수 있다. ‘목을 자르다’라는 뜻인 ‘decapitate’는 프랑스 혁명 시기의 단두대와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사회적 혼란을 다루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위에 언급한 단어 외 다른 단어들 역시 역사적 사건이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들과 함께 소개한다.
이 책은 재미와 유익함을 동시에 제공하며, 영어 학습이 지루하고 힘들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유머와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 찬 학습 경험을 제공한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단어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단어의 의미를 습득하게 되며, 이러한 학습 과정에서 얻은 지식은 독자들이 다른 영어 텍스트를 읽거나 이해할 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독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문학적 교양을 쌓아 ‘영어’를 ‘세상을 이해하고 즐기는 창’으로 활용하는 일도 가능해질 것이다. 영어 학습에 지친 사람들, 시험을 위한 단순한 암기에서 벗어나 흥미롭고 유익한 방식으로 영어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 영어 단어와 그 단어들이 담고 있는 문화적·역사적 배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문학 지식을 쌓고자 하는 독자들, 나아가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책을 찾는 이들, 특히 일상적인 영어 교재가 아닌 독특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로 가득한 책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이런 영어책은 좀 더 빨리 나왔어야 해! 이 책이 소개하는 단어들은 학교에서 치르는 영어 시험이나 수능시험 혹은 공무원 시험 같은 일상적인 시험에서 거의 만나볼 수 없는 것들이다. 어디서 이런 단어를 찾아냈나 싶은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따라서 외국어(특히 영어)를 시험용으로만 공부해온 많은 사람은 “시험공부를 하기도 바쁜데 언제 이런 걸 보겠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지나치기엔 이 책의 매력도가 너무나 높다. 처음 보는 듯한 낯선 단어를 둘러싼 ‘세상에 이런 일이’ 풍의 이야기는 단순한 어휘 학습을 넘어, 독자들에게 영어권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사회적 맥락까지 이해하게 돕는다. 한마디로 인문·사회·교양 지식을 쌓는 데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독자들이 영어를 보다 흥미롭고 의미 있게 배울 수 있도록 조목조목 흥미로움을 배치한 작가의 내공 덕분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어떻게 하면 영어를 지루하지 않게 공부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여 영어 학습서를 집필하고 또 어린이를 대상으로 동화를 써온 작가답게 그의 이야기 전개력은 그야말로 ‘최상급’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단어를 전천후 크로스오버하는 능력, 곳곳에 숨어 있는 유머를 만나다 보면 “이런 영어책은 좀 더 빨리 세상에 나왔어야 해!”라며 한숨을 쉬게 된다. 세상에 이런 뜻이, 세상에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필력이! 이 책에는 뜻을 알고 나면 그리고 단어의 쓰임을 좇다 보면 기절초풍하게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정신을 놓지 않고 얼른 다음 이야기를 읽게 된다. 오롯이 작가의 엄청난 필력 덕분이다. 위에 소개한 단어 외에도 ‘exhume’은 ‘시신을 발굴하다’라는 뜻을 가졌는데 이 단어 역시 역사적 사건과 관련이 깊다. 흡혈귀로부터 셰익스피어의 두개골에 얽힌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초감각적인 능력’을 의미하는 ‘psionic’은 DC코믹스나 마블코믹스, 그리고 SF문학에 자주 등장한다. 초능력을 소재로 과학과 공상 과학의 세계를 전방위적으로 넘나들며 이것들이 사회문화에 미친 영향도 분석한다. 독자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하는 또 다른 단어는 ‘파티에서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란 재미난 뜻을 가진 ‘party pooper’, 2022년 서양 온라인을 도배했던 단어인 ‘skete’, 인간의 탐욕스러운 미식과 식문화를 다루는 ‘sweetbread’, 포복절도할 이야기가 넘치는 만병통치약 편인 ‘panacea’, 케찹 이야기인 줄 알았다가 멸종위기동물 이야기까지 듣고 가는 ‘Heinz 57’, “어라, 이 단어는 나도 알지.”라고 할 것 같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식문화 관련된 이야기인 ‘gamey’ 편, 마지막으로 ‘공연 중에 쇼를 멈추게 할 만큼 대단한 장면’을 의미하는 ‘showstopper’라는 단어로 제니퍼 로페즈의 시스루 의상부터 아이누족의 문신 그리고 상남자 중의 상남자로 평가받는 최배달의 이야기를 아우른다. 엄마가 대학에 입학했다 작가1 저 / 18,000원 / 위즈덤하우스 50대 늦깎이 대학생이 된 엄마의 찬란한 등교 『탈코일기』 『B의 일기』 『알싸한 기린의 세계』 등 세상이 조금씩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꾸준히 창작물을 선보인 작가1의 신작. 『엄마가 대학에 입학했다』에는 50대에 간호대에 입학해 늦깎이 대학생이 된 엄마의 4년간의 대학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그렇게 마침내 52세의 나이에 꿈꾸던 간호대학에 입학한 엄마. 하필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온라인 수업과 시험 등 컴퓨터를 활용하는 방법부터 하나하나 익혀야 했지만, 엄마 특유의 인싸력과 배려심, 정의감 덕분에 20대 학우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쌓으며 대학생활을 해나간다. 뒤늦게 알게 된 캠퍼스 라이프의 짜릿함, 엄마의 시선으로 바라본 요즘 젊은 세대의 모습, 배움의 기쁨과 더욱 당당해진 인생관이 엿보이는 늦깎이 대학생이 된 엄마의 찬란한 해방 일지.평생을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엄마는 원래 꿈이 간호사였다. 20대에 간호대학 입학 기회가 있었지만 집안 형편(과 가부장제의 영향) 때문에 꿈을 포기했던 엄마는, 회사 동료와 대화를 나누다가 오랫동안 품었던 꿈을 다시금 떠올린다. 딸 기린(작가1)과 다른 가족의 응원에 기대어 그간의 후회와 망설임을 떨쳐내고, 이번에는 고등학교 성적만으로도 지원이 가능한 ‘만학도 입학 전형’에 지원해 당당히 합격한다. “자식은 어쩌고 엄마가 여기에 와 있어요?” 못 다 이룬 꿈을 이루고 싶어 뒤늦게 대학생활을 시작한 엄마에게 사람들은 여러 말을 건넨다. 대부분 감탄이나 축하, 진심에서 우러난 걱정의 말들이긴 하지만, 때로는 “집에서 집안일이나 하지, 나이 먹은 아줌마가 무슨 대학”이냐, “남편이나 자식은 어쩌고 엄마가 여기에 와 있냐”는 걱정을 가장한 힐난을 듣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간호조무사 일과 학업을 병행하던 시기에는 동료가 심하게 눈치를 주기도 하고, 시험기간이라 펜도 놓을 새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두고 큰 대학병원에 들어갈 것도 아니면서 유난 부리며 20대 애들을 성적으로 밀어내지 말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엄마는 당당하게 응대한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니라, 집안 형편 때문에 젊었을 때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공부하는 것이라고. 못 배운 사람이라고 그만 불리고,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점수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그저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기록이면 충분하다고 말이다. 낮은 시험 점수마저도 자랑스러워하며 엄마는 말한다. “내 최선의 점수! 누가 뭐래도 괜찮아. 기죽지 않아. 계속 열심히 공부할게! 그러니 아줌마의 마지막 유난이라고 생각하고 지켜봐줘!” “언니 엠비티아이가 뭐예요?” ‘요즘 애들’과 어울려 학교생활을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을 아니다. 하필 코로나19로 인해 1학년이 되자마자 비대면 수업을 해야 했고, 가뜩이나 컴퓨터 활용에 익숙지 않은데 시험까지 복잡한 절차를 거쳐 비대면 방식으로 치러야 해서 실수가 잦았다. 제 시간에 제출 버튼을 누르지 않아 아예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해 재시험의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조별 발표 수업에 사용할 피피티를 만드는 데 고전하다가 딸에게 용돈을 주고 부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 특유의 인싸력으로 새학기 초부터 모임장을 맡고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비슷한 상황의 만학도들에게는 비빌 언덕이 되고 딸보다 어린 동기들에게는 믿고 따르는 ‘언니’가 되었다. MBTI가 뭐냐는 술자리 질문에 일찍 잠든 딸에게 전화해 대뜸 확인하기도 하고, 딸의 옷을 훔쳐 입고 등교해 자신 있게 셀카를 찍어 보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어린 친구들이 서로를 위하고 때로는 선의로 경쟁하며 학업을 열정적으로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곳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음에 즐거워한다. “도전으로 인해 달라진 나를 보았으니까!” 수십 번의 조별 과제와 시험을 치르고, 천 시간의 실습까지 마친 엄마는 어느덧 졸업반이 되어 국가고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별 과제를 할 때 컴퓨터도, 타자도 느린 본인이 무임 승차자가 될까봐 걱정이 많았는데, 저력을 다해 참여하다 보니 어느덧 졸업반 때는 만학도 학생과 함께 조별 과제를 하고 싶다고 학생들이 자청하는 경우도 생겼다. 마지막 기말고사를 치르고도 국가고시를 앞두고 쉬지 않고 공부했던 엄마는, 무사히 시험에 응시해 합격선을 넘는 점수를 받아낸다. 졸업하고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딸의 질문에, 일단 취직을 한 뒤에 그간 마음에 품고 있던 새로운 도전들을 이어나가고 싶다고 답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1년씩 살아보기, 겁이 나서 못했던 서핑 같은 거친 운동 해보기, 세계 각지의 음식 먹어보기, 또 다른 자격증을 따보기…. 커다란 도전으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새로운 도전은 경험이 되고, 그 경험들이 쌓여 가치관이 되는 것이니, 그러다 보면 분명 아주 다채로운 가치관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엄마는 에필로그 지면을 통해 당부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늦었다며 겁먹지 않기를. 이 만화를 읽고 사실 늦지 않았음을 깨닫기를.”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 김중혁 저 / 24,000원 / 안온북스 글을 쓰게 만드는, 생각을 남기는 영화 77편을 한 권의 책으로 - “나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고 싶다.” 현상계와 상상계의 유쾌한 조화로 사람들을 웃고 울게 하는 작가 김중혁이 이번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 이야기를 펼쳐낸다. 《영화 보고 오는 길에 글을 썼습니다》는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남는 생각들을 이미지로, 키워드로 정리하여 한 편의 글을 구상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그동안 본 영화 가운데 자신을 뒤흔들었던 77편에 대한 글을 통해 영화를 더 깊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하여 영화 감상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며, 그 과정에서 영화와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이 책의 매력은 다양하다. 첫째, 무언가를 깊고 넓게 감상하고 싶게 만든다. 둘째, 지금 내 마음속을 채우는 감정과 생각을 잘 정리해 한 편의 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작법을 알려준다. 셋째, 여기서 얻는 삶의 지혜는 덤이다. 넷째, TV 앞에 놓아두고 ‘오늘은 무엇을 볼까’ 고민될 때 자유롭게 넘겨서 골라보고 보고 난 뒤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누구나 다사다난한 삶을 견디며 많은 생각을 굴려보지만 정작 그것을 글로 남기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작품 감상과 더불어 세상의 일과 주변의 사태를 통해 나를 확인하는 방법을 알게 해주고 글쓰기라는 출구를 통해 불안과 두려움을 딛고 나만의 글을 기록하고 남기게 만들어준다. 책에 실린 글을 읽고 영화가 보고 싶어지면 좋겠다. 이미 본 영화라면 다시 보게 되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글을 써볼까?’라는 마음이 들면 더 좋겠다. 자신만의 첫 문장을 떠올리고, 자신만의 결론에 도달하는 여행을 떠나면 좋겠다. 이 여행은 중독적이어서 앞으로 영화를 보고 나면 곧장 글이 쓰고 싶어질 것이다. 영화를 보고 오는 길에 저마다 다른 여행을 떠나게 되는 글의 여행자들이 되면 좋겠다. _〈나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간다〉에서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는 글쓰기 -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의미 없어지는’ 일을 하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살아가며 도무지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당면하고 막막함을 느낀다. 그렇기에 더 많은 일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지난한 생도 한 사람의 인생에서 모든 걸 경험할 수는 없기에 인간은 그 안에 갇히기 쉽고 편협해질 수 있다. 편협은 나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경험해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이해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 김중혁 작가는 여기에 ‘영화+글쓰기’라는 해법을 제시한다. ‘영화를 본다-메모를 한다-살을 붙인다-영화 메모가 완성된다.’ 이렇게 실행해보는 것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영화 속 고유명사나 핵심이 되는 장면, 꼭 기억해야 할 대사를 적다 보면 수면 아래 기억이 올라오기도 하고 지금의 나를 빗대어 생각해보게도 된다. 감상에 들어가면 작품과 ‘나’의 관계 설정이 이뤄지고 나를 중심에 세우게 된다. 이 책을 펼쳐 내가 본 영화에 대한 글부터 읽어보자. 나도 무언가를 쓰고 싶은 움직임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것이다. 그렇게 첫 문장 쓰기가 가능해진다.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가닿기 위해 쓰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알아가는 공부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한다. 자신을 알아가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라고. 누구보다 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 글을 쓰는 일은 두렵지만 나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시작의 비법이 이 책 안에 있다. 영화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 -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끝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에니메이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를 보고 작가는 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지 답해보겠습니까?” 작가들은 작품을 남기며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고 들려준다. 그러나 이것은 답을 들려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질문을 남기는 일. 그것만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일이라 믿는 것이다. 이기려고 생각하기보다 함께 이길 생각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좋은 소식을 상기하도록 이끄는 일. 우리가 선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전하는 일. 내가 상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배우는 일. 이 모든 아름다운 일들은 예술 작품 감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영화 감상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면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을 생각하며 말투와 미묘한 표정을 떠올리며 이해되지 않던 행동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는 사이 안다고 믿었던 확신은 착각이 되기도 한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잊고 있지는 않은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기억하지 않을지, 마지막 순간에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며 우리는 좀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다. 처절하고 더럽고 비열하고 안쓰러워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러한 생에 더 많은 이야기가 추가될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더욱 넓어진다.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이 책 속의 영화와 글을 감상을 하고 나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감상을 품게 될 것이다. “교훈을 얻을 수도”, “반성을 할 수도”, 그저 “웃을 수도” 있다. 저마다 다른 이유로 여러 번 이 책을 다시 열어보게 될 것이다. 김중혁 작가가 던져주는 ‘생각을 남기는 영화 77’편과 함께 당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문학과 사회 (2024년 가을 147호)(전2권) 문학과지성사 편집부 저 / 15,000원 / 문학과지성사 가을호를 펴내며 함께 바라본 곳에 일렁이는 빛이 있음을 빔 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2024)는 온통 주인공 히라야마의 반복적인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의 하루는 매우 단조롭다. 도쿄의 공중화장실 청소 노동자인 그는 동네 주민의 빗질 소리를 모닝콜 삼아 일어난다. 아끼는 화분에 물을 주고, 적당한 단장 후 집을 나선다. 그리고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올드 팝을 들으며 출근한다. 이후의 움직임 역시 비슷하다. 공중화장실을 옮겨 다니며 청소를 하다 공원벤치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일을 마치고는 단골목욕탕과 일본식 술집에 들러 하루를 마무리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책을 읽고, 잠이 들면 꿈을 꾸고, 다시 빗질 소리에 눈을 뜨는 것. 이것이 히라야마의 일상이다. 영화는 한 명의 인물에 집중하면서도 시종 그와 거리를 유지한다. 그에게 어떤 전사(前史)가 있는지, 감정은 어떤지 등에 대해 전부 보여주지 않는다. 관찰자의 시선으로 히라야마의 일과를 따르던 중 그와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러니까 히라야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때가 있다면, 그가 카메라에 눈을 가져다 댈 때다. 히라야마는 매일 같은 하늘아래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의 사진을 찍는다. 현상된 사진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비슷하지만 날짜를 적어 매일의 나무와 하늘, 햇빛을 기록하는 것이 그의 루틴 중 하나다. 히라야마가 뷰파인더로 바라본 빛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후에야 ‘코모레비KOMOREBI’라는 글자와 함께 우리 앞을 비춘다. 말하자면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한 줌의 햇살, 그것은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히라야마가 바라본 햇살은 전부 다른 움직임으로 일상에 스며든다. 따라서 권태로울 만큼 반복적이었던 히라야마의 매일은 그가 눈에 담던 빛의 존재로 인해 더는 여느 날과 같지 않은 다름의 하루로 기억된다. 읽고 쓰는 일을 포함해 문학을 ‘한다’는 것 역시 어느 한순간에만 존재하는 빛의 일렁임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도, 해석하는 시선도 모두 다르지만, 우리가 ‘우리’로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같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나은 쪽을 향해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달리 말해우리가 같은 빛을 바라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마음을 담아 이번 『문학과사회 하이픈』은 ‘시선–행로’라는 키워드 아래 한국소설의 최전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이들의 작가론으로 꾸려보았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면밀히 검토하고 그 속에서 일렁이는 빛을 다양한 ‘시선’으로 살핀 글들은 그들의 소설이 나아가는 ‘행로’를 제시하는 것으로도 훌륭하지만, 지금 소설의 흐름을 파악하고, 너머의 현실에 대해 고민할 자리를 만들어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소의 「다만, 아주 작은 승산—김기태론」에서 필자는 김기태를 “문화적 기호를 통해 사회를 관찰하고 드로잉하는 사회학자–소설가”로 명명하며 작가의 소묘 방식과 유사하게 사회학적 시선으로 김기태의 소설을 관철한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김기태 세계의 중심축은 제도의 성공적인 수행을 가능케 하는“사회적 재생산”과 “‘따옴표’의 형식”이다. 이는 언뜻 하나의 키워드나 동일한 기준 아래 읽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김기태의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명료한 방법 중 하나로 의미를 갖는다. 밈meme을 비롯하여 동시대 문화의 기호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김기태의 소설이 현상으로서의 기호가 가지는 높은 온도와 달리 ‘따옴표’를 치는 방식으로 의도적인 거리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지점은 현실 사회가 지닌 양가적인 측면과도 유사한바, “오늘날의 ‘답보 상태’”에 대한 “재현”인 동시에 “‘사실 적시’의 수행”으로 읽어낼 수 있다. 나아가 이 글은 두 개의 축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사회학적 영역 안에서 소설이 그리는 현재의 재생산 양상을 살핀다. 좌표계 위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가적 특징과 그에 관한 분석은 김기태 소설을 읽는 데 중요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김주원의 「반려를 사랑하는 일—김지연론」은 김지연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반려 관계들이 “모욕과 고통 속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말하며, 고통 이후 사랑이라는 “뜻밖의 연결”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히는 글이다. 필자는 구조에 의한 모멸로 김지연의 인물들이 자기 자신으로서의 개별성을 점점 잃어가고 때문에 더욱 ‘사랑하는 일’과 “새로운 반려 만들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얽힌 이성애 중심의 관계만이 아니라 김지연의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동성 커플을 비롯하여 동물, 유령 등과 같은 비인간적 타자와의 관계까지 포함한다. 또한 이것은 자연스럽게 생태학적 위기를 실감하고 있는 기후 위기의 시대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김지연의 소설 속에서 확장되는 반려관계와 견디며 지속하는 ‘사랑하는 일’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반려와 함께하는 새로운 삶이나 미래에 대한 것보다 “불합리한 현실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물들에게서 보이는 아이러니한 지점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필자의 날카로운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민선혜의 「간(間)의 기록—문지혁론」은 ‘여기’에서 ‘저기’로 떠나온 문지혁의 인물들이 이방인으로 여겨지면서도 있었던 곳으로의 회귀를 거부하는 까닭을 그들의 경계인적 정체성 혹은 위치성과 같이 어떤 사이에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서 짚어내는 ‘사이’란 “현존과 부재 사이”, “틈과 열림” 사이, “쓰는 일과 사는 일 사이” 등으로, 인물들은 이러한 ‘사이’에서만 비로소 누군가의 상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건너는’ 연결성을 획득하며, “‘나’의 문학”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사이에서 드러나는 문학적 의미를 섬세히 짚어내면서도 “문지혁의 소설은 애매하다”라고 밝히는 것은 단어가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그대로 따르는 의미가 아니다. 사이에 있기에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는 문지혁의 소설이 오히려 “애매하기에 진실하다”라는 중요한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김나영의 「진짜인 가짜—성해나 소설을 읽는 몇 개의 키워드」는 제목과 같이 성해나의 소설 읽기를 위한 키워드를 제시하며 전개되는 글이다. 크게 장편과 단편 읽기로 분류되는데, 서두에 해당하는 장편 읽기에서는 성해나가 구성한 소설의 형식에 집중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두고 온 여름』의 내용과 형식이 “사진–이미지와 서간체”에 있음을 주목하며 거리감을 내포하는 사진과 편지라는 장치를 통해 소설이 수신자가 불분명한 이야기가 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므로 “수신자가 불확실한 이야기도 발신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그 누군가에게 제대로 전달되기를 믿”기도 한다. 이어지는 단편 읽기는 ‘가족’ ‘세대’ ‘글쓰기, 별종의 말하기’라는 명료한 키워드로 해석하며, “내용과 무관한 형식, 개인을 무화하는 역사라는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소설의 임무”임을 보여주는 성해나의 작업에 대한 분명한 의미를 밝히고 있다. 이희우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예소연에 대한 노트」에서는 예소연 소설을 읽는 두 가지 키워드로 ‘돌봄과 고독’을 제시한다. 돌봄은 타인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요구되고 행해진다는 지점을 지적하며, 돌봄이라는 것이 어떤 관계에 대한 실천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역사를 이해하는 일”임을 밝힌다. 특히 그러한 돌봄 속에서 발생하는 고독의 문제를 이희우의 최근 작업의 중요 키워드인 ‘매혹’으로 읽어내어 더욱 흥미롭다. 우리가 고독 또는 죽음에 매혹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한계(이것은 또한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다)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일 것”인데, 예소연은 “복수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그러한 한계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물이 “자립” 또는 “의존” 중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자립한다는 것은 의존한다는 것”이라는 역설을 드러내고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충분히 말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추기(追記)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이 글을 포함하여 “말할 수 없는 것” 또는 아직 다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필자의 비평적 탐구가 계속되리라는 기대를 품어볼 수 있으니 말이다. 조연정의 「보이는 여성—위수정론」은 위수정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에 집중한다. 위수정의 소설에는 예술을 전공한 중산층여성이 자주 등장하는데, 철저히 ‘금의 세계’에 속하는 이들은 세대로 계승되는 ‘수저론’에 따라 견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인물에 대해서라면 이미 여러 논의가 존재하는바, 조연정이 주목하는 건 ‘은의 세계’ 혹은 ‘흙의 세계’를 맴돌고 있는 여성들이다. 이 글은 자신의 주체적인 행위를 통해 “계급의 위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평등한 취향의 세계를” 도모하는 여성 인물들을 조명하여 동시에 “‘보여지는’ 대상”으로 폭력과 착취의 피해자가 되는 여성이 아닌, 변화를 이끄는 이 사회의 여성들의 움직임을 긍정하는 것으로 확장된 의미를 도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기화의 「공을 굴리며 빛을 더하기—이서수론」은 이서수의 소설이 “노동, 신체, 젠더” 등 여러 측면에서 지금의 한국사회를 반영하는 텍스트임을 긍정하며, 그의 소설 세계가 모티프와 주제를 ‘생각의 공’을 굴리듯 “작품에서 작품으로 이동하며 확장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신체와 주거 공간이 겹쳐지는 서술이나 각기 다른 상황과 입장으로 부딪히는 인물들처럼 말이다. 이처럼 작가가 반복과 확장을 통해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이들은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얼굴이기도 하며 그러한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 이서수 소설의 미덕이라는 점, 그리고 “기우뚱해진 채로도 삶을‘열심히’ 살아내는 이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은 한 줄기 빛의 온도를 갖는다. 하혁진의 「우정이라는 이름의 천사—함윤이론」은 함윤이의 소설에서 상호적으로 발생하는 ‘죄책감’ 그리고 ‘우정’의 관계를 “타자와의 연결”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검토한다. 인물들의 우정 관계에서 발생하는 죄책감이 ‘법’이 아닌 ‘규칙’을 깨는 것에서 비롯됨을 지적하며, 그러한 죄책감을 견디면서도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이들을 들여다본다. 이는 보이지 않지만 인물들 사이를 지키는 우정이라는 관계에 대한 고찰인 동시에 타자와의 연결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이는 우리에 대한 성찰이라는 점에서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문학과사회 하이픈』과 더불어 기획 비평 또한 작가론으로 이어진다. 지난봄, 『날개 환상통』(문학과지성사, 2019)으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한 김혜순 시인의 작품 세계를 면밀히 탐구한 글이다. 김주연의 「포스트휴먼의 시에 이르다—김혜순 시집 『날개 환상통』의 역사성」은 김혜순의 시를 크게 ‘엽기’(의 역사성), “섹스이며 동시에 젠더”인 여성, ‘새–새하기’로 읽어내며 이러한 시적 흐름이 포스트휴먼으로 향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 글은 『날개 환상통』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동시에 40여 년에 걸친 김혜순의 세계 전반에 대한 것이기도 하며, 그의 시가 나아갈 행로를 작품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피는 깊이 있는 해석으로 유효하다. 강동호의 「비–인간의 함성—김혜순 시의 ‘무한한 여성’과 ‘중립’의 정치」는 그간 전위·전복 등으로 해석되어온 김혜순 시의 정치성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고자 하는 글이다. 이러한 시도는 증언으로서의 ‘새하기’와 ‘인간 아닌 것non-human’ 아닌 ‘비-인간in-human’, 여성적 숭고를 지닌 무한한 여성 등을 거쳐 마침내 “중립”이라는 ‘사이’의 자리에 닿는다. “전체로의 응집을 절대 유도하지 않는” ‘중립’은 “무수히 많은 이질적인 것의 평등한 회집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이면서 “원점 그 자체에 대한 불굴의 의지”라는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그의 급진적인 정치성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이 된다. 홍성희의 「오려 쓰기 오류 쓰기」는 김혜순의 시에서 사용되어온 ‘여자’라는 단어가 그 단어에 축적된 이미지 등에 대해 비판적인 의미를 내포할 뿐만 아니라, “비판의 작업 속에서도 무언가 반복되고 있지 않은지를 켜켜이 살피려는 이중의 목적”을 두고 씌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이 글은 “‘여자’라는 언어의, ‘여자’를 구분하고 분류하고 배분하는 언어 구조의 오류를 오류 자체로” 쓰는 김혜순 시의 오류와 쓰기 방식에 대한 탐구다. 오류의 레이어를 한 겹씩 들춰보고 언어의 구속 아래 감춰지고 지워진 것들을 가시화하는 과정을 통해 김혜순의 시는, 그의 의도적인 오류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세 필자의 글을 통해 시인 김혜순의 문학적 성취와 위상을 재확인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가을호의 작품란은 풍요의 계절을 맞아 더욱 알차다. 정현종, 이원, 한강, 정한아, 서효인, 박세미, 문보영, 전수오, 김선오, 신이인, 김유수 시인의 시와 이주혜, 조시현, 김나현 작가의 소설이 마련되어 있다. 보기만 해도 든든한 이름들의 신작을 충분히 읽고 나누어주신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어느덧 세 계절을 함께한 편혜영 작가의 연재는 이제 1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마침내 이야기가 닿을 그곳을 향한 걸음에 끝까지 동행해주시길 바란다. 리뷰 코너에서는 김지윤, 소유정, 유성호, 이경수, 이근희, 김영찬, 박혜진, 이지은, 양순모 평론가가 지난 계절에 출간된 시·소설 단행본을 정성스레 읽어주었다. 한 권을 깊이 있게 읽어내거나 두 권의 작품집이 교차하는 지점을 바라보는 세심한 시선들에도 주목해주시길 바란다. 작가 최인훈의 6 주기를 앞둔 지난 7월 18일에는 『화두』 발간 30 주년을 기념한 콜로키움이 개최되었다. 1990년대에 발간된 『화두』는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질 만큼 심원한 질문을 품고 있으며, 무엇보다 작가 최인훈의 삶과 문학에 대한 고민이 응집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20세기의 ‘기억’과 21세기의 ‘화두’’라는 이름 아래열린 콜로키움에서는 다큐멘터리 「시대의 서기, 최인훈」이 상영되었고, 『화두』에 대한 강연 및 토론이 이어졌다. 자리를 빛낸 김상환, 연남경, 임지현, 정일영의 글을 이번 호에 함께 싣는다. 이들의 글은 철학적·미학적·역사적인 측면으로 『화두』에 접근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소설 안에 담긴 작가의 고민과 지금 우리의 ‘화두’가 공명하는 지점을 만든다. ‘20세기의 기억과 인식을 가로지르며, 21세기의 ‘화두’를 새롭게 성찰하자’는 콜로키움의 의미를 함께해주시길 바란다. 콜로키움을 진행한 우찬제의 「슬픈 육체와 별들의 심포지엄—최인훈의 『화두』 다시 읽기」 또한 일독을 권한다. 이 글은 최인훈의 생애와 그의 문학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보여주는 동시에 왜 우리가 지금 『화두』를 다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파한다. 가령 우찬제가 말하는 『화두』의 주제이자 소설을 관통하는 이런 질문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가?” “나는 나의 이야기의 주인으로서 합당한 발명을 수행하고 있는가?” “‘환경적 조건을 넘어서 어떤 인식의 조건 혹은 의식의 조건을 추구하고 탐문할 것인가?’”에 대해 근거와 해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 책을 다시 읽고, 나 자신에 대한 또한 우리의 삶에 대한, 물음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편집동인 소유정 소설 보다: 가을 2024 권희진, 이미상, 정기현 저 / 5,500원 / 문학과지성사 새로운 세대가 그려내는 가을의 소설적 풍경 독자에게 늘 기대 이상의 가치를 전하는 특별 기획, 『소설 보다: 가을 2024』가 출간되었다. 〈소설 보다〉는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 홈페이지에 그 결과를 공개하고 이를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로 2018년에 시작되었다. 선정된 작품은 문지문학상 후보로 삼는다.
〈소설 보다〉 시리즈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물론 선정위원이 직접 참여한 작가와의 인터뷰를 수록하여 7년째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앞으로도 계절마다 간행되는 ‘소설 보다’는 주목받는 젊은 작가와 독자를 가장 신속하고 긴밀하게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소설 보다: 가을 2024』에는 2024년 가을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인 권희진의 「걷기의 활용」, 이미상의 「옮겨붙은 소망」, 정기현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총 세 편과 작가 인터뷰가 실렸다. 해당 작품은 제14회 문지문학상 후보가 된다. 선정위원(강동호, 소유정, 이소, 이희우, 조연정, 홍성희)의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선정한 작품들의 심사평은 문학과지성사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도서는 1년 동안 한정 판매될 예정이다. 가을, 이 계절의 소설 우리는 저마다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과거의 인상적인 경험들을 머릿속에 겹겹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은 내일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갈림길 앞에서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할 때 확신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기억이 행동이 되고 경험으로 자라나 하나의 생(生)을 만들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 보다: 가을 2024』는 지난날을 반추하며 오래도록 곁에 머물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권희진, 「걷기의 활용」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어서 남들이 노동을 하듯 하루 종일 걸었다” 권희진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심사위원 최수철·조경란)라는 평을 받으며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 작가다. 등단작 「러브레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인물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은 화자를 그려냈던 작가는 이번 선정작 「걷기의 활용」에서 한때 가장 가까웠으나 영영 멀어진 인물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추억을 회상하는 주인공을 따라 걸어간다. 태수 형과 ‘나’는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낸 친구로 슬픈 일이 있을 때나 별일 없는 나날 중에도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 여자친구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던 태수 형 그리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걷기를 소일거리로 삼는 ‘나’가 서로를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져보면 이야기의 주제나 관심 대상도 다르고, ‘나’가 형에 대해 아는 건 사소한 것들 뿐이지만, 그 기억은 사실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문학평론가 이소)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태수 형을 향한 감정은 오해와 이해를 거듭하면서도 “일정한 보폭의 걸음처럼 잔잔하고 자연스럽게 전개”(문학평론가 조연정)되며, 지나갔으나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청춘의 감정을 돌아보게 한다. 자신조차 종잡을 수 없는 감정들로 인해 ‘나’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라며 비관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의 관점으로 보자면 ‘나’의 이러한 고뇌마저 모두 사랑처럼 보입니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자신 안의 감정들을 긍정하고 어느 순간에는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권희진×이소」에서 이미상, 「옮겨붙은 소망」 “당신들이 끼어들 틈은 없어요. 남편의 죽음은 우리 부부의 것이에요” 이미상은 2020년 겨울, 2021년 겨울, 2020년 여름에 이어 네번째로 ‘이 계절의 소설’에 선정되며 〈소설 보다〉로 만나게 되었다. 매번 전작을 뛰어넘는 신선한 소재와 독창적인 발상의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는 「옮겨붙은 소망」에서도 새로운 층위의 이야기를 발굴해내며 끝없는 질주를 예고한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 물려받은 물건, 시간, 소망 등이 남은 이의 삶을 얼마큼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기억이라는 특별한 형식”(문학평론가 소유정)에 기대어 보여준다. ‘나’와 같은 빌라에 사는 이웃 n&n’s는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서 원하는 앤티크 소품 및 빈티지 주얼리를 구매하기 위해 ‘나’를 “클릭 도우미”로 고용한다. n&n’s의 소망(혹은 가벼운 빈말)을 대신 이뤄주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쇼핑이 열흘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쇼핑 라이브가 방영될 때마다 그녀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일하는 ‘나’는 n&n’s 부부의 지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노동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에 매몰되다 우울증을 얻은 채 남편이 남기고 간 시간까지 떠안은 n&n’s가 ‘나’에게 그 시간을 모두 증여하는 소설의 절정은 슬픔, 애도를 넘어 우리에게도 위트 가득한 희망을 건넨다. 현재 A를 경험하고 있으나 그것으로부터 연상된 수많은 추억이 떠올라 머릿속은 A를 지나 Q까지 가 있겠지요. 그러다 A에서 Q까지가 뭉쳐져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기둥이 되고, 때로는 그 기둥이 쿵쿵 내리치는 진동에 마음이 뒤숭숭해지기도 하겠지요. 다행히 ‘나’는 무엇보다 자신을 말없이 많이 아꼈던 사람과의 추억 속에서 지내기에 슬프지만 행복합니다. 그가 현실에서 보는 많은 사물과 느끼는 경험에 n&n’s와의 추억이 들어 있을 겁니다. 「인터뷰 이미상×홍성희」에서 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슬프지 않은 사람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슬픔 한가운데 선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다 집으로 돌아갔다” 2023년 문학웹진 〈LIM〉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기현은 데뷔작 「농부의 피」에서 회사 일과 농사를 병행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번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거여동의 고가교 기둥에 빼곡하게 적힌 낙서를 읽는 데서 출발해 번호를 달고 반복하며 이어지는 낙서를 하나씩 찾아내듯 화자의 일상과 내면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나간다. 평일 교회에서 만난 기은과 준영은 각자 시간을 보내다 함께 탁구를 치고 동네 주변을 산책한다. 준영은 동네 곳곳에 최근에도 업데이트된 듯한 낙서들의 존재를 기은에게 알려준다. “김병철 들어라”로 시작해 욕과 원한으로 끝나는 내용을 따라 걷다 보면 그간 무수히, 무심하게 지나친 길목의 모든 것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 후 기은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낙서를 발견하거나 재미있는 사건이 생기면 준영을 떠올린다.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낙서 속 주인공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만 어쩐 일인지 기은은 “정체 모를 슬픔을 감각”한다. 이 소설은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슬픔에 잠식당한 것이 아니라 잠시 찾아온 슬픔을 돌볼 수 있는 “주체적인 상태”에 있으므로 “자신의 슬픔과 결별할 수 있는 계기를 되찾”(문학평론가 강동호)을지 모른다는 짐작을 우리에게 전한다. 여러 가지 모양의 인형 눈알을 가지고 다니다 그때그때 눈알을 바꿔 끼울 수 있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대상도 완전히 달리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우리에게 주어진 반복이 어제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반복이라면 나도 인물도 불행해지기 십상이니 일단 달리 바라보기부터 시도해볼까, 다른 모양의 눈알을 잠깐 착용해볼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는 듯합니다. 「인터뷰 정기현×이희우」에서 마이크로처치 브라이언 샌더스 저 / 정태영 역 / 15,000원 / 도시사역연구소 한국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선교적 교회 운동의 리더, 브라이언 샌더스의 책이다. 200개가 넘는 평신도 중심의 선교적 공동체를 도운 경험과 교회론에 대한 공부가 담긴 책이다. 가정교회, 소그룹, 셀모임 등 다양한 교회 운동의 본질을 마이크로처치라는 한 단어에 담아냈다. 이 책은 모든 성도가 일상 속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역동적인 교회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을 현장 중심의 언어로 전해준다. 교회는 개척되는 것이 아니다 선교의 씨앗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선교적 교회 운동을 이끌고 있는 브라이언 샌더스가 선교적 교회 운동의 핵심을 소개한다. 그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의 본질을 말한다. 예배의 본질을 말하고 공동체의 본질을 말하고 선교의 본질을 말한다. 예배, 공동체, 선교의 본질을 밝히고 나니 남는 것은 순전한 교회다. 여기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본질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게 된다. 샌더스는 이런 순전한 교회를 마이크로처치라고 부른다. 마이크로처치는 또 하나의 사역 방법론이 아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이 책은 마이크로처치라는 교회의 본질을 제시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본질을 추구하는 로드맵도 함께 제시한다. 6개가 넘는 나라에서 200개가 넘는 마이크로처치들을 인큐베이팅하며 검증된 방법론이다. ‘아이디어-반복-체계화-확장’이라는 검증된 프로세스는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선교적 교회를 꿈꾸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길을 보여준다. 이 길을 따라가면서 선교의 씨앗을 심는다면 순전하고 아름다운 마이크로처치라는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ㆍ 하나님나라를 꿈꾸는 목회자들 ㆍ 역동적인 소그룹을 원하는 소그룹 리더들 ㆍ 선교적인 삶을 살기 원하는 그리스도인들 개의 목적 W.브루스 카메론 저 / 이창희 역 / 17,800원 / 페티앙북스 -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 1300만 반려인을 위한 아름다운 소설 -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 USA TODAY 베스트셀러 -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 - 영화 〈베일리 어게인〉 원작 소설 - 미국에서만 100만부 돌파 - 전 세계 20개국 번역 출판(프랑스, 독일, 터키, 이탈리아, 대만 등 베스트셀러) 전생의 기억을 간직한 채 끊임없이 환생하는 사랑스러운 개, 베일리가 펼치는 힐링 스토리
『개의 목적』은 여러 생을 거치며 보호자를 찾고, 사랑하고, 지키는 한 마리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은 개의 시선으로 인간과의 관계, 사랑, 우정, 그리고 삶의 목적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삶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며, 반려동물과의 특별한 유대감을 재발견하게 된다. 가슴 따뜻하고 통찰력 있으며 종종 웃음을 자아내는 『개의 목적』은 개의 여러 생을 감성적이고 유쾌하게 풀어내면서, 인간과 개 사이의 깨지지 않는 유대감을 보여준다. 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사랑은 결코 죽지 않으며,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항상 우리 곁에 있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내 개의 이야기라 믿게 되는 묘한 힘을 가진 『개의 목적(원제 : a dog’s purpose)』은 2010년 출간된 이후 미국의 수백만 애견인들 사이에서 ‘베일리 앓이’ 열병을 일으키며 역주행, 수년 간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다 결국 1위를 차지했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올랐던 책들 중 가장 높은 독자 평점을 받았으며 베일리 덕에 ‘상처를 치유받았다’는 독자들의 고백이 줄을 잇는다. 베일리의 매력에 힘입어 『개의 목적』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튜디오 엠블린에서 영화〈베일리 어게인〉으로 제작 상영되었다. 계속되는 인기로 〈a dog’s journey〉를 비롯한 후속작들이 계속 출판되고 있다. 미국에서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이 책은, 한 마리 개의 시선을 통해 인생의 목적을 찾아가는 특별한 여정을 유쾌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의 내 모든 첫 경험들의 산증인이지만 각종 흑역사는 비밀에 부쳐주는 내 인생 최고의 친구. 온갖 장난질에 공범자가 되어주고, 주모자로 덤터기를 써도 불평 한마디 않는 듬직한 동료, 때론 비참하게 망가진 내 모습에 아무 말 없이 품을 내어주며, 별 볼 일 없을 때의 내 모습도 변함없이 사랑해주는 진정한 가족, 개. 개를 친구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이라면 베일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베일리의 팬이 되어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고 우리 개를 안아주게 될 것이고, 이미 무지개 다리를 건넌 개가 있다면 주변의 다른 개들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될지도 모른다. 전 세계 수백만 애견인들 사이에서 ‘베일리 앓이’ 열병을 일으켜 온 매력적인 캐릭터 베일리를 통해 결국 우리도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된다. 우리 생에는 한순간도 중요치 않은 순간이 없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고 사랑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 또 우리의 진실한 친구는 늘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책을 통해 개와의 특별한 인연과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개를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깊은 울림과 따뜻한 위로를 전할 것이다. 연기 이반 투르게네프 저 / 이항재 역 / 17,000원 / 문학과지성사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바로 이게 내게 닥친 불행입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손꼽히는 러시아 사실주의의 거장
‘시인의 마음’ ‘사냥꾼의 눈’을 지닌 투르게네프가 그린 첫사랑의 빛나는 순간과 치명적인 유혹, 그리고 혼란의 시대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의 장편소설 『연기Дым』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89번으로 출간되었다. 19세기 독일의 바덴, 수많은 사람들이 사교를 위해 모여들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지식인들은 농노해방 이후의 진로에 대해 지리멸렬한 논쟁을 이어간다. 바덴에 머물며 약혼자를 기다리던 러시아 청년 리트비노프는 한때 열렬히 사랑했으나 사교계를 향해 떠나가며 자신을 배신했던 첫사랑 이리나를 만나고, 갑작스레 나타난 이리나로 인해 리트비노프의 도덕과 삶의 계획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사랑 이야기를 주축으로 러시아 사교계 인사들의 위선과 탐욕, 정치적 진영 간의 싸움을 적나라하게 풍자한 이 작품은 당시 러시아의 핵심 문제들에 대한 ‘사회 ‧ 정치적 연대기’이자 ‘예술적 주석’이다.
사냥꾼의 눈, 시인의 마음 나에게 투르게네프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다. _어니스트 헤밍웨이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아름다운 자연과 러시아인들의 우수 어린 삶을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시인의 마음’과 동시대의 사회 · 정치적 현실을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사냥꾼의 눈’을 지닌 19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사실주의 작가이다. 그는 부유한 지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가혹한 농노제도의 현실을 지켜보며 성장했는데, 중부 러시아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사랑과 농노제도에 대한 증오는 투르게네프 문학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투르게네프는 6대 장편(『루딘』『귀족의 보금자리』 『전날 밤』『아버지와 아들』『연기』『처녀지』) 에서 1840~70년대 러시아의 중요한 사회 · 정치적 문제와 논쟁을 마치 지진계처럼 민감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이자 ‘연대기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에는 휴머니즘과 진실성, 진 · 선 · 미에 대한 믿음, 사랑과 자기희생, 불멸의 형상들이 가득하고, 낭만주의와 리얼리즘, 섬세한 시정과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및 객관적 묘사가 융합되어 있다. 또한 러시아 문학이 서구를 향해 말을 걸기 시작하고 세계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된 것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아닌 투르게네프의 펜 끝을 통해서였다. 투르게네프는 세계적인 명성과 인정을 받은 최초의 러시아 작가로, 그는 활발한 창작 활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괴테, 플로베르 등을 러시아에 번역 · 소개하고, 푸시킨, 고골, 레르몬토프, 톨스토이 등을 유럽에 번역 · 소개하여 그 당시 세계문학의 변방에 위치했던 러시아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에 우뚝 서게 했다. “그래요, 나는 이상하고 매력적이고 혐오스럽고 소중한 조국 러시아를 사랑하고 증오합니다” 19세기 러시아의 사회 ‧ 정치적 연대기 혹은 예술적 주석 나는 힘과 능력이 있는 한 셰익스피어가 말한 시대의 형상과 중압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주요 관찰 대상인 급변하는 러시아 교양 계층인들의 모습을 적합한 유형 속에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구현하고자 했다. -투르게네프,「장편소설에 부친 서언」(1879)에서 전제주의, 농노제도, 러시아정교는 19세기 러시아 사회를 강고하게 지탱하는 세 축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상황의 변화로 이 세 축이 흔들리면서 러시아의 사회 · 정치 지형도는 급변하고 러시아의 향후 개혁과 발전 방향에 대해 세대, 정파, 계층 사이 첨예한 갈등과 논쟁이 벌어진다. 『연기』는 독일 바덴을 배경으로, 러시아 농노제 폐지(1861) 이후 당시 해외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지식인들 ― 농민사회주의를 표방한 진보 진영과 모든 것을 농노해방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반동적인 진영 ― 을 중심으로 한 사회 · 정치적 테마와 이리나와 리트비노프의 위험한 사랑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다. 실제로 해외에서 활동한 러시아 혁명가들과 투르게네프 사이에 벌어졌던 뜨거운 논쟁의 예술적 반영이자 기록인 이 작품은, 주인공 리트비노프의 시선을 통해 진보 진영의 모호한 입장과 러시아 사교계의 위선과 탐욕, 그리고 보수 진영의 반동성을 적나라하게 희화하고 풍자한다. 민감한 문제를 다룬 투르게네프의 장편은 언제나 좌우 이념 투쟁의 격전장이 되었지만, 투르게네프는 러시아의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모국에 대한 애정과 증오를 담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며 꾸준히 견해를 피력했다. 다섯번째 장편소설인 『연기』는 개혁기 러시아의 혁명적 사건들에 대한 ‘예술적 주석’이자 ‘사회 · 정치적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가수’ 투르게네프가 그린 첫사랑의 빛나는 순간과 치명적인 유혹 ‘연기다, 연기’ 하고 그는 여러 번 되뇌었다. 갑자기 그에게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였다. 그 자신의 삶도, 러시아의 삶도, 인간의 모든 것도, 특히 러시아의 모든 것이 연기처럼 보였다.(259쪽) 서정시와 서사시, 단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거부할 수 없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과 휴머니즘, 낭만주의적 색체도 투르게네프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 리트비노프는 대학 시절 너무나 강렬했던, “한 생애에서 되풀이될 수 없고, 또 되풀이되어서도 안 되는 수난”과 같은 첫사랑을 했으나 허망하게 배신당했다. 시간이 지나 약혼한 몸으로 자신을 배신했던 이리나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리트비노프는 다시 흔들린다. 이리나 역시 리트비노프를 사랑했으나, 자유, 사교계의 풍요와 환락은 쉽게 저버릴 수 없다. 대책 없어 보이는 리트비노프의 순수함과 대비되어 이리나의 욕망, 이중성, 속물근성이 자연스럽게 폭로된다. 리트비노프와 타냐와 이리나의 삼각관계, 그들의 말과 행동, 미세한 제스처, 눈빛 등을 통한 복잡하고 모순된 감정의 섬세한 심리묘사는 ‘사랑의 가수’인 투르게네프의 기량을 잘 보여준다. 투르게네프는 사회의 대변혁 속에서 모든 것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형체 없이 떠도는 연기와 같은 시대의 분위기를 이 작품에 담아냈다. 열정적이지만 이기적인 이리나의 사랑, 혼란의 시대에 난무하는 지식인들의 공허한 말들. 투르게네프는 허무함이 연기처럼 맴도는 19세기 러시아를 혼란에 빠진 한 청년의 사랑과 삶을 통해 그려낸다. ■ 투르게네프에 대한 찬사 나에게 투르게네프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다. _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는 아름다운 지성인이며, 소설가들의 소설가이다. _헨리 제임스 정보 부족으로 오랫동안 침묵했던 러시아가 마침내 말을 하게 된 것은 바로 투르게네프를 통해서였다. _에르네스트 르낭 어떤 소설가도 이보다 더 꾸준한 찬사를 받으며 읽힐 수는 없다. _에드먼드 윌슨
잠든 사람과의 통화
김민지 저 / 11,000원 / 창비 “다 뺏기지 않은 마음에서 시작된 사랑이 덤불을 이룰 때”
모호한 세상을 끈질기게 탐색하고 변별하는 언어적 성취 경계의 기분을 응시하는 세세한 사랑의 관찰기 "후무사에서 만나요.
그래서 눈뜨자마자 편지를 씁니다.“우리는 고만고만한 손을 가지고 있어 서로 알아보기 쉬울 거예요.“ 밀도 높은 언어를 구사하며 자신만의 시세계를 쌓아온 김민지의 첫 시집 『잠든 사람과의 통화』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21년 계간 『파란』 신인상으로 등단한 후, 시어와 행간을 통해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고 존재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가는 자세는 이번 시집에서 한층 더 성숙해졌다. 특유의 호흡과 개성 넘치는 시어 덕분에 리듬을 타듯 읽히면서도, 독서를 마친 뒤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뭉근하게 싹트는 것도 바로 이 덕분이다. “‘마음 단어 수집가’와 ‘만물박사’를 자처하며 언어의 활력으로 세상 만물을 정돈”(김수이, 해설)해온 시인은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세상의 풍경을 부려놓는다. 그리고 시선을 붙드는 그 모든 풍경에는 세계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의 냄새”(해설)가 서려 있다. 이번 시집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독특한 소재들이다. 시인은 ‘헤드룸, top note, 유형성숙, 콜로라마’ 등을 소개하며, 이들에 대한 고찰이 곧 세계에 대한 심층적인 탐색으로 이어지게끔 인도한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단어 하나에 오래 머물게” 되고, “무심코 지나쳤던 모든 단어들에 대한 의심이 불쑥 피어”(강성은, 추천사)난다. 김민지의 시들에는 유독 공간감이 선연한데, 이번 시집에서 공간은 주로 ‘먼지’의 떠다님을 통해 감각된다. 「마티에르」, 「연면적」, 「dayglow」, 「구석을 내밀면」 등의 시 속에서 보얗게 피어오르는 먼지는 있는지도 모르다가 가만히 바라볼 때에야 눈에 걸리지만, 움직이는 순간 어지럽게 일어나고 빛을 받으면 잗다랗게 반짝이는 존재들이다. 시인은 그 개별적이면서도 뭉뚱그려 일컬어지는 먼지들에 눈길을 던진다. 시집에서 공간이 진정 비어 있는 장소가 아니듯 시인은 행과 행 사이의 의미적 간격, 나아가 존재들끼리의 본질적인 차이에 주목한다. 첫 시 「헤드룸」에서 화자는 “무엇 하나 정확히 떨어지지 않아/세상은//무수한 활개들로 중역되는/우회”라며 세상이라는 것이 결코 하나의 단면으로만 정의될 수 없음을 포착한다. 또 「어떤 기쁨은」에서 지적되듯, 혐오가 버젓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슬픔을 배척하는 기쁨은 슬픔의 공간을 박탈한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로 「콜로라마」는 같은 이름으로 묶이는 색깔도 실은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며, “같은 걸 받는다고 공평해지지 않”는 세상을 진술한다. 오히려 세계는 먼지와도 같은 개별 존재들이 느끼는 주관적인 기분들로 얼마든지 재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시인은 하나의 사안에서 파생되는 모든 이면을 알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기꺼이 “무겁고 부끄러워지는 일을 반복”(「콜로라마」)하는 것이 자신의 글쓰기가 되리라고 다짐한다. 시인은 서문에서 “따라 오릴 수 있는 점선과/비뚤거리는 목소리로/순면 같은 시절을”이라고 말한다. 대기중에 떠다니던 희부연 먼지가 가라앉아 투명한 공기만 남듯, 김민지는 이 고요한 소란을 차분하게 응시하며 경계의 영역에 자리 잡은 감정의 세목을 읊는다. “저는 제게 남은 이 느낌을 살려야 해요. 꿈을 가로질러 현실에 가닿는 목소리 상대의 곤한 숨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연결해두는 밤 『잠든 사람과의 통화』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시적 공간은 꿈의 세계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어둠, 잠, 꿈을 주요 소재로 삼는 시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보통의 상황에서 꿈의 세계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투영하거나 현실의 불안을 반영하며, 무엇보다 고정된 시공간의 장면이나 상태를 그려낸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꿈이란 곧 현실세계와 다름없이 삶이 진행되는 현장이며, “꿈같은 광경도/현실에서만 볼 수 있다”(「염소가 열리는 나무」). 즉 현실세계와 꿈의 세계는 쌍방으로 영향을 미치고, 꿈과 현실 사이의 위계와 경계를 허묾으로써 하나가 되는 두 공간은 같은 방향을 향하여 나아간다. 그 방향이란 꿈만 같던 일을 현실로 가져오고, 빈번하게 찾아오는 슬픈 환상을 “생활이 물고 온 말들”(「실키」)과 “현실을 부둥켜안는 목소리”(「외따로이」)로 보듬을 수 있게 되는 지향이다. 그럴 때 현실의 힘은 환상을 거뜬히 넘어선다. 화자가 꿈에서 겪은 일은 현실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그가 꿈에서 ‘체험’하는 일들은 현실의 이야기로부터 파생되는 실제 사건으로 인식된다. 화자는 꿈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상을 일상적인 장면에 포개어보고, “모든 전면전에는 기억할 만한 어둠이 있음”(「회문(回文)공작소」)을 실감하며 밤을 자각한다. 「꿈의 꿈치들」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이음매에 위치하면서, 동시에 꿈을 꾸는 데에 서투른 이른바 ‘꿈치’들을 나열한다. 홀로 밤을 견디는 일은 시인에게 고통스러운 노동과도 같은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김민지는 “흩어지던 꿈속”에서도 “어떤 밤의 밑면”(「구석을 내밀면」)을 염두에 둔 채 어둠 속에서 올곧게 빛을 바라본다. 어떠한 가능성을 한없이 기다려온 사람 특유의 쓸쓸한, 그러나 끈질기게 차분한 감각이다. 그리고 「후무사 자두」에서는 자두의 일종인 ‘후무사’로부터 ‘후무사’라는 이름을 가진 꿈속의 절을 상상하기에 이른다. “‘후무사’는 물론 “절이 아니”지만”(해설), 꿈속에서 어떠한 장소로 해석될 때 우리는 서로 만나 하트를 닮은 이 상큼하고도 끈적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네가 너를 안아주”는 일이 가능해진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사람”으로서 태어나 “사랑”을 거듭할 수 있게 된다(「후무사 자두」). 다시 말해, 이 시집은 꿈을 꾸듯 현실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논리적인 이해보다 직관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시인은 계속해서 “잠든 사람”의 꿈을 현실에 주사(走査)하고(「인부의 말」), 실제로는 먼지 낀 잡음만을 들을 수 있을 텐데도 상대와의 통화를 쉽사리 끊어내지 않는다. 그리하여 잠들지 못한 자신의 편안함보다 잠이 든 상대의 평온을 더욱 바라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 이 서투른 마음을 주고받은 결과로서 사랑은 자라고, “덤불을 이”루면서 손을 잡고, 긴 터널을 통과하여 마침내 땅을 뚫고 솟아나오는 “지구의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한다(「깍두기공책」). 사람이기에 끊임없이 엄습하는 “자신 없음”(「인부의 말」) 속에서도 여전히 속절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건네는 방향, 우리는 어쩌면 이것을 ‘김민지식 희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세세한 사랑이 가능할 것만 같은 기분을, 그러한 예감을 선사하는 시집이 이미 우리 앞에 도착해 있다.
세 인생
거트루드 스타인 저 / 이윤재 역 / 17,000원 / 문학과지성사 그러므로 나는 불행하다
그리고 그건 내 잘못도 인생의 잘못도 아니다
세 가지 평범한 삶, 세 편의 특별한 글 20세기 문학의 가장 급진적인 혁신가 거트루드 스타인이 남긴 모더니즘 여성 문학의 고전 20세기 예술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모더니스트의 영적 어머니’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의 소설 『세 인생Three Lives』이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90번으로 출간되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피카소와 헤밍웨이를 발굴한 모더니즘 예술의 대모인 동시에 시인이자 소설가, 비평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세 인생』은 스타인이 처음 출간한 작품으로 당시 혁신적 경향을 이끌며 크게 주목받았다.
독일 출신의 이주 노동자 애나와 리나. 흑인과 백인 혼혈의 유색인 멜런사. 세 사람은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비주류 노동계급 여성이다. 애나는 하녀 일을 천직으로 알고 본분을 다하지만 자신을 돌보는 일엔 인색하기만 하다. 후견인 고모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리나는 결혼을 앞두고 낭패를 겪게 된다. 비정한 부모를 혐오하며 심리적으로 고립된 멜런사는 완전한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막막할 뿐이다. 기댈 곳 없는 세 사람의 인생은 고달프고 팍팍하다. 인종차별, 신분 계급, 가부장 문화, 동성애 등 다양한 이슈를 대담하게 제기하는 이 작품은 서사적 · 선형적 · 시간적 관습을 깨는 혁신적인 스타일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잭 케루악과 같은 후대 소설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미국 문학사에서 특별한 걸작으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글쓰기를 발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_ 『라이브러리 저널』 전통적 서사를 벗어난 자유분방한 형식 '입체파 문학가' 스타인의 대담한 도전 『세 인생』은 거트루드 스타인이 1905~6년에 쓰고 1909년에 (자비로) 출간한 첫 작품으로 독립적인 세 작품으로 구성된다. 가상의 도시 브리지포인트에서 살고, 일하고, 사랑하는 「착한 애나」 「온순한 리나」 「멜런사」, 세 여성의 삶을 담은 이 작품에서 스타인은 형식과 언어의 대담한 실험을 시도한다. 전통적인 선형적 연대순 서술을 대신해 유의미한 에피소드들을 반복해 배치하고, 이렇게 에피소드가 거듭 등장하면서 주인공의 성격과 심리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단어와 구절, 문장과 문단을 반복하는 독특한 표현 방식은 작품의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세잔, 마티스, 피카소가 눈이 시야를 구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 것처럼, 스타인은 단어가 의미의 영역을 구성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평가받으며, ‘입체파 문학가’라고 불렸다. 현대 미술에서 눈이나 귀가 자연스럽게 주어진 현실로 보는 것이 그 자체로 관람자의 적극적인 구성의 산물이듯, 스타인의 소설도 독자들의 의미 구성 방식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이 작품은 스타인이 현대 미술을 발견한 흥분 속에서 쓰였다. 이 작품을 쓰기 불과 몇 년 전, 스타인은 오빠 레오와 파리에서 살롱을 열고 미술 작품을 수집하며 당대의 예술가들과 교유하고 있었다. 현대 미술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스타일이 작품에 스며든 것으로 보인다. 『세 인생』은 당시 발간한 출판사에서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낯선, 혁신적인 작품이었으며, 미국 문학에 모더니즘의 지평을 연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누가 그녀들을 불행하게 만드는가?
세 인물을 통해 그린 여성의 삶세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서로 만나지도 않으며, 각 이야기는 독립적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세 편 모두 비주류 노동계급 여성이 주인공이며 ‘멜런사’는 흑인과 백인의 혼혈로, 이 작품은 주변부 계층의 삶에 주목하여 인종차별, 신분 계급, 가부장 문화, 동성애 등 다양한 이슈를 제기한다. ‘착한 애나’는 자기 일(하녀 업무)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자신의 살림을 하듯 주체적으로 일을 하지만 고전적인 성역할을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헌신하지만 자신은 돌보지 않는 왜곡된 희생정신을 가지고 있다. ‘온순한 리나’는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인물로, 결혼과 출간 같은 중대사조차도 자기 뜻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타인의 뜻에, 그 집안의 권력자에게 휘둘리고 순종한다. ‘멜런사’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세상의 지혜와 이치를 터득하게 도와줄 사람, 진정한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사랑 속에서 권력관계에 상처 입고,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상처들만 남는다. 이들의 삶은 세 갈래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쩌면 각 특징들의 다양한 조합이 결국 여성들의 삶이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근본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여성들은 세 주인공들의 삶을 보면 부분적으로 자기 삶이 겹쳐질 것이다. 스타인은 ‘세 명의 인생’으로 세대를 넘어 여성의 삶에 대해 통찰할 수 있게 했으며, 삶의 비극을 만들어낸 사회적 문제들을 짚어 보여주었다.
홀로 중국을 걷다
이욱연 저 / 18,000원 / 창비 최고의 중국 현대 문화ㆍ문학 전문가
인문학자 이욱연의 진짜 중국 이야기
오해와 편견의 더께를 넘어 사람의 무늬를 읽어내는 특별한 산책 유쾌한 입담으로 방송, 유튜브, 강연을 종횡무진하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중국의 진짜 모습을 전해주는 인문학자 이욱연의 중국 여행 에세이 『홀로 중국을 걷다』가 출간되었다. 여행을 다닐 땐 특히 걸어서 산책하기를 좋아한다는 저자는 베이징부터 하얼빈까지 중국의 일곱 도시 곳곳을 누비며 지리, 음식, 건축, 역사, 문학, 영화 등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한중 수교가 시작된 직후 중국에서 유학한 1세대이자 루쉰 연구자ㆍ번역가, 중국학자로서 수도 없이 중국을 오간 저자는 중국을 걸으면서 발견한 것이 무엇보다 다채로운 인문(人文), 즉 사람의 무늬[紋]라며, 거리와 풍경 속에 새겨진 이 무늬는 슬쩍 보거나 겉만 봐서는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얼빈의 음식 궈바오러우나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먼 훗날 우리』, 루쉰이 즐겨 찾았다던 술집 등 평범한 작은 것 하나에서 오랜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그의 시선을 따라 중국을 산책해보자. 중국이라는 나라에 덧씌워진 왜곡과 편견을 넘어 중국의 진짜 얼굴을 만나는 아주 특별한 여행길이 될 것이다.
그간 우리에게 잘 소개되지 않았던 옌안, 지난, 사오싱 등 낯선 도시의 면모를 담아낸 것도 이 책의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수묵화를 펼쳐놓은 듯 아름다운 운하의 고장 사오싱은 중국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의 고향이자 전통주인 황주로 유명한 지역이다. 루쉰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저자답게 이 지역에 대한 해설은 유난히 종요롭다. 저자는 루쉰 생가 주변을 천천히 거닐며 그의 작품세계와 생애를 흥미롭게 들려줄 뿐 아니라, 언제나 권력자에게 단호했던 저항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지역 명주 ‘사오싱주’의 향기를 곁들여가며 설명한다.(6장 사오싱 ‘나를 보호하는 정신승리의 빛과 그늘)베이징부터 하얼빈까지, 중국 일곱 도시를 걷다 상하이 고급 호텔 바에서 패스트푸드 치킨을 파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작은 항구 도시였던 상하이가 19세기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며 강제로 개항된 역사와 함께, 이후 서구 제국의 조계지로서 빠르게 성장하고 번영했던 와이탄 지역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욱연 교수는 와이두바이 철교로 시작해 와이탄을 따라 내려오는 이 길을 혼자 걸으며 상하이 식민시대의 화려함과 강대국으로 부상한 현대 중국의 화려함을 함께 만끽한다. 영국이 만든 서양식 공원인 황푸공원에서는 배우 이소룡이 입구에 붙은 ‘중국인 출입금지’ 팻말을 발차기로 박살내는 영화 「정무문」의 한 장면을 곁들이는 한편, 중국 최초의 켄터키프라이드치킨 매장에 대한 비화에서 중국이 세계에 공표한 개혁개방 메시지를 읽어내는 등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중국을 생생하게 전한다.(3장 상하이 ‘삶의 경계와 허상을 넘는 욕망’) 아울러 저자는 산둥반도의 지난에서는 공자 테마파크를 방문한다. 최근 방영된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그려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 시기 극렬한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공자는 왜 다시 현대 중국문화에 스며들고 있는지, 역사적으로 공자는 중국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마오쩌둥의 생각은 그가 그렇게 거부하려고 했던 공자의 이념과 어떻게 닮아 있는지 등 이 지역 역시 흥미로운 주제로 가득한 여행길이 펼쳐진다.(5장 지난 ‘붉은 수수밭의 생명력은 어떻게 퇴화했는가’)
풍부한 역사적·문화적 지식 나를 발견하는 질문들 진정한 인문 여행이란 “지식을 축적하는 여행길이 아니라 삶을 통찰하는 지혜를 얻는 여행길”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번 책을 묶으며 특히 삶의 위대함과 찬란함 그리고 고단함과 비루함을 동시에 생각했다고 말한다. 주로 영화와 소설 속 인물들의 길을 따라가며 비범한 인생뿐 아니라 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초라한 인생도 깊은 애정으로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 속에서 한 인간의 유한한 삶은 더 큰 흐름의 일부로 다양한 울림과 감동을 준다. 『색, 계』로 유명한 중국 대표 작가 장아이링의 단편소설 「봉쇄」를 중심으로 일상과 꿈 사이를 오가는 인간의 욕망을 예리하게 포착한 부분은 상하이 꼭지 중에서, 나아가 책 전체에서 가장 여운이 길게 남는 내용이다. 아내가 있는 평범한 남자와, 일생을 ‘좋은’이나 ‘훌륭한’이라는 수식어에 갇혀 살던 여자가 퇴근길 일본의 공습경보로 멈춘 전차 안에서 아주 잠깐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 서로의 앞에 서 있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두 사람은 앞으로 다른 삶을 살자고 함께 다짐하지만, 봉쇄가 풀리고 전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균열이 일어났던 일상은 다시 흐르고 현실로 돌아온 남자는 ‘안 되겠다’며 여자에게 끝을 고한다.(3장 상하이 ‘삶의 경계와 허상을 넘는 욕망’) 이 소설에는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세상에는 진인(眞人)보다 호인(好人)이 훨씬 많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보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사는 사람이 더 많다는 뜻일 것이다. 상하이를 거닐며 저자는 우리의 삶에도 불현듯 1940년대, 그 순간의 공습경보가 울릴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 봉쇄의 순간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면할 수 있을까. 여행이라는 것은 일상을 떠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일상에 파묻혀 있던 자기를 건져내어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 곳곳에서 풍부한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러한 ‘나를 발견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이 저자의 여행길에 동행하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최고의 중국 전문가가 전하는, 어떤 방식으로 읽어도 즐거운 여행기 ‘유튜브 조회수 100만 영상 다수’ ‘미디어가 주목하는 최고의 중국 전문가’ 등의 수식어가 증명하듯 저자는 이 책에서 역사, 문학, 지리, 건축, 영화를 넘나들며 생생한 이야기를 전한다. 특히 특정 시대에 갇히지 않고 현대 중국의 모습을 풍성하게 담아냈다는 점이 이 책을 실제 여행에도 참고삼을 수 있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거대한 흐름으로 얽히고설켜 마치 장편소설을 읽는 듯한 흥미진진함을 주는 한편, 부분부분 발췌해 읽어도 쇼츠 클립을 보는 듯한 간편한 독서가 가능하다. 특히 자신이 직접 가본 곳을 찾아서 읽어본다면 그곳의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하는 색다른 재미를 얻을 수도 있다. 지금 한국인에게 중국은 어느 때보다 복잡한 존재다. 경제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나라가 된 지는 오래지만, 동아시아의 정치상황은 나날이 복잡해지고 문화적 적대감은 상호 간에 극심하게 높다. 그럴수록 ‘진짜’ 중국이 어떤 나라이고, 그 안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어떤 문화가 숨 쉬고 있는지는 점점 왜곡되어간다. 그럴수록 역사와 문화를 통해 한발 더 중국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가게 해주는 이 책의 존재는 중요하다고 하겠다. 저자는 하얼빈 어느 식당에서 “안중근이 거사 전에 마셨다고 하는 (…) 위치안 고량주를 털어넣”으며 “동아시아의 평화 없이는 한국의 평화도 없다”고 나직이 말한다.(8장 하얼빈 ‘의로움을 위해 산다는 것’) 저자가 홀로 중국을 걷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평화를 향한 도정이다. 이 길에 언젠가 어딘가를 홀로 걷게 될 독자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내일의 엔딩 김유나 저 / 16,000원 / 창비 나의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차오를 때,
멀리서부터 하나둘 불을 밝혀오는 아름답고 눈부신 기억들
창비신인소설상 수상 작가 김유나의 첫번째 소설
흔들리는 마음의 곁을 따스하게 비추는 시선2020년 “화자의 갈팡질팡하는 마음 곁에 나란히 서서 그 마음을 물끄러미 응시하게 되는 독특한 힘이 있다”는 평을 받으며 창비신인소설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 김유나의 첫번째 소설 『내일의 엔딩』이 출간되었다. 작가의 첫 책이자 첫 장편인 이번 소설은 창비의 젊은 경장편시리즈 소설Q의 스무번째 작품이다. 『내일의 엔딩』은 아버지의 투병과 죽음을 곁에서 홀로 지켜온 주인공 자경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간병이 길어질수록 쓸쓸한 감정에 익숙해지고 그저 무미건조한 날들만이 계속된다고 생각했던 자경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나며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주었던 소중한 존재들을 하나씩 발견해낸다. 지극히 평범하고 어쩌면 비참하게 보이는 삶일지라도 그 내면의 이야기를 곡진하게 풀어내어 끝내는 인물의 단순하지 않은 마음을 설득해내는 특유의 솜씨는 이번 소설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은 간결하고 힘 있는 문장으로 홀로 가족의 돌봄을 감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현실감 넘치게 그리면서도 인물이 지난한 삶 속에서 빛나는 희망의 자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렇게 “결말의 자리에서 바닥에 선을 긋고 다시 출발선에 서는 인물”(정용준, 추천사)을 통해 포기하지 않고 삶을 계속해나갈 때 만나게 되는 새로운 내일을 눈앞에 펼쳐 보인다. “혼자가 된 이후에 더 사랑하는 쪽으로, 덜 혼자가 되는 방식을 택하는 쪽으로”(김유담, 발문) 나아가는 이야기가 전하는 담담한 위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끝내 우리 삶의 연약한 한 부분을 뜨겁게 끌어안을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우리의 엔딩이 결코 쓸쓸하지 않도록 소설은 주인공 자경이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자경의 아버지는 6년 전 갑작스레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의식 없이 누워 있게 된 아버지를 홀로 돌보게 된 자경의 삶은 말 그대로 버티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늘어나는 빚과 호전되는가 싶다가도 악화되는 아버지의 상태는 자경의 외로운 삶을 더욱 삭막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간신히 이어지던 날들은 어느 가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모두 끝난다. 대전에 마련한 빈소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자경은 자신을 위로하러 온 예상 밖의 사람들을 보며 마음이 조금 누그러지지만 허덕이는 것이 익숙해진 삶이 그날 하루라고 피해 가지는 않았다. 기한이 촉박한 업무들, 자신이 상중일 때 단체로 퇴사해버린 팀원들, 너무 진지한 관계가 될까 두려워 집안 사정을 전하지 못한 연인 응현이 아무것도 모른 채 쏟아내는 원망까지……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아버지와 함께 살던 고향집이 갑자기 팔려 당장 이틀 안에 짐을 빼줘야 하는 현실이다. 지금이 아니면 집을 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경은 장례가 끝나기 무섭게 무거운 마음을 안고 고향집으로 향한다. 김장비닐 가득 담아 몇번이나 짐을 비우고 중고 가구점에 헐값으로 가구들을 넘기기를 반복하던 저녁, 자경은 서재 한구석에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일기장에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던 자경의 이십대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남긴 기록들이 있었다. 자경은 아버지의 오래된 DVD장에 꽂혀 있는 자신의 마지막 영화 「소설小雪」을 찾아 재생하고 오래전 한겨울 무주에서 영화를 촬영하던 어느 날들을 떠올린다. 자경은 자신이 만든 영화가 아버지가 남긴 일기의 내용처럼 “인간을 기어이 살아가게 하는 삶의 소중한 빛” 같은 가치를 담은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삶에서 그런 것을 발견해보려 시도했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약 이십년 만에 다시 재생해본 영화 앞에서 자경은 무주에서 보았던 오묘하고 아름다운 장면을 기억해낸다.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 자경의 영화에서 주인공이 끝내 찾지 못했던 희망의 불빛은 모든 것을 잃었다 생각한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자경은 언제나 멀리서 희미하게 반짝이며 자신을 지켜주었던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세간 살림이 다 나가고 내일이면 다른 이의 소유가 되는 고향집에 누워 자경은 자신을 지탱해주었던 소중한 존재들을 하나하나 마음에 담아본다. 그렇게 어두웠던 오늘을 무사히 지나 빛나는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김유나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로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고 차분한 태도로 자신의 앞에 놓인 하루를 감당한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홀로 아버지를 간병하면서도 그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듯 묵묵히 한해 한해를 지나온 자경, 안정적인 직업 없이 매일을 견디면서도 확답을 주지 않는 연인의 곁을 변함없이 지키는 응현의 모습은 씩씩한 것을 넘어 어딘가 서늘하고 무감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현실에 치여 많은 감각이 무뎌지고 단단해질 만큼 단단해졌다고 느끼는 날들 속에서도 문득 마음이 흔들리는 방향을 따라가게 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잊고 있던 이상한 순간”이 떠오를 때 애써 외면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날이. 자경은 고향집에서 새벽을 맞이하며 어떤 기억 속을 걷게 된다. 너무 꼭 쥐어 시들어버린 꽃 같은 순간들. 불을 환히 밝힌 할머니 집과 먼지처럼 작아지던 도깨비불, 툇마루에 앉아 마늘을 빻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아빠, 잎, 눈, 구름 한조각, 계절을 입은 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감나무 아래를.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136~37면) 언제나 외로이 혼자 감당해왔다고 생각했던 시간을 함께해주었던 소중한 존재들을 떠올리며 자경은 상실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만난다. 우리는 때로 오늘과는 다른 내일의 엔딩을 꿈꾼다.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원치 않는 방향으로 요동치는 감정들, ‘희망’이나 ‘사랑’ 같은 이름을 시원하게 붙여주고 싶지만 “산다는 건 희망도 절망도 아니다”라고 적게 만들거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진심을 마주할 용기를 빼앗는 무력감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으면 하는 심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가게 만드는 힘은 소리 없이 곁을 지켜주었던 소중한 존재들로부터 온다. 이 책은 우리가 두고 온 많은 것을 다시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줄 것이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랑의 기억이 “용기를 내는 엔딩의 방향으로 자경을 밀어줄 수 있었던”(작가의 말) 것처럼 오늘을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따뜻한 내일의 엔딩을 향해 나아가도록 이끌어주는 순간들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
천양희 저 / 12,000원 / 창비 “소녀는 저를 뒤집는 힘으로
별자리 하나를 가졌다”
고독과 슬픔 한가운데서 띄워 올린 찬연한 목소리 어둠 속에서 더욱 형형하게 빛나는 천양희의 고결한 시세계 만해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소월시문학상 등 여러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고 지난해 만해문예대상 수상으로 오랜 작품활동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한 천양희 시인의 신작 시집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가 창비시선 510번으로 출간되었다. 1965년 등단한 이래 삶의 고독을 눈부신 서정의 언어로 승화시키며 굳건히 시의 거리를 지켜온 우리 시단의 중진이 열번째로 펴낸 뜻깊은 시집이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깊이 통찰하면서 ‘예순한편의 슬픔’을 나직이 노래한다.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고독과 슬픔을 주조음으로 하면서도 “아름답고 융융한 예술적 사유”와 “숭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유성호, 해설)이 그 틈에서 눈부시게 빛난다. 내년이면 시력(詩歷) 60년을 맞는 시인은 한결같은 신실한 시심(詩心)을 간직하며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채”(황유원, 추천사) 여기까지 왔다. 평생을 오로지 ‘시인’으로 살기 위해 시의 외길을 걸어온 시인의 간절함이 뭉클하게 와닿는다. 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시,
올곧은 나무 같은 '시인의 존재론' 천양희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시편마다 고통과 슬픔으로 단련했을 고귀한 시어들이 어둠 속의 별빛처럼 형형한 덕분이다. 시인은 “물음표 같은 세월”(「바람역」) 속에서 “시를 쓰는 것은/목숨에 대한 반성문”(「반성문」)이라는 굳은 심지로 시를 써나간다. “운명에 만약이란 없”다고 믿으며, 신과 타인에게서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지독하게 고독한 세계에서 시인은 “끝 모를 간절함밖에 남은 것이 없는”(「삼분간」) 삶을 겸허하게 품어 안을 뿐이다. 지난 60년간, 시인이 세계를 품는 방식은 시를 쓰고 또 쓰는 것이었다. 마치 구도자와 같은 그러한 자세는 이 시집에도 우뚝하게 새겨져 있다. 그는 “시 쓰기란/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추분의 시」)이자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한 소식」)이며, 삶과 세상의 진실을 말하는 데 “시보다 더 충분한 것은 없다”(「추분의 시」)고 역설한다. 그러한 시를 향한 자세가 어느 한가지에 몰두해본 적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어느샌가 스며들어온다. 자신을 “수직으로 선 나무”의 “곧은 언어”(「치유의 시작」)를 빌려 “자연을 쓰는 서기(書記)”(「내가 떠나는 이유」)에 비유하는 시인은 시집 말미에 이르러 ‘시인의 존재론’을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세찬 물살에 굽히지 않고/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은” 존재, “속을 텅 비우고도 꼿꼿하게/푸른 잎을 피우는 대나무 같은” 존재, “폭풍이 몰아쳐도 눈바람 맞아도/홀로 푸르게 서 있는 소나무 같은” 존재, 그리하여 “불굴의 정신으로//자신에게 스스로 유배를 내리고/황무지를 찾아가는 사람”(「시인」)이 곧 ‘시인’이다. 이러한 올곧음 덕분에 『몇차례 바람 속에서도 우리는 무사하였다』에는 단정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맑지만 묽지 않은 언어의 향연이 가득하다. 오랜 고통 끝에 이룩한 득음의 경지
한국 시에 내려진 찬연한 축복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먼 길,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시의 길”(시인의 말)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 여기까지 왔다. 오랜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을 마음의 밑바닥에서 삭인 끝에 마침내 득음의 세계에 이르렀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미학적 성취는 “한국 시의 찬연한 축복이요,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커다란 기쁨의 원천”(해설)일 터, “스스로 빛나는 별자리”(「아름다운 진보」)에 아로새긴 순결한 “정신의 지문(指紋)”(「낱말이 나를 깨운다」)이 돌올하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길목에서 시인은 “이제부터 나에게는/시작이 필요하다”고, 그것이 “살아야 할 이유”(「치유의 시작」)라고 힘주어 말한다. “길이보다 깊이를 생각하는 새 아침”(「발자취」), 오늘도 한편의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은 가지런한 빈 종이 위에 펜촉을 올릴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 깊이 새긴 물음표”(「시인 지망생에게」)를 조용히 훑으면서, “가진 것이 시밖에 없을 때 웃는다”(「딱 한줄」)고 여전히 답할 것이다.
당시삼백수
손수 저 / 임도현 역 / 20,000원 / 문학과지성사 “당나라 시 3백 수를 숙독하면 누구나 시를 읊조릴 수 있다”
희로애락을 미학적으로 표현해 인간과 삶을 성찰하게 하는,
두보, 이백, 왕유, 백거이를 총망라한 당시唐詩의 정수 청나라 문인 형당퇴사 손수가 당나라 시인 77명의 작품 313수를 선정하여 편찬한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91~192번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역대 당시 선집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으며, 현재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꼽힌다. 중국 문화의 황금기였던 당대唐代의 시는 전통적으로 문학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데, 그 속에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 사회적 성찰, 서정적인 감정 등 다양한 주제가 다양한 형식으로 담겨 있다. “당나라 시 3백 수를 숙독하면 시를 읊조릴 수 없는 자도 읊조릴 수 있게 된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 책은 한시의 교과서로 평가받지만, 현대 한국인이 직접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보다 많은 사람이 한시를 읽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쉬운 언어로 해석하고, 문화 차이를 넘어 시를 만끽하도록 자세한 해설과 주석을 달았다. 시대를 막론하고 누구나 공감하는 시, 만고의 절창 당시唐詩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또 전달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시를 지었고 노래를 불렀다. 그중에서도 어떤 시들이 시대를 뛰어넘어 누구나 공감하고, 오랜 세월 칭송받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즐거움과 슬픔, 고뇌와 괴로움을 미학적으로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를 읽으면 미적 체험을 향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 본연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인식이 넓어진다. 『당시삼백수』는 건륭乾隆 29년(1764)에 청나라의 문인 손수가 엮은 당시 모음집이다. 당나라 시는 전통적으로 문학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는데, 청나라 때 당나라 시를 집대성한 『전당시全唐詩』에는 시인 2,200여 명의 시가 5만 수 가까이 수록되어 있다. 손수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읽고 익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중 3백여 수를 선정했으니, 한시 중에서도 최고로 인정받는 당시唐詩의 정수를 모아놓은 것이다. 3백여 수를 선정하여 ‘삼백’을 책 제목으로 삼은 것은 『시경詩經』이 3백여 수를 수록하여 ‘시삼백詩三百’이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당시삼백수』에는 두보, 이백, 백거이, 한유 등 우리도 익히 아는 시인들뿐만 아니라, 제왕, 사대부, 승려, 가녀, 무명씨 등 다양한 사람들이 쓴 시가 담겨 있는데, 인간과 자연의 조화 ‧ 사회적 성찰 ‧ 서정적 감정 등 다양한 주제와 다양한 형식의 시를 총망라하고 있다. 흔히 한시집에서 엮는 율시律詩와 절구絶句뿐 아니라 고시古詩와 악부樂府에서도 문학성이 높은 작품을 골라 엮어 한시의 다양한 형식을 모두 체험할 수 있다. 시는 형식별로 분류되어 있으며 각 형식 내에서는 시인의 활동 시기 순서로 수록되었다. 이 책은 역대 당시선집 중에 가장 널리 유행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당시 선집으로 평가받고 있다. “글방의 교과서로 삼아 아동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백발 노인들 역시 버릴 수 없게 하였으니……” 오직 당나라 시 중 인구에 회자되는 작품을 대상으로 특히 중요한 것을 골라서 각 시 형식별로 수십 수를 얻어 총 3백여 수를 수록하여 한 편으로 만들었는데, [……] 세상 사람들의 말에 “당나라 시 3백 수를 숙독하면 시를 읊조릴 수 없는 자도 읊조릴 수 있다”라고 하는데, 이 책으로 시험해보기 바란다. _손수의 서문에서 손수의 출간 의도는 원서의 서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어린 학생들은 배움을 시작하면 우선 시를 학습하였으며, 시는 당시 지식의 기반이자 삶의 문화였다. 『천가시』가 기본적인 아동 학습서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손수는 시의 선정 기준이 모호하고 당나라 시와 송나라 시가 섞여 있으며, 율시와 절구 두 체제만 수록한 것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 자신의 기준으로 선집을 만들었다. 손수는 자신의 시 선정이 교과서적 권위를 확보하기를 바랐으며, 동시에 나이의 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이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전공자가 아닌 한국의 독자들이 한시를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한자에 매몰되면 공감과 감동을 놓칠 수 있다. 또한 대략 7세기부터 9세기 사이 중국 사람이 지은 시를 21세기 한국 사람이 읽고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옛날 중국 사람의 생활 양식과 사고방식, 당시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이해한다면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손수가 모든 이에게 좋은 시를 전하고 싶었듯이, 이 책 역시 보다 많은 한국의 독자들이 보다 쉽게 중국의 한시를 읽고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성숙된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에 따라 시는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해석하고, 시대적 ‧ 문화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친절한 해설과 주석을 달았다.
우리에게 내일이 없더라도
도갈드 하인 저 / 안종희 역 / 17,000원 / 한문화 출구 없는 기후 재앙의 시대 폐허 위에 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에게 내일이 없더라도》는 20년간 환경운동에 헌신해 온 BBC 기후 전문 기자가 갑자기 기후 변화에 관해 말하기를 멈춘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구의 운명을 누구보다 걱정하며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왜 기후 변화에 대해 침묵을 선택했을까? '기후 위기 해결하기를 포기했다'는 비난 여론에도 한동안 침묵했던 그는 여러 과학자 및 활동가들과 나눈 대화, 시대를 앞선 위대한 사상가들의 저서,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과 분석을 근거로 기후 변화의 궤적과 환경운동의 역사, 기후 위기를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역학관계 등을 설명한다. 기후 위기를 다룬 많은 책이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달콤한 말로 변화를 호소한다면, 이 책은 기후 변화에 관한 논의가 더는 의미가 없으며, 지구는 이미 폐허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는 어두운 현실을 이야기한다. 근대성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과 성장 중독으로 자행한 인간의 파괴적 행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과학'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태도가 지구를 어떻게 제어와 관리의 대상으로 몰고 갔는지, 과학이 제시하는 수치와 통계가 어떻게 우리 눈을 가렸는지, 암울하지만 선명한 진실을 보여준다. 녹색 성장, 지속가능성,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 등 인류가 생각해 낸 정책들이 더는 해결책이나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를 확인하다 보면, 이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충격적인 현실에 눈뜨게 된다. 또한 강요된 낙관주의나 근거 없이 막연하게 좇는 희망만으로는 예정된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것과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려 애쓰는 대신 기꺼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남은 폐허 더미에서 무엇을 찾아낼지 고민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왜 기후 위기에 관해 말하기를 그만두었는가 《우리에게 내일이 없더라도》는 20년간 환경운동에 헌신해 온 BBC 기후 전문 기자가 갑자기 기후 변화에 관해 말하기를 멈춘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구의 운명을 누구보다 걱정하며 활동을 이어가던 그가 왜 기후 변화에 침묵하기로 했을까? '기후 위기 해결하기를 포기했다'거나 종말론을 믿는 사이비 종교의 신도가 되었냐는 비난 여론에도 한동안 침묵했던 그는, 여러 과학자 및 활동가들과 나눈 대화, 시대를 앞선 위대한 사상가들의 저서,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관찰과 분석을 근거로 기후 변화의 궤적과 환경운동의 역사, 기후 위기를 둘러싼 정치적·사회적 역학관계 등을 설명한다.
기후 위기를 다룬 많은 책이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달콤한 말로 변화를 호소한다면, 이 책은 기후 변화에 관한 논의가 더는 의미가 없으며, 지구는 이미 폐허나 다름없는 곳이 되었다는 서늘한 현실을 이야기한다. 근대성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과 성장 중독으로 자행한 인간의 파괴적 행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과학'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태도가 지구를 어떻게 제어와 관리의 대상으로 몰고 갔는지, 과학이 제시하는 수치와 통계가 어떻게 우리 눈을 가렸는지, 암울하지만 선명한 진실을 보여준다.녹색 성장, 지속가능성, 온실가스 배출량 규제 등 인류가 생각해 낸 정책들이 더는 해결책이나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를 확인하다 보면, 이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충격적인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또한 강요된 낙관주의나 근거 없이 막연하게 좇는 희망만으로는 예정된 파국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려 애쓰는 대신 기꺼이 상실을 받아들이고 남은 폐허 더미에서 무엇을 찾아낼지 함께 고민하자고 독자를 이끈다.
환경운동 최전선에서 투쟁한 BBC 기후 전문 기자의 대재앙을 넘는 최후의 제안! 도갈드 하인은 기후 전문 기자이자, 환경운동가, 개혁 사상가, 작가, 강연가로 삶의 대부분을 기후 변화의 최전선에서 보냈다. 2009년 기자이자 환경운동가인 폴 킹스노스와 함께 만든 '다크 마운틴 선언문'을 통해 파괴적인 현대 문명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으며, <뉴욕 타임스>는 그를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환경논쟁의 흐름을 바꾸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런 그가 다양한 기후 위기 관계자들을 만나며 기후 변화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예정된 현실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으며 더 이상 신기루 같은 희망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 없다는 자각으로 각종 강연, 교육, 방송 활동을 포기하고 칩거하다시피 했다. 언젠가는 그 이유를 밝힐 때가 오리라 생각하던 그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팬데믹 상황에서 과학정치의 출현을 목격하며 과학은 인류 앞에 놓인 문제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과학이 제시해 온 기후 위기 해법은 실패했다. 과학은 능력 이상의 역할을 억지로 떠맡았을 뿐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 기술의 진보가 심어준 착각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과학이 누리는 권위가 너무나 과장되었지만, 과학의 지배적 역할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생활과 기후 대책도 과학이 옳다는 가정 아래 만들어졌다. 하지만 과학이 틀렸다면 어떻게 될까?기후 위기는 잘못된 탄소 정책처럼 특정 부분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생활방식 때문에 생겨난 결과이므로, 이제는 죽어가는 현대 사회와 작별하고 새로 태어날 시대의 산파로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이 책은 인류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과 우주라는 큰 시스템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에 맞는 겸손함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금의 상황을 정확히 판단하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며 이 괴상하고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가치를 찾기 위한 희망의 연대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너를 기억하는 풍경
손홍규 저 / 14,000원 / 문학과지성사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날. 깊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것만 같았던 날.
내 것인 줄 몰랐던 감정이 내 것임을 알게 된 날이었다” 삶의 굽잇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슬픔의 첫 순간들
짙은 어둠 속 터널을 지나 그 순간들을 기억하는 기찻길 마을 다섯 아이의 이야기 작가 손홍규의 연작소설 너를 기억하는 풍경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그는 이상문학상, 백신애문학상, 노근리평화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두루 휩쓸며 한국문학에서 독보적인 색채와 탄탄한 서사로 그 위상을 오래 지켜왔다. 그간 낯설고 팍팍한 도시의 주변부, 그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난하고 지질한 인생들을 통해 “사라져가는 공동체적 삶과 인간성 소멸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받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무대를 1980년대 어느 기찻길 시골 마을로 옮겨왔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 마을에서 나고 자란 다섯 아이의 성장담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은 “너를 기억하는 풍경”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짙은 어둠 속 터널을 지나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고 기억하는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다. 다섯 명의 또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다섯 편의 작품으로 엮어낸 연작소설로, 우리가 삶의 굽잇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슬픔의 첫 순간들을 작가 특유의 진중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섬세하게 풀어냈다. 장편소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이후 3년 만이고, 소설집으로는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이후 4년 만에 출간하는 이 책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통해 소설 세계에 깊이를 더해왔던 작가 손홍규의 초심을 반영하는 문학적 바탕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지만 유년기의 순진무구함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의 성장담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이 책은 상처와 아픔, 슬픔이라는 인간 본연의 존재론적 문제를 1980년대 스러져가는 농촌의 소슬한 풍경 속에 녹여내며 가난과 모순, 차별과 폭력이라는 시대의 굴곡과도 자연스럽게 버무려놓았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시대적 맥락과 연결 지으며 특유의 의뭉스러운 유쾌함으로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 것은 작가의 탁월한 재능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슬픔이 우리를 철들게 한다지만 이별과 상실, 미움과 혼란, 죽음과 같은 삶의 비극적 국면은 아이들에게 그 자체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마음속에서 낯선 감정이 생겨나고 그 감정의 정체를 마침내 깨닫게 된 날.”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바로 그날은 누구에게나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일뿐더러 때로는 깊은 상흔을 남기기도 하며, 무릇 유년기가 막을 내리고 삶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닥쳐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일지도 모른다.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존재론적 고민과 문제의식이 작품 곳곳에 포진해 있다는 점에서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청소년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도 충분하다. “미약하게 감지했던 삶의 비밀 같은 게 꽃향기를 담은 밤공기가 콧속으로 와락 밀려 들어오는 순간처럼” 덮쳐오는 그 시기를 서정적이고도 날카롭게 포착해낸 이 책에서 독자들은 어느덧 중견작가의 반열에 오른 손홍규의 성숙하고 농익은 글쓰기를 확인할 수 있으니, 작품 내내 따스한 시선을 견지하는 작가의 온기가 여운처럼 남는다. “다시 터널 앞에 섰다. 내가 잊은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어떤 기대도 품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기대임을” 「작가의 말」에서
삶이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세대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위로와 응원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연작들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1980년대 기찻길 마을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또래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에 이르는 시기를 그려냈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수’(「기찻길을 달리는 자전거」), 울창한 대숲에 웅크려 앉아 가느다랗게 늘켜 우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미워해도 되는 건지 자문하게 된 ‘준’(「어느 날 대숲에서」), 으레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나기 마련인데 삶은 상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영’(「가난한 이야기」), 무덤덤하기 그지없던 가족들이 어딘가에서 얼굴을 돌린 채 울면서 살아왔음을 알아차린 ‘민’(「소가 오지 않는 저녁」), 그리움이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고 잃어버리고 없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걸 깨닫게 된 희(「손금」)까지 예민하고도 혼란한 시간을 겪어내는 다섯 아이의 성장통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냈다. 작가는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슬픔의 첫 순간들을 담아내며 독자들에게 공감과 더불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주인공들 외에도 이 책에는 가족, 이웃, 친구와 같은 주변 인물들도 골고루 생명력을 가지며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쉰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티격태격 장난이나 풋사랑의 설렘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의 비밀을 지켜주는가 하면, 어른들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야기에서 알 수 없는 삶의 비밀을 엿듣기도 한다. 작품은 시종일관 서정적으로, 때론 유쾌하게 전개되지만 그 한편에는 도시로 사람들이 떠나가며 허물어져가는 농촌의 풍경이라든가 폭력적인 아버지, 시위에 나갔다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돌아온 형, 미국에 입양된 아픈 동생을 그리워하는 오빠 등 시대의 굴곡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 시절 기적을 울리며 캄캄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기차는 고향을 떠나 도시 주변부에서 고단하고 비틀린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앞날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기적을 기대하게 하는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하다. 다시 터널 앞에 선 작가는 이 작품에서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터널을 지나 미지로 나아가는 너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기적 같은 이야기 너를 기억하는 풍경의 또 다른 묘미는 예전 모습은 잃었지만 내 가족과 이웃, 고향 마을의 풍경과 가슴 고이 묻어두었던 감정까지 그때 그 시절을 감질나는 사투리와 능숙한 언어로 되살려내며 이제는 사라진,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을 새삼 일깨운다는 데 있다. 확독이나 양푼과 같은 가재도구들이며 소소한 먹을거리, 논밭이 펼쳐진 마을 풍경 너머 저 멀리 기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완행열차와 연탄을 싣고 나오는 트럭들과 까만 분탄이 날리는 연탄공장의 모습까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그때 그 시절의 정경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 시기를 지나온 어른 세대에게는 나고 자란 터전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청소년들에게는 한층 다양한 문학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이렇듯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의 장을 마련하는 이 책은 작가 손홍규가 초등학생 딸을 위해 쓴 작품이기도 하다.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캄캄하고 두려운 길로 나서는 아이들을 응원하는 책이다. “나는 너와 함께 터널 앞에 서 있었다. 너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너는 귀를 기울였지. 이 풍경이 내 슬픔마저 나누어 가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듯. 나 역시 너의 풍경이 되어 언제까지나 너를 기억하고 기다리겠지. 네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 기적을 기다리는 동안 기적은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작가의 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