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신간 도서 소개(종합) - 매주 업데이트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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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의 심리학 오성주 저 / 22,000원 / 북하우스 “감상은 미술 작품 앞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심리 행동이다.” 근대와 현대, 서양과 동양을 아우르는 그림 감상의 법칙 심리학 실험으로 예술 감상의 비밀을 밝히는 미술 교양서! 예술을 심리학적 분석 대상으로 삼는 학문인 ‘예술심리학’은 1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예술을 실험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서울대에서 약 10년 동안 학부생을 대상으로 예술심리학 강의를 진행한 오성주 교수는 『감상의 심리학』에서 예술심리학의 흥미로운 실험과 결론을 소개하면서,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뒷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낸다. 예술심리학은 예술이란 철저히 주관적이고,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영감이나 광기, 시대적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기존의 관념에 도전장을 내민다. 예술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는 일반 감상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통찰을 줄 수 있고, 예술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다. ★★★ 서울대 인기 강의 그림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난해한 현대 미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미술은 좋지만 감상은 어려운 이들을 위한 교양 미술책! ○ 작가의 의도를 알면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까? ○ 비둘기가 모네와 피카소의 그림을 구분할 수 있을까? ○ 왜 어떤 사람들은 징그럽고 그로테스크한 그림에 끌릴까? ○ 이성에게 첫눈에 반하듯이 그림에게도 첫눈에 반할 수 있을까? ○ 미술관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감상 전략은 무엇일까? 미술관에 가면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지만, 막상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막막한 순간이 온다. 제목과 설명을 읽어도 어렵고, 어린아이 낙서처럼 보이는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려다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때로는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보면서 “이게 좋은 그림인가?”라는 의문이 들면서도, 누군가에게 물어보기 민망해서 질문을 속으로 삼키기도 한다. 이렇듯 미술 감상이 어렵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면, 『감상의 심리학』이 그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최근 미술 감상의 기회가 많이 늘어나면서, 시중에는 미술 전문가들이 쓴 다양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부분의 책은 작품의 역사, 시대적 배경, 화가의 생애를 중심으로 미술을 설명하는데, 이러한 접근법이 감상의 전부일까? 흔히 연극의 3요소로 ‘희곡’, ‘배우’, ‘관객’을 말하듯이, 미술의 3요소를 꼽는다면 ‘그림’, ‘화가’, ‘감상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미술책의 주인공은 보통 화가와 작품이다. 화가의 심리 상태나 그림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분석은 많이 접할 수 있지만, 감상자의 마음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설명을 찾기는 어렵다. 감상자가 없는 미술은 무의미함에도 그렇다. 감상자의 경험이 예술을 완성한다. 그림 감상자의 행동을 심리학적으로 풀어낸 미술 교양서 『감상의 심리학』은 감상자가 주인공이 되는 미술 교양서다. 이 책은 미술 감상을 감상자가 그림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감상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능동적인 심리적 과정으로 본다. 지금껏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던 감상자의 경험에 주목하면, 다양하고 흥미로운 질문들이 제기된다. 사람들은 그림 세계와 실제 세계를 다르게 인식할까? 미술관에서 관람객들은 그림을 얼마나 오래 볼까? 왜 사람들은 풍경화를 좋아할까? 어떤 그림을 볼 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인상주의 그림이 인기가 있을까? 정지된 그림에서 역동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림을 볼 때 몸은 어떤 역할을 할까? 왜 어떤 그림들은 역겨울까? 지각심리학자인 오성주 교수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예술심리학을 소개한다. 예술을 심리학적 분석 대상으로 삼는 학문인 ‘예술심리학’은 1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예술을 실험적이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예술심리학은 예술이란 철저히 주관적이고, 예술 작품은 창작자의 영감이나 광기, 시대적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기존의 관념에 도전장을 내민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감상자의 행동을 탐구하는 예술심리학 분야의 흥미로운 실험과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그림을 볼 때 우리의 인지와 감정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감상의 깊이를 더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그리고 감상자의 경험이 예술을 어떻게 완성하는지를 탐색한다. 미술관에 걸린 그 많은 그림을 다 봐야 할까? 미술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유용한 감상 전략을 제안하다 예를 들어 그림에 대한 지식, 제목, 설명은 감상에 도움이 될까? 한 심리학 연구팀은 제목과 설명이 그림 감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밝히기 위해 실험을 진행했다. 연구팀은 실험 참여자들을 세 그룹으로 나눴다. 세 그룹은 각각 아무런 정보 없이 그림만 감상하는 그룹, 제목과 함께 감상하는 그룹, 제목과 설명문을 보면서 감상하는 그룹이었다. 참여자들은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을 얼마나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했는지를 스스로 평가했다. 실험 결과, 그림에 대한 정보가 더 많이 제공될수록 감상자는 그림이 더 의미 있다고 평가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경향은 그림이 추상적일수록, 그리고 제공되는 정보가 작품과 직접적으로 연관될 때 강해졌다. 예술심리학의 실험은 어떻게 해야 그림 감상 경험과 관련한 유용한 영감을 준다. 앞선 실험 결과를 예로 들면, 전시 기획자와 큐레이터는 관람객의 그림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서 어떤 정보를 제공해야 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림과 직접 연관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하며, 특히 추상화와 같이 무엇을 표현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일 때 더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관 관람객의 행동을 분석한 심리학 연구들을 보면 미술관에서 어떤 감상 전략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있다. 인지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그림을 0.1초만 보고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미술관에서 진행된 연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처음 접하고 10초 이내에 그림을 더 볼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절반 이상의 관람객이 그림을 한 번씩 쭉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그림으로 다시 돌아와 재감상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저자는 심리학 연구들을 검토하면서, 아주 짧게 휙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마음을 끄는 그림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그 그림들만 집중적으로 감상하는 전략을 제안한다. “인공지능이 감상의 즐거움까지 대신할 수는 없다. 더 늦기 전에 감상 공부를 시작할 것을 권한다.” 저자인 오성주 교수는 서울대학교에서 10년 넘게 예술심리학을 강의하며, 미술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쉽게 풀어내는 방법을 고민했다. 예술심리학은 예술이 철저히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기존의 생각에 도전하면서, 감상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예술을 딱딱한 분석 틀에 가두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상자들이 예술에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도구를 제공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이 책은 미술과 심리학을 모르는 사람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저자는 전문적인 용어나 어려운 개념을 최대한 배제하고, 친근한 어조로 설명하며, 자신의 경험과 감상을 곁들여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미술과 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림과 심리학을 좀 더 편안하게 느낄 수 있으며, 자신의 감상 방식과 생각을 더욱 깊이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상의 심리학』은 예술을 사랑하는 누구나, 감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꽃멍 양광모 저 / 14,000원 / 푸른길 20권 시집에 이른 불세출의 시인 양광모는 맑은 감수성의 시를 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순정한 서정과 결곡한 감성은, 편안하고 그윽하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생명과 사물, 곧 삼라만상을 시의 대상으로 하며 그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넓고도 깊다. 지금 그의 삶은 모든 부면이 시작(詩作)에 연동되어 있다. 일상이 예술이요 예술이 일상인, 평범 속의 비범한 세계가 그의 것이다. 우리 시대에 이와 같은 시인을 가까이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며, 그러므로 여기에 ‘불세출의 시인’이란 명호(名號)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감한 언사가 가능하도록, 그의 시는 문학적 수사(修辭)의 굴레를 넘어서 있다. 문학사적 계보로 이해하자면, 김소월이나 김영랑 그리고 정호승이나 나태주 같은 시인이 그의 길에 연접해 있는 형국이다.
오늘의 많은 독자가 그가 배달하는 ‘시 한 끼’로 뜻깊게 하루를 열고 있으며,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넓은 길」의 한 구절이 2024학년도 수능시험 〈필적 확인 문구〉로 게시되어 세상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의 시는 순후하고 평이하며, 동시에 우리 삶의 소중한 깨우침과 값있는 가르침을 끌어안고 있다. 따로 진중한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듯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학적 가치와 예술성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마땅하다. 필자가 공들여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이번 시집 『꽃멍』으로 그는 통산 20권의 창작 시집을 갖게 되었다. 놀라운 숫자다. 비단 그 숫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집 한 권 한 권에 기울인 심혈과 그로 인한 작품으로서의 성취가 놀라운 것이다.이 풍진 세상 건너는 사람꽃의 시 양광모의 20번째 시집 『꽃멍』에는 지금껏 그가 써온 시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제재(題材)들이 줄지어 있으며, 그 가운데는 집중적인 의미를 담은 시들의 군집(群集)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이 시인의 시가 가진 장점 중 하나는, 여하한 경우에라도 시가 우리 삶에 힘이 되고 소망이 되는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기실 이러한 측면은 세월의 흐름과 우리 삶의 현재적 국면을 함께 조명하는 ‘일상시’나 ‘생활시’와 같은 범주에 있어서는 매우 긴요한 일이다. 시에서 삶의 진면목을 만나는 지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1월 1일의 기도」에서 한해의 경점(更點)을 넘기거나, 「겨울날의 묵상」에서 계절의 변환을 목격하는 것이 소거와 재생의 새 차원을 설정하는 계기가 된다. 이와 같은 사정에 당착한 시인은 「사람꽃」에서 ‘사람’을 ‘사람꽃’이라 객관화하여, 그에 대한 수납과 감당의 정황을 묘사한다. 멍하니 불을 바라보고 멍하니 물을 바라본다. 살아가는 일에 멍이 든 영혼일수록 골똘한 법인데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멍하니 별을 바라본다 살다 보면 누구나 푸른 멍 한두 개쯤 몸에 지니기 마련인데 아름다운 사람아, 마음에 그늘지는 날에는 꽃멍을 하자, 새벽부터 밤까지 물끄러미 초롱한 눈으로 꽃멍을 하자 - 「꽃멍」 전문 복잡한 생각 없이 불만 바라보면 ‘불멍’이라 하고, 물만 바라보면 ‘물멍’이라 한다. 이때의‘멍’은 ‘멍하니’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인용된 시에서 시인은 또 다른 ‘멍’의 개념을 차용하여, 중의법적 발화 구조를 형성한다. ‘살아가는 일에 멍이 든 영혼’이라 쓴 것이다. 하늘이나 별을 바라보는 ‘멍’과, 살다 보면 누구나 한두 개 몸에 지니기 마련인 ‘멍’을 동음이의어로 병렬해 놓은 터이다. 뒤이은 시인의 권유는 ‘마음에 그늘지는 날’에 ‘꽃멍’을 하자는 데 이른다. 이때의 꽃멍은 사람마다 몰래 간직한 멍든 가슴의 상흔(傷痕)을 ‘물끄러미 초롱한 눈’으로 바라보자는 말이다. 깊은 아픔의 소재와 이를 넘어설 방식의 청유를 이보다 더 아름답게 내놓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 장애, 시설을 나서다 김남희, 김유미, 김정하, 변재원, 이주언, 조아라, 최태현, 최한별 저 / 유승하, 황인혜 그림/만화 / 18,000원 / 북하우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어우러져 사는 '시설 너머 세계'에서 띄우는 초대장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아야 한다’는 통념에 도전하다
저자들이 설명하는 탈시설의 필요성은 장애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동, 노숙인, 정신질환자, 노인처럼 언제든 시설에 보내질 수 있는 이들이 한국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특히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이미 진입해 요양원과 요양병원이 급증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취약한 존재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마주하고 있다.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이 질문에 대한 힌트와 해답을 제시하며 “다양한 몸이 어우러져 서로의 취약성을 보듬고 돌보는 세계”(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저자)의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시설 역사부터 정책 대안까지, 지극히 ‘현실적’인 탈시설 입문서 ‘장애인이 시설을 나와 동네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 이런 사회를 지향하는 ‘탈시설’이라는 말이 낯설기만 한 것은 우리가 시설을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존재로 인식해서다. ‘혼자 살 능력이 없는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수많은 장애인이 시설에 머무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논리이자 우리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상식이다. 시설에서 발생한 학대와 인권침해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지만 ‘시설 말고 대안이 없지 않냐’는 인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이런 우리의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장애인탈시설운동가와 학자로 구성된 저자들은 시설의 기원과 역사·특징 등에 대한 연구, 이미 탈시설로 나아간 외국 사례, 탈시설에 품는 의문과 그에 대한 반론, 탈시설에 필요한 정책 대안 등 탈시설 담론 전반을 두루 다룬다. 자기 삶과 존재로 탈시설이 왜 필요한지를 증명한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담았다. 이를 통해 탈시설이 그저 이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오래전에 시작돼 대안과 성과까지 나온 ‘현실적’인 이야기임을 입증한다. 그런 점에서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탈시설 당사자와 활동가들이 이미 만들어온 미래, ‘시설 너머 세계의 소식’을 섬세하게 포착한 기록이다. 탈시설 당사자들의 과거와 현재를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유승하 만화가, 황인혜 작가의 그림(8컷)은 시설의 실상과 탈시설 이후의 삶을 시각적으로도 잘 전달한다. 시설, 자율성을 박탈하는 공간 시설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장애인, 노인, 아동, 노숙인 등 수용 대상이 다양하고, 같은 장애인시설도 목적, 규모, 운영 방식이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모든 시설을 아우르는 핵심적인 요소가 있다.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설에 머무는 이들은 시설장과 직원의 ‘관리’ 아래 놓인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다시 정해진 시간에 잠자는 생활이 반복된다. 사소한 일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올 때마다 시설에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 사람과 동침하거나, 결혼하거나, 아이를 가지려고 해도 시설 안에서 임의로 가능한 것이 없다.”(196쪽) 이렇게 장애인들은 시설에서 스스로 일상을 꾸릴 권한을 박탈당한다. 요양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뇌병변장애인 조상지의 말이 이를 입증한다. 시설에서는 생각을 하면 괴로웠기에 생각을 멈추는 것이 곧 시설에 ‘적응’하는 일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시설에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고민할 일도 없어요. 시설에서 정해준 것만 하면 되니까요. 먹고 싶은 걸 생각할 필요도 없었어요. 어차피 시설에서는 먹을 수 없으니까요. … 생각을 하면 내가 괴로우니까 점점 생각을 안 하게 됐어요. 그게 적응 아닐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어차피 나는 시설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포기한 게 시설에 적응하는 일이었던 것 같아요.”(36~37쪽) 이런 현실은 ‘장애인은 자립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시설에 가야 한다’는 우리의 인식을 뒤집는다. “장애를 지닌 이가 반드시 불능/무력하기 때문에 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설에 들어갔기 때문에 불능화/무력화”(59쪽)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력해진 장애인들은 쉽게 ‘통제’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학대의 대상이 된다. 같은 방에서 거주하는 사람 수를 줄이고, 활동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따라서 시설 문제는 학대와 인권침해가 발생한 일부 시설만의 문제가 아니라 “통제와 강요, 차별과 폭력이 생래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시설”(151쪽) 자체의 문제라고 이 책은 주장한다. 나아가 시설 문제를 해결하려면 장애인이 시설을 벗어나 지역사회에서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탈시설로 먼저 나아간 나라들이 입증한 것 저자들은 이미 그 길을 선택한 외국 사례를 통해 소위 선진국 시설도 인권을 보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400명 규모 건물에 3,000명에 달하는 발달장애인이 과밀수용되고 바닥 닦기 등의 강제 노동 때문에 거주인의 손과 무릎에 거대한 궤양이 생겼던 휴로니아(캐나다), 아동과 청소년을 상대로 신체 구금을 비롯한 각종 신체적·성적 학대를 저지르고 약물 오남용 등을 자행한 레이크 앨리스 정신병원(뉴질랜드), 거주인의 뼈가 부러져도 치료하지 않은 채 방치하고 방에 사람들을 모아둔 채 호스로 물을 뿌리는 일로 목욕을 대신한 펜허스트 주립학교(미국)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설의 학대와 인권침해를 목격한 뒤, 캐나다·뉴질랜드·미국 등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시설을 없애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후 여러 학자들은 탈시설이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시설에서 사는 것보다 지역사회에서 사는 것이 당사자는 물론이고 사회 전체에도 좋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례로 제임스 콘로이 박사가 펜허스트 시설에 살다가 지역사회로 나온 사람 1,154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이들의 자립성이 증대했고, 삶의 만족도가 높다고 말한 사람이 두 배로 늘었다. 그 밖에도 다양한 탈시설 관련 연구가 대형 시설·소규모 시설·지역사회 중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가장 좋은 삶의 형태임이 명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탈시설을 둘러싼 우려와 반론 탈시설로 나아간 여러 나라의 사례와 탈시설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들이 이미 있지만, 탈시설을 둘러싼 우려가 분명히 존재한다. 당사자가 정말 시설을 나가고 싶어 하는지, 시설 직원들의 일자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늘어나는 예산을 감당할 수 있는지 등등 탈시설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놓고 여러 우려가 제기된다.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이런 의문들에도 답을 제시한다. 두 가지만 살펴보자. 첫 번째는 ‘정말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잘 살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 우려는 장애인 당사자와 지역사회 양 측면에서 제기된다. 우선 장애인 당사자가 시설을 나와 범죄 피해자가 되는 등의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다. 돌보는 사람이 장애인을 학대하면 오히려 단둘이 있는 집이 시설보다 위험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질문의 방향을 돌려 장애인에게 어디가 더 안전한지 묻는 대신 어떻게 장애인에게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하며, 그 해답은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안전은 장소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의 강화를 통해 확보해 나갈 수 있다.”(196쪽) 가족과 친구가 어떤 장애인을 자주 방문하고 그의 일상과 건강에 관심을 보이면, 그 사실을 주위 사람도 알면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데 관계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장애인거주시설은 개인 주택보다 불리한 점이 많다. 장애인시설이 대개 도심 외곽에 있어 사람들이 왕래하기 어렵고, 시설이 도심에 있어도 방문객을 개인적으로 만날 공간이 마땅치 않거나 외부 사람이 방문하려면 관리자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단, 실제로는 탈시설에 성공한 장애인도 사회적 관계를 충분히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반드시 지역사회가 시설보다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지역사회 내 장애인이 여러 지역사회 구성원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탈시설은 단지 삶의 공간을 지역사회로 옮기는 일이 아니라 “삶의 관계가 지역사회에서 맺어져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226쪽)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걱정과 반대로 장애인이 자신과 타인에게 해가 되는 도전적 행동을 해 지역사회의 안전을 해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제임스 콘로이의 연구가 도전적 행동이 심한 최중증 발달장애인도 지역사회로 나온 뒤에 별문제 없이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대구시립희망원의 장애인거주시설에서 나온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 향유의집에서 장애인지원주택으로 이전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이런 주장이 과장됐음을 보여준다. 사실은 도전적 행동이 심한 장애인을 시설로 보낼 때 더 큰 문제가 생기거나 아예 보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다. 도전적 행동이 아주 심한 장애인은 오히려 시설에서 지내기가 더 어렵거나 시설이 아예 받아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해진 규칙과 통제 아래 여러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야 하는 환경 자체가 스트레스를 가중하기 때문에 발달장애인의 도전적 행동을 더욱 부추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설 운영자들은 시설 입소 계약을 할 때 도전적 행동 때문에 다른 거주인이나 직원에게 피해를 주면 퇴소시킬 수 있다는 조건을 두거나 입소를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237쪽) 장애인 가족들이 탈시설에 반대하지 않냐는 우려도 자주 나온다. 가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며 탈시설에 반대하는 가족들이 실제로 있고, 현실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가족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시설이냐 탈시설이냐가 아니라 장애인 당사자의 행복이며, 탈시설도 이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물론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다. 탈시설이 가족에게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국가가 탈시설 이후 받을 수 있는 지원서비스 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함께 장애인을 돌보는 ‘사회화된 돌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껏 시설정책의 주요 행위자였음에도 책임지지 않았던 국가가 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장애인과 그 가족 모두가 지역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국가,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주체로 한국의 장애인정책이 시설 중심으로 흘러간 데는 국가 책임이 크다. 시설에 대한 국가의 태도를 ‘지원하되 책임지지 않는’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민간 조직인 시설이 사회복지서비스를 전달하고,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구조에서 국가의 역할은 지원과 관리·감독에 국한된다. 하지만 상속세·증여세 면세, 수익사업에 대한 법인세 감면, 시설 운영비·인건비 지원 등의 지원은 잘 작동하는 반면 관리·감독은 좀처럼 작동하지 않았다. 그사이 많은 시설에서 학대와 폭력이 발생했다.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이제라도 장애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라고 요구하며, 탈시설을 위한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주거지원서비스와 주거 공간을 동시에 제공하는 장애인지원주택을 비롯한 공공임대주택 확충, 장애인들이 소득을 창출하면서 직장 내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일자리 보장, 발달장애인의 필요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활동지원서비스 개선 등등 주거, 소득, 활동지원 세 측면에서 필요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또한 이런 정책이 실현 가능한 것임을 예산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흔히 탈시설에 엄청난 돈이 든다고 생각하지만, 탈시설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금과 활동지원서비스에 드는 돈은 엄밀히 따지면 순수한 탈시설 예산이 아니다. 연금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일정한 소득 기준에 못 미치는 모든 국민이 받는다는 점, 활동지원서비스 예산은 장애인 당사자가 아니라 장애인의 활동을 지원하는 사회복지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탈시설을 하면 장애인거주시설에 투입하는 예산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한 연구는 현재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 28,000여 명이 한 번에 탈시설할 경우 추가로 필요한 순증 예산을 약 3,746억 원으로 추정한다. 2024년 국가 예산 총지출 규모 657조 원의 0.06%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이 예산을 정부가 세운 장애인탈시설 로드맵에 따라 20년간 나눠서 집행하기 때문에 예산 부담이 크지 않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이렇게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탈시설이 단지 당위적인 주장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임을 증명한다. 탈시설의 강력한 증거, 당사자의 목소리 이 책은 지역사회로 나온 뒤에야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탈시설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담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탈시설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강력한 증거다. 박만순 씨 이야기는 ‘당사자가 싫다는데 억지로 내보낼 수는 없지 않냐’는 논리가 왜 잘못됐는지 보여준다. 49년을 인강원에서 보낸 그는 ‘자립’이라는 말만 나와도 화를 내며 ‘인강원에서 살겠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인강원에 다시 들어와요’라는 말에 손사레치며 ‘자립주택에 있는 내 방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시설에 남겠다는 말은 시설이 좋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사회에서 너무 오랫동안 고립되고 단절돼왔다는 말, 그래서 시설 밖이 두렵다는 말이었다. 시설 밖을 경험할 기회를 얻은 뒤에야 박만순 씨는 자신이 정말 원하던 것, 시설에서 누릴 수 없던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김미영(가명) 씨의 ‘뒷머리 뽕’은 ‘그래도 시설이 낫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이다. 장애 때문에 오랜 시간 누워지내야 하는 그는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와 일상생활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직원 한 명이 여러 사람을 지원하는 시설에서 그런 지원은 불가능했다. 추운 날이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다는 이유로 여행과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시설을 나온 뒤에야 김미영 씨는 자유롭게 다른 동네로 산책하러 다닐 수 있었고, 과거보다 사회 활동 시간이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뒷머리 뽕’이 살아났다. “시설거주인 집단 속의 일부였던 김미영이 지역사회 시민이라는 지위를 취득하자 일어난 변화다.”(186쪽) 문석영 씨는 ‘장애인이 시설을 나와서 제대로 못 살면 어떡하냐’는 말에 대한 ‘비장애인도 다 잘 사는 건 아니지 않냐’고 반문한다. 또한, 시설 밖에서 제대로 살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장애인이 시설에만 머무를 이유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직접 해보기 전까지 아무도 알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가 시설에서 나와 살 수 있도록 지원해주세요.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탈시설해서 못 살면 어떡하냐고 합니다. 그런데 비장애인도 다 잘 사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도 지역에서 살아갈 힘을 기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시설에서 나와 사는 것이 힘들고 지쳐도, 다시는 시설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290쪽) 장애인, ‘실패할 권리’가 있는 동료시민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장애가 있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당신을 시설에 수용한다는 그동안의 말은 사실 배려가 아니라 배제”(294쪽)임을 폭로하는 고발장이자 “장애인에게도 위험과 실패를 허용하는 세계로 당신과 함께 건너가고 싶다는 바람이 담긴, 근사한 초대장”(장일호, 『슬픔의 방문』 저자)이다.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려다가 실패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제껏 장애인의 시설수용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 책은 도리어 장애인에게 ‘실패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역설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도 장애인자립생활운동 당사자들이 실패할 권리 … 를 외친 바 있다. 장애인의 자립생활을 인정할 수 없는 가장 큰 근거로 종종 ‘자립 실패’ 가능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인 당사자가 보기에 실패할 가능성조차 없는 삶이란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상태를 뜻했다. 오직 타인의 도움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게 실패 없는 삶이라면, 실패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도리어 자기결정권을 되찾는 것으로 이해했다.(275쪽)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이 “‘인간답게’ 실패하고 모험하며 살아갈 기회”(김지혜)를 누릴 때, 언제 시설로 보내질지 모르는 또 다른 존재들 또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파도는 모든 이를 밀어 올린다. 탈시설을 중심으로 하는 장애인권운동의 파도는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 노숙인, 아동 등 시설적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모든 시민의 권리를 고양할 민주적 에너지의 원천이 돼주고 있다.(307쪽) 이렇게 『장애, 시설을 나서다』는 시설 안팎 장애인의 이야기를 넘어 취약함이 배제의 이유가 되지 않는 세계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너와 내가 각자도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취약성을 환대하며 다양한 몸이 공존하는 세계로 나아가자고, 이 책은 우리를 조심스럽게 ‘시설 너머 세계’로 초대한다. ![]() 녹색평론 녹색평론 편집부 저 / 17,000원 / 녹색평론사 국가의 쇄신, 시민이 주도할 때 가능하다
2025년 봄호 《녹색평론》은 석 달째 이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혼란과 정국의 마비 상황을 좀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했다. 즉 비상계엄 발동은 직접적인 도화선이었을 뿐, 그동안 우리 사회가 불씨를 키워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깊은 반성이다. 어찌하여 이 불은 이렇게 질기게 계속되는 것일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기득권 수구세력이 완강히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배경에 거대한 대중적 분노와 불만이 있다는 사실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87년체제라는 불완전한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30년 넘는 세월동안 보통사람들의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왔고, 그것이 극우 데마고그들의 선동에 의해서 지금 왜곡된 채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이다.
게다가, 현재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대의민주주의체제, 특히 거대 양당이 정치를 독식하고 있는 시스템은 기후위기, 팬데믹 등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앞에 두고서 전혀 합리적으로 기능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력한 국가운영체제라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단지 마비된 정치를 다시 작동하게 만들겠다는 작은 목표를 가져서는 안된다. ‘국가의 쇄신’이라는 과업은, 지구의 생물물리학적 한계가 필연적으로 전 세계적 경기침체로 이어지고 정치적·사회적 분열로 귀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나라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이 공동체의 구성원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논의, 합의하는 장(場)을 펼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시민이 주도하는 헌법개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아일랜드, 칠레, 핀란드, 뉴질랜드, 호주의 사례 대의제 민주주의체제에서 시민의 정치참여는 사실상 국민투표라는 형태로밖에 구현되고 있지 않지만, ‘민중의 자기통치’라는 말 그대로의 민주주의에 근접한 방식을 실현할 수 있는 시민의회라는 제도가 있다. 시민의회는 아일랜드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를 구현한다는 정당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장점이 많은 제도라는 사실이 거듭해서 증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해외에서는 시민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부 측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시행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녹색평론》 이번 호는 우리 사회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숙제, 즉 헌법개정을 주도할 기구로서 시민의회를 제안하면서, 현재의 정치일정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개헌이 자신들의 잇속을 차리려는 정치인들의 구호로 전락하지 않도록, 정말로 내실 있는 정치적 개혁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왜 우리 사회에서 헌법개정 논의가 대중적 동력을 얻지 못하고 좌절되었던 것인지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응용하는 지혜도 요청된다. 《녹색평론》 189호에서는 근년에 전 세계의 진보적 인사들의 기대와 실망을 함께 불러왔던 칠레의 헌법개정 좌절의 과정을 살펴보고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그런 한편, 1980년대부터 가장 필요한 내용부터 순차적, 단계적으로 헌법을 개혁해온 핀란드의 사례를 모델로 제시하고자 했다. 또한, 뉴질랜드와 호주의 선거제도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논의만 무성한 채 의미 있는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선거제도 개혁을 차제에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있다고 해도 대의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국회가 중심이 된 체제이므로,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도록 국회를 구성하는 일은 정치가 합리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관건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합리적 정치는 우리 사회에 가득 찬, 다양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최소 요건이다. 자살률 최고, 출생률 최저의 불명예는 어떤 성군(聖君)이 출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스스로 풀 수밖에 없다. 촛불·응원봉의 힘이 유일한 희망이다. ![]() 강원도의 눈 김주연 저 / 12,000원 / 문학과지성사 “눈 속의 물에 처음부터 빠지고 싶었다
맑은 그대 눈의 물속에
내가 있었다” 지극한 현실과 아득히 먼 그리움 그사이를 조율하는 나지막한 근원의 목소리들 “카페 플라츠”는 결국 모든 생각을 펼치고 또 생각을 접게 하는 공간인 것 같다. 그 “시간의 회전 의자”에 앉은 ‘강원도 파우스트’가 마침내 무념무상의 경지로 내려갈 때 우주의 주름 밖, 자연의 시간과 허허롭게 동행하게 된다. [……] 약동하는 자연과 들숨 날숨으로 교감하고 횡단하며 새로운 생성의 지평을 여는 ‘시인의 탄생을 헤아리게 된다. 그 생명의 소리, 생명의 바람과 함께 『강원도의 눈』은 우리는 응시하며 독자의 밝은 눈을 기다리고 있다.
-우찬제, 해설 「강원도 파우스트」(pp. 151~52)에서 내년이면 문학평론가로 활동한 지 60주년을 맞이하는 김주연의 시집 『강원도의 눈』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신칸트학파와 낭만주의 정신에 깊게 영향받은 독문학자로서 반세기 넘는 시간 동안 한국문학과 함께해온 그가 틈틈이 시를 창작하며 고유의 세계를 구축해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무수한 시집의 해설을 쓰며 비평 활동을 펼쳐온 김주연의 고유하게 빛나는 생명력을 가진 시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이 시집을 통해 처음 공개하는 쉰네 편의 시와 ‘자서(自序)’에 적힌 한 편의 시 형식의 문장들은 그간 그가 탐독했던 전체와 개인, 정신과 육체, 세속과 신성성, 역사와 문학 등 양단의 간극을 극복하는 여정을 은유적으로 응축해놓은 듯하다. 현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파고는, 이상과 현실을 조율하고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흠씬 그리워하는 견자의 전언처럼 울려 퍼진다. 시에 특정한 형식이나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우리가 읽고 느껴온 시의 형식과 음율에 지극히 맞닿아 있는 『강원도의 눈』은 “시집이라고 우기고 싶지는 않다”(‘自序’)는 말이 무색하도록 방황하는 화자의 서정적 리듬을 싣고 우리 곁에 당도했다. 모든 길을 지우고 새로운 길을 예비하며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신성한 눈[雪] 김주연의 고향이자 『강원도의 눈』의 원류(源流)라 할 수 있는 강원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온이 낮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시집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눈’은 “이전의 풍경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치이기도 하다. 과거의 기억 위에 살포시 덮이고 스며들어 “이전에 보이던 것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던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해설, p. 140) 하기 때문이다. 눈이 애매하게 내리는 날이면 “새들의 비상도 운행도/애매하게 만”들고 화자의 “슬픔과 생각도/애매해”(「눈은 애매하게 내리고」)질 정도이니, 눈과 그리움은 이 시집에서 가히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부의 마지막 다섯 편은 〈강원도〉 연작으로 꾸려졌는데, 그곳에 얽힌 저자의 슬픔과 그리움이 기억들 곳곳에 눈처럼 쌓인다. “명륜동에서 태어나 혜화 초등학교를 다녔고” 부산을 거쳐 서울로 적을 옮긴 화자는 “서울 사람이라는 막연한 의식”이 있었지만 “유황 냄새로 도배된” “흙 장판”에 “누워서 처음으로 생명을 마신다”(「강원도-늦은 나이의 여행길에서」). 물에 빠져 생과 사의 기로에 섰던 기억은 “맑은 그대 눈의 물속에” 빠진 “나를 건지고 싶었”(「경포 호수-강원도 2」)던 은유로 탈바꿈하는가 하면, 중학생 시절 서울과 강릉을 오가는 고속버스에 탑승했다가 버스가 전복되는 큰 사고로 부상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평창군 대화면-강원도 4」는 반세기를 지나 “낡은 이별가까지 부”르는 “아가씨 차장”의 슬픈 곡조처럼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강원도가 화자의 기억과 닿아 새 풍경을 그려내는 방식은 「강원도의 풀-강원도 3」에서 “강원도의 풀이 온 누리를 덮고/지구의 들숨 날숨을 지켜”주는 이미지로 확장되며 그리움의 힘을 키운다. 분명 경험했으나 잊은 채 살아가다 시간이 지나 몸이 기억하는 경험을 해본 적 있다면, “오는 것 가는 것이 모두 그리움이”(「벚꽃 무덤」)라는 깨달음을 가져본 적 있다면 “시간의 회전의자”(「카페 플라츠」)에 앉아 “내가 나 밖의/나로 나갔다가/돌아오”(「나 밖의 나-강원도 5」)는 강원도의 설국에서 유영하게 될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기억의 원근법과 온몸으로 심연의 생명을 감각하는 눈[眼] 『강원도의 눈』 속 하늘에서 내린 눈이 만들어낸 정경은 안구에 맺힌 상(像)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제목 속 ‘눈’의 또 다른 의미인 눈[眼]은 “시간적으로 아득한 과거나 공간적으로 먼 장소를 가깝게 조망”(해설, p. 129)하고 보이지 않는 내면과 세계의 현상을 형상화한다. 어제오늘 본 얼굴들은 잿빛처럼 희미해지고 반세기 너머 먼 얼굴들이 가깝게 떠오르는 원근법의 뒤바뀜 안에서 세월도 뒤바뀌는 11월 -「11월의 원근법」 부분 이미 멀어진 기억 속 얼굴들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이 시와 같이, 시선을 담은 눈은 “먼 것과 가까운 것, 그 사이에서 시적 긴장과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는 방법적 성찰”(해설, p. 129)의 과정을 보여준다. 3부에 수록된 〈파우스트〉 연작에서 볼 수 있듯, 시선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빛과 어둠”이다. 화자는 “어둠이 남향의 대형 유리창을” 지배하는 곳에서 “빛은/짧은 일생을 마치고/서쪽으로 물러”가는 것을 바라본다. “패배”인지 “양보”인지 알 수 없지만 빛은 순순히 자리를 어둠에게 내어주다가도 “거실을 가득 채운/어둠 속에서/점점 밝아”(「밝은 빛-파우스트 1」)오듯 어둠을 동반하고, 화자의 눈은 바라본 것 너머를 투시한다. 이 명과 암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영원히 여성적인 것-파우스트 4」에서 “여성의 맞은편에/남성이” “남성의 맞은편에/여성”과 같이 남과 여의 구도로 옮겨 가기도 하고, 「학문인가 마법인가-파우스트 6」에서 “학문의 어둠은 인생의 어둠”이기에 “허세의 빛 대신 마법의 빛을 찾아 헤”매야 하는 모습에 빗대어 펼쳐진다. 세계의 현상을 바라보는 눈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과거 그가 유학하고 왕래하던 독일을 떠올리게 하는 「로덴부르크」는 “꿈 같은 사랑의 땀이” 나고 “시간의 사랑”이 아득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그 사랑 혹은 그리움을 “감당할 수 없어서 흘리는 땀”을 화자는 조용히 응시한다. 「다윗」의 화자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다윗 조각상을 바라보며 “엄청난 힘”을 품은 “아름다움이 죄일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이 시선은 “죄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는 철학적인 성찰로 뻗어나간다. 결국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시인 1」), “어디로 달려가고 있나요?”(「시인 2」)라며 자아로 회귀하는 이 물음들은 고독하고 “쓸쓸한 비상(飛翔)”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이 많아서 고독이 사라지는 행복한 나라”(「시인 3」)를 꿈꾸는 김주연은 멈추지 않고 ‘쓰는 사람’으로, 사막과 광야에서 지친 이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신비의 로뎀나무”(「로뎀나무」)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자신을 모두 내어주는 밝은 어둠”(「로뎀나무」)처럼.
![]() 포스트휴먼과 문학
김주연 저 / 25,000원 / 문학과지성사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초래된 포스트휴먼의 뉴 노멀 시대에서
문학은 어떤 형태로 살아남을 것인가”
지금을 넘어 다음 시대를 바라보는 비평력 60년 한국 현장비평의 정수(精髓), 김주연 새 비평집 포스트휴먼이니, 디아스포라니 하는 묵직한 단어들이 최근 내 앞에 굴러왔고 그것은 AI, 뉴 노멀, 인류세 등 급격한 생태계 변화와 현실 속에서 문학의 오랜 입지를 뒤흔들고 있다. [……] 이즈음의 세상은 무학이 무엇인지 그야말로 콘셉트 자체를 알 수 없을 만큼 어지럽다. 새로운 혼돈에 대한 응전이라기엔 가당치 않은 이 작은 비평집으로 60년을 마감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머리칼이 쭈삣해 온다. 그렇다고 무얼 새삼스럽게 만지작거릴 수 있으랴.
-‘책머리에’(p. 4)에서 1966년 비평 활동을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격동하는 한국문학 현장의 중심에서 그 역사를 함께 일궈온 문학평론가 김주연의 새 비평집 『포스트휴먼과 문학』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김병익, 김치수, 김현과 더불어 『문학과지성』의 최초 동인이자 4ㆍ19세대 비평 그룹의 핵심 일원인 그는 독문학과 한국문학을 오가며 약 30여 권의 평론집과 연구서를 펴냈으며, 김환태평론문학상ㆍ우경문화저술상ㆍ팔봉비평문학상과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하는 등 화려한 이력으로 60년 비평력을 채워왔다. 이번 책에서 그는 “인간 욕망의 극단화가 야기하고 있는 지구 소멸의 위기론에서 인간을 배제하고자 하는 비인간 논의”(「포스트휴먼과 문학」, p. 20)와 이 흐름을 따르는 ‘포스트휴먼 사상’이 초래한 한국문학의 위기를 진단하는 비평들을 모았다. 본격적인 문학비평집으로서는 『그리운 문학 그리운 이름들』 이후 5년 만이다. 지속되는 기후 위기로 종말론적 세계 인식과 함께 등장한 ‘인류세(anthropocene)’ 그리고 기술 사회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포스트휴먼 시대’는 AI, 챗GPT가 범람하는 지금이다. 이 책에는 기계가 인간화되는 시점에서 ‘휴먼’의 전형이자 인간과 가장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학에 관한 깊은 고민을 토대로 “문학은 포스트휴먼을 도와줄 것인가 혹은 전면에서 일전불사의 자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필요한 개입을 통해서 조정의 역할과 기능을 할 것인가”(「포스트휴먼과 문학」, pp. 17~18) 하는 방향성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책머리에’의 마지막 문장인 “그럼에도 문학이여, 영원하시라” 하는 외침처럼, 인류와 역사 ㆍ 현재와 미래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그의 문학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과 현장비평의 진수를 현현히 느낄 수 있다. nD 세계로 진입하며 마주한 우리 문학의 위기 지식 너머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첨예한 제언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었으며 최근 5년간 발표한 스물아홉 편의 글을 엮었다. 1부 “nD는 힘인가 향기인가”에서는 기술 진보 사회를 맞닥뜨린 문학의 현실을 조명하고 낭만주의와 계몽주의, 모더니즘, 디아스포라를 담은 국내외 작품들을 지나 포스트휴먼 시대를 맞이한 한국문학을 점검한다. 오늘날 인간은 “7만 년 동안 이른바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운명을 좌지우지해왔다고도 할 수 있고, 이제 그로 인한 폐해의 끝을 비극적으로 응시하기에”(「포스트휴먼과 문학」, pp. 12~13) 이르렀다. 기술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강압적이고 지배적인 성격은 규격화/대량화로 대두되는 생산에만 치중했고, 마침내 그 정점에서 합리성과 인간 중심의 사고가 배제되는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세태가 영상 매체라는 “새로운 미디어”와 언어 철학이 결여된 AI를 낳았고, 거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해 “그 자리에서 서서히 물러서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문학의 퇴조 분위기”(p. 17)가 만들어졌다고 진단한다. “‘휴먼’의 가장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p. 18)이 자기 점검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저자는 김혜순의 시와 송호근과 조용호의 소설, 노발리스의 문학 세계 등 국내외 작품들을 소환하고 “울음과 아픔은 기계화된 환상이 생산할 수 없는 능력이며, 이것이 비인간 시대의 문학이”(p. 29)라고 직언한다. 이는 차가운 기계의 속성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서 있는 문학의 강인한 생명력이 쉽사리 꺼지지 않으리란 점을 시사한다. 2부 “자연의 값”은 저자의 사유 깊숙이 자리한 자연친화적 면모와 문학에 대한 사랑 그리고 3D, 4D, 5D를 넘어 nD 시대 속 문학이 소외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쓴 짤막한 비평들이 담겨 있다. 특히 「세계의 배꼽」에서는 팬데믹 이후 인간 실존에 관해 고심하며 소설가 이승우와 카프카의 작품을 골자로 한 실존주의 문학 세계를 톺아본다. 문명의 발상지를 뜻하는 ‘세계의 배꼽’이란 단어가 문학과 동일시되는 지점은 진정한 문학 정신을 발휘하기 어려운 시대 속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저자는 또한 황순원, 이어령 등 우리 문화 예술의 중심축이 부재한 데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그들의 작품 속 사상을 들여다보며 오늘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문학의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3부 “아날로그 시의 추억”에는 서정시를 대표하는 박이도, 이시영, 강문숙, 금동원, 강문정 다섯 시인에 대한 분석을 묶었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 자연과 어우러진 시 세계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속세로부터 벗어나 아날로그적 시의 진가를 상기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수록한 「2024 한국문학 노벨문학상 받다」는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며 세계가 주목하게 된 우리 문학의 현재와 그간 한강의 작품들을 분석한 글이다. “한국의 문학적 성숙 역시 그 온도가 나날이 높아질 것”(「문학의 집」, p. 210)을 확신하는 김주연의 전언, “한국문학의 소중한 균형추”(김태환 문학평론가)로서 문학을 향한 부단한 통찰과 집념을 결산한 이 비평집은 문학을 너머 격변하는 시대 속 우리 삶의 지침서로 보아도 무방하다.
![]() 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
하지현 저 / 12,000원 / 창비 다만 길들일 수 있습니다
따뜻한 현실주의자 하지현이 전하는 불안에 대한 가장 선명한 조언 복잡한 세상을 가볍게 읽는 창비 인문교양 시리즈 ‘교양 100그램’의 새 책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하지현의 『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가 출간되었다. 최근 현대인의 심각한 정신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불안’에 대해 꼭 알고 넘어가야 할 지식들을 한데 모아 엮었다. 정신건강의학 안에서도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주로 다룬다는 저자는 질환으로 분류되는 심각한 불안보다, 다분히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차원에서의 불안에 초점을 맞춘다. 최근 자신이 겪은 불안의 경험을 공유하며 불안을 느끼는 데 있어서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불안의 인류학적 기원, 불안의 뇌과학과 같은 전문 지식이 알기 쉽게 정리된 한편, 불안을 대하는 현실적인 지침과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오랜 시간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온 그의 이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아무 이유 없이 불안을 느끼거나 막연히 ‘불안해서 불안한’ 마음에 휩싸이곤 하는 이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불안이라는 감정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고, 불안과 건강하게 더불어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따뜻한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불안에 대처하는 하지현의 불안 길들이기 수업 우리나라의 불안장애 환자는 작년 4만 1290명으로, 12년 사이 그 수가 75%나 급증했으며 최근 5년 사이의 증가세가 더 두드러지는 것으로 확인된다. 비단 심각한 불안장애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현대인이라면 불안 때문에 일상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적지 않다. 그를 증명하듯이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각종 의료기관에서 올린 의학 정보가 뜨는 한편, 출판계에서는 불안한 사람을 겨냥한 에세이, 고전, 과학서 등이 끊임없이 소개되고 있다. 20여년간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해온 저자 하지현의 진료실에도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었다. 모두 어떻게 하면 불안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나 불안을 없애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는 ‘불안’을 둘러싸고 있는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선으로 불안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에 따르면 불안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감정으로, 혹처럼 떼어내야 할 ‘증상’이 아니라 ‘현상’일 뿐이다.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혈압처럼 정상범위 안에서 관리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불안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그는 인간의 진화와 불안, 불안한 사람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 불안을 통제하는 일 등 인문, 과학, 역사를 넘나들며 불안에 대해 전문적이고도 친절하게 설명한다. 우리의 까닭 없는 불안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조목조목 밝히는 이 책을 통해 불안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껴안고 살아야 하는 인생의 상수라는 사실을 깨칠 수 있다. 우리는 생각보다 튼튼하고 잘 망가지지 않습니다 저자는 최근 겪은 교통사고의 경험을 공유하며 아직도 그로 인한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불안에 있어서는 의사인 그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동시에 자연스러운 질문이 이어 떠오른다. 우리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신건강전문의로서 저자의 풍부한 경험과 사려 깊은 마음은 이 막연한 질문 앞에서 빛난다. 『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의 곳곳에는 완벽주의를 완화시켜줄 수 있는 만족주의의 미덕, 삶의 불확실성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선, 불안을 다스리는 구체적인 세가지 지침 등 실제로 불안에 힘들어하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현실적인 조언이 담겨 있다. 무엇 하나 허투루 듣기에는 삶에 바로 적용 가능한 아주 작은 마음가짐에 관한 것들이다. 불안과 건강히 더불어 살 수 있는 법에 대한 오랜 고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잘 먹고 잘 자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정신건강에 대한 견해를 밝힌다. 방송, 저서, 강연 등 누구보다 활발히 활동하며 상담과 치료를 해온 전문가이지만 환자와 대화할 때는 그가 잘 먹고 잘 자는지를 확인하고 그 루틴을 회복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쏟는다고 한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 두가지만 잘해내고 있다면 우리의 존재는 일상의 작은 불안과 우울에 결코 잠식당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리는 생각보다 튼튼하고 잘 망가지지 않습니다.” 정신건강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는 그의 제안이 우리의 마음을 한결 편안하고 여유롭게 만들어준다. 불현듯 불안에 휩싸일 때 정말 현실적이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조언이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를 읽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던 감정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교양 100그램’ 시리즈복잡한 세상을 가볍게 읽다 프로의 지식을 충실히 담는 동시에 가벼운 무게와 가격을 갖춘 창비 인문교양 시리즈 ‘교양 100그램’이 새로운 라인업으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교양 100그램’은 바쁜 일상에서도 교양을 쌓고 싶은 이들을 위해 선보인 기획이다. 출퇴근길이나 여행 중에, 가사와 육아 중에 틈틈이 휴대하며 읽을 수 있도록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크기와 무게, 손에 쥐기 좋은 만듦새를 갖추었다. 각 분야의 명사들이 이야기하듯 편안한 말투로 집필해 유튜브나 디지털 콘텐츠에 익숙한 독자들도 부담 없이 독서의 재미에 빠져들 수 있으며, 전문 지식도 한층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 권말의 부록 ‘기억할 만한 문장’에서는 대표적인 명문장들을 저자 자신의 필적으로 담아, 독자들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며 필사할 수 있게 했다. 책에 부담을 느끼지만 독서습관을 기르고 싶은 사람들, 유튜브로 지식을 얻는 것에 익숙하지만 더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들, 나아가 일상에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 ‘교양 100그램’ 시리즈는 더없이 충실하고 알찬 독서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2025년 상반기에는 『나는 왜 이유 없이 불안할까』를 시작으로 차병직 교수의 『처음 만나는 헌법』(가제), 외교전문가 김준형의 『변화하는 미국,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가제), 정신건강전문의 김현아의 『우리는 어떻게 환자가 되는가』(가제)가 독자들을 찾을 예정이다.
![]()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저 / 17,000원 / 창비 나를 버티게 하는 건 너의 다정한 마음이야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정세랑 월드’의 시작을 알리는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
친환경 인쇄☓사진작가 서난달의 작품으로 새롭게 만나는 전면개정판! 다채로운 상상력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우리에게 설레는 이름이 된 작가 정세랑의 첫번째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를 새로운 장정으로 출간했다. 첫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와 더불어 창비 ‘정세랑 컬렉션’으로 함께 선보이는 이 소설집은 믿음직한 이야기꾼인 정세랑 작가의 시작점이자 정수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초판 출간 당시 파격적인 형식과 지금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화제를 모은 「웨딩드레스 44」를 비롯해 총 아홉편의 작품을 묶은 『옥상에서 만나요』는 다양한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핍진하게 그려내며 지금도 유효한 동시대성을 특유의 서늘하고도 명랑한 필치로 펼쳐놓는다. 이번 개정판은 달라진 용어와 새로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하고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사건을 교체하거나 묘사를 더하기도 하는 등 저자가 꼼꼼하게 원고를 손보았으며,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정세랑 작가의 뜻을 담아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 인증 용지를 사용한 친환경 에디션으로 제작했다. 한편 영국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서난달의 작품으로 한층 감각적인 새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간다.
내가 남긴 자리에 앉은 당신에 대한 염려,
그런 마음이 만들어낸 단단한 연대의 이야기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는 직장에서 부조리한 노동과 성희롱에 시달리며 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나’가 회사 언니들의 주술비급서를 물려받고 마침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담았다. 이야기 표면에는 주술비급서가 있지만 ‘나’를 버티게 한 힘은 사실 “다정하게 머리를 안쪽으로 기울이고 엉킨 실 같은 매일매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함께 고민해주었”(108면)던 사람들,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않게 막아준 언니들인 셈이다. 해서 ‘나’는 “내 후임으로 왔다는 너”를 염려하며 ‘너’가 “나와 내 언니들의 이야기를”(131면)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떠난 자리에 앉을 누군가에 대한 염려는 그 마음만으로 단단한 연대의 힘을 만들어낸다. 같은 드레스로 연결된 여성 44명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 「웨딩드레스 44」는 한벌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결혼한 혹은 결혼할 여성들의 이야기를 44개의 짧은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낸다. 낭만적 신화가 아닌 제도로서의 결혼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작품에는 다양한 여성 서사가 등장하는데, 특히 이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입은 여성이 고등학생들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할 때쯤에는, 혹은 하지 않을 때쯤에는 과연 어떤 풍경이 그려질 것인가. 초판과 개정판 출간 사이 7년이라는 짧지 않은 간극이 있음에도 이 에피소드가 오늘날까지 시의성을 갖는 것은, 물론 한국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이토록 짧은 이야기에도 본질을 파고드는 작가의 통찰력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이혼한 뒤 집 안의 물건을 모두 처분하는 ‘이혼 세일’을 열게 된 ‘이재’와 그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혼 세일」에는 “40대가…… 50대가 보이질 않아. 선배들 다 어디로 사라졌지?”(241면) 물으며 여성으로서 느끼는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목소리가 있고, “다른 사람들의 삶은 근사하고 자신만 지옥에 버려진 듯한”(242면) 기분 속에서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선택을 되돌아보는 목소리도 있다. 정세랑은 이처럼 다양한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효진」의 주인공 ‘효진’은 “어둡게 끈적이는 어떤 것”(66면)으로부터 도망쳐온 인물이다. 효도 효, 다할 진이라는 이름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아버지로부터, 자기가 가난해서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열등감 가득한 전 애인으로부터 도망치고 또 도망친다. 예고된 불행에 맞서지 않고 그저 도망치라고 말할 뿐인 효진의 목소리는 지금-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상한 용기를 불어넣는다. 과로로 돌연사한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으로 친구들과 ‘돌연사맵’을 만드는 이야기 「보늬」와, 한국으로 유학을 온 ‘이스마일’이 과자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과자 귀를 갖게 된 이야기 「해키 쿠키 이어」는 정세랑 작가의 기념비적 스테디셀러인 『피프티 피플』을 떠오르게 한다. 단지 일을 했을 뿐인데 사망한 사람들,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부조리를 고발했다 해고된 사람들, 이들이 불행을 딛고 다음 세대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작가는 끊임없이 고민해오고 있었다. 곶감을 먹으면 죽는다는 뱀파이어가 되고 만 여자의 사연을 담은 「영원히 77 사이즈」, ‘은열’이라는 여성 인물을 상상하여 전근대 한일관계사 속에 놓아둔 「알다시피, 은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나라가 화살편지로 인해 오해를 쌓아가는 「이마와 모래」는 작가가 얼마나 다양한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영원을 가진 것처럼 고민 없이 썼던 시기가 그리워집니다”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정세랑 작가는 “이번에 고치며 보니 무척 기괴한 이야기들이라 놀라고 말았”다며 운을 뗀다. “막 글을 쓰기 시작했던 때라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이 머릿속에서 날뛰는 이미지들을 꺼내 그대로 펼쳤던 듯”하다고. 2010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등단 16년차가 된 만큼 이제는 쓰기 어려워진 이야기들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작품활동 초기부터 발표해온 이 단편들은 어떠한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젊은 작가만이 향유할 수 있는 반짝거리는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정세랑만이 쓸 수 있는 어떤 이야기의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보여준 정세랑 소설세계의 씨앗이 『옥상에서 만나요』 안에 담겨 있다. ‘옥상’에서부터 시작된 ‘정세랑 월드’의 탄생을 이제 다시 만나볼 시간이다.
![]() 목소리를 드릴게요 정세랑 저 / 17,000원 / 창비 그럼에도 우리는 엉망이 된 세계를 건넌다
사랑을 품은 채, 용기를 간직한 채
기발한 상상력과 빛나는 재치로 펼쳐 보이는 정세랑의 첫 SF 소설집 친환경 인쇄☓사진작가 서난달의 작품으로
새롭게 만나는 전면개정판! 남다른 상상력과 통통 튀는 재치로 사랑받는 소설가 정세랑의 첫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가 새로운 장정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옥상에서 만나요』 『피프티 피플』 『이만큼 가까이』와 함께 창비 ‘정세랑 컬렉션’으로 다시금 선보이는 이 소설집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평행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듯한, 그러나 정세랑만이 그려낼 수 있는 세계를 펼쳐 보인다. 박진감 넘치는 서사를 한층 풍부하게 즐길 수 있도록 문장을 섬세히 다듬고, ‘정세랑 월드’의 통일된 질감을 더하여 새롭게 소개한다. 정세랑은 특유의 흡인력 넘치는 서술과 탄탄한 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인물들로 읽는 이를 단숨에 끌어당긴다. 이 책에 수록된 여덟편의 단편은 각각 다채롭게 멸망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용기 내어 한발짝 더 나아가는 인물들이 돋보인다. 인류 문명을 향한 서늘한 비판과 무한한 가능성을 동시에 전하는 정세랑표 SF 소설이 여전히 환한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이번 개정판은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작가의 뜻을 담아 국제산림관리협의회(FSC) 인증 용지를 사용한 친환경 에디션으로 제작되었으며, 영국에서 활동하는 사진작가 서난달의 작품으로 한층 감각적인 새 옷을 입고 독자들을 찾아간다.
다채로운 멸망,
그 속에서 반짝이는 발랄한 희망“수많은 이야기들이 결국 우리 세계의 빛과 어둠을 재현해 담으려는 시도임을 되새”(새로 쓴 작가의 말)긴다는 작가는, 소설집 곳곳에서 여러 형태의 멸망을 묘사하는 한편 그 속에서 반짝이는 희망을 찾아낸다. 「리셋」은 어느 날 갑자기 우주에서 내려온 거대 지렁이들이 지구를 집어삼키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지렁이들이 지구에 도착한 ‘리셋 원년’부터 그후 74년이 지나기까지 긴 시간대를 건너는 여러 인물들은 무너지는 땅에서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일구어간다. 마치 「리셋」의 평행우주를 그린 듯한 「7교시」는 23세기의 현대사 수업을 담은 짧은 소설이다. 대멸종을 맞은 21세기의 난폭함에 혀를 내두르는 미래 세대의 시선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을 반성하게 하는 동시에 더 나은 내일을 꿈꾸게 만든다. 이러한 작품들을 따라 읽다보면 명료한 질문이 하나 남는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 닮은 존재가 아닌 닮지 않은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작가의 말)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명 중의 한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당신은 그 한명 쪽이에요 정세랑의 소설에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사랑스러운 인물들이다. 그 어떤 모양의 우주일지라도 작가가 그리는 사랑만큼은 희미해지지 않는다. 「11분의 1」은 직장을 그만두게 된 ‘유경’이 그 이유를 세세히 담아 친하게 지내던 동료 ‘혜정’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대학 시절 동아리에서 알게 된 ‘기준’을 만나기 위해 먼 타국의 땅으로 떠난 유경은, 상대를 다시 마주하자마자 “더이상은 하루도 이 관계를 포기할 수 없다”(37면)고 확신한다. “저는 원래 사람을 안 좋아하는데, 열한명 중의 한명 정도만 좋아하는데, 혜정씨는 그 한명 쪽”(38면)이라며 편지를 마무리하는 유경의 애틋함이 우리를 간질인다. 공식 명칭 ‘제2지구’, 그러나 모두가 ‘모조 지구’라고 부르는 놀이공원의 홍보 담당자이자 유일한 지구인인 ‘나’는 이 조악한 테마파크를 탈출하기를 꿈꾼다. 행성의 주인인 ‘디자이너’는 모조 지구의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데, ‘나’가 사랑하는 ‘천사’도 그 피조물 중 하나이다. 「모조 지구 혁명기」는 ‘나’가 아픈 천사를 구하기 위해 디자이너를 찾아가며 펼쳐지는 모험을 그린다. 수상한 모조 지구에서도 “천사가 나를 골랐다는 말”(114면)에 가슴 가득 용기가 차오르는 ‘나’의 사랑을 응원하게 된다. 손가락이 사라지는 ‘미싱 핑거’와 그런 미싱 핑거를 좋아하는 ‘점핑 걸’의 시간여행을 그린 「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은 짧은 분량임에도 상대방을 위해 위험한 모험을 감행하는 마음만큼은 긴 여운을 남긴다. 절망 속에서도 빛나는 다정함이 무너지는 우주를 건너 당신에게 닿기를 표제작 「목소리를 드릴게요」는 자신의 목소리로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을 일깨우는 ‘승균’이 수용소에 격리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승균은 수용소 안에서 자신처럼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능력을 지닌 ‘괴물’들을 만나고, 자유를 유예한 채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어느 날 모두를 사로잡는 얼굴을 한, 그러나 그 얼굴의 생김새를 정확히 묘사하기 어려운 ‘연선’이 수용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승균과 다른 수용자들은 연선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가장 값진 보물을 바칠 수 있을까? 물거품이 될 각오를 하면서까지 목소리를 포기할 수 있을까? 인류의 3분의 1이 좀비가 된 세상에서 옥탑방에 갇힌 양궁 선수 ‘정윤’의 생존기를 그린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 역시 흥미진진하다. 서울 한복판이나 신축 원룸에 살았더라면 일찍이 좀비에게 물렸을지도 모르지만, 가난한 정윤은 두꺼운 철문이 달린 오래된 옥탑방에서 지낸 덕에 살아남았다. 참치 통조림을 조금씩 아껴 먹으며, 매일 좀비 하나씩을 활로 쏘아 죽여가며 두 계절을 버틴 정윤은 “난생처음으로 귀여웠”(248면)다고 느낀 연인 ‘승훈’, 그러나 지금은 좀비가 되어 살과 근육이 삭아버린 그를 적중할 날을 위해 마지막 화살을 하나 남겨둔다. 「리틀 베이비블루 필」은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개발한 작은 하늘색 알약이 인간의 욕망에 따라 오용되어가는 과정을 건조하게 전한다. “모든 것을 바꿔놓았고 동시에 아무것도 바꾸지 못”(147면)한 알약이라는 묘사가 서늘하면서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렇듯 작가는 인간의 존엄, 자유와 생존 같은 묵직한 주제들을 특유의 상상력으로 경쾌하게 그려내는데, 책을 덮고 난 이후 어쩐지 더욱 깊어지는 질문에 잠시 멈추게 된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세계는 좌절과 절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끊임없이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인류,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 권력, 반복되는 전쟁과 학살이라는 문명의 맨얼굴을 SF적 상상력을 더하여 능숙히 드러내면서도 그 가운데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함께 환한 방향으로 걷고 싶”(새로 쓴 작가의 말)다는 작가의 바람처럼 따스한 응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너질지도 모르는, 어쩌면 무너지는 중인지도 모를 우주를 건너온 다정함이 때맞춰 우리에게 도착한 순간이다.
![]() 8체질의학 주석원 저 / 29,000원 / 통나무 한 권에 담겨있는 8체질의학의 모든 것!
8체질의학이 수학적 체계로 설명된다!
현대 의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책! 8체질의학은 서양의학 일변도의 현재의 의료현장에서도 강력한 임상적 힘을 바탕으로 날로 번성해왔고 계속하여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8체질의학에 관한 핵심정보를 이 한 권에 모두 담았다. 한의사인 저자가 수학적 체계의 엄밀성을 바탕으로 8체질의학을 분석하고, 환자를 치료하며 얻은 체험을 통해 완성한 이 책은 8체질의학의 원리와 임상 강령을 밝혀주는 정교한 텍스트이다.
이 책은 명실상부 8체질의학의 종결자(Terminator)이다. 말 그대로 8체질의학의 원리부터 실제 임상까지 일거에 꿰뚫었다. 8체질의학의 선구자 권도원 선생이 1965년 세계침구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기념비적인 논문, 〈체질침의 연구(A Study of Constitution-Acupuncture)〉 이래, 한층 진전된 연구 성과인 이 책은 8체질의학의 원리와 체질침의 치료법을 극단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방대한 임상적 경험에 기초하여 8체질식의 특징과 각 체질식의 식단까지 세밀하게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8체질의학에 관한 이론과 실제의 결정판이다.
인체를 움직이는 근본원리를 찾아서!!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 8체질의학!! 8체질의학은 서양의학 일변도의 기울어진 의료 현장에서도 강력한 임상적 힘을 바탕으로 날로 번성해 왔다. 하지만 한 구석에는 항상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8체질의학의 원리와 임상 강령을 밝혀줄 정교한 텍스트가 없다는 것, 그래서 눈앞에 치유의 이적이 매일 매일 일어나는데도 그 원리와 치료법을 의사와 환자, 교수, 학생, 그리고 8체질의학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교재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저자 주석원(주원장한의원 원장)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생뚱맞게도 한의사가 되기 전에 고려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학도(Engineer)였다. 그에 따르면, 기계공학은 한 마디로 역학(Mechanics)과 수학(Mathematics)으로 건축된 학문이다. 저자의 이러한 배경은 예기치 않게 이 책의 완성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8체질의학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치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더없이 고마운 이론적 바탕이 된 것이다. 수학적 법칙으로 운행되고 있는 인체!! 수학의 원리 위에 서 있는 8체질의학!! 주석원 원장은 8체질의학을 분석하면서 그 자신도 크게 놀랐다. 인체가 이토록 정교한 수학적 체계로 축조되고 수학적 법칙으로 운행되고 있다니! 말 그대로 경이 그 자체였다고 한다. 독자들도 놀랄 것이다. 의학 이론 중에 이처럼 치밀하고 명료한 원리가 있었던가! 수학자들이 수학의 정리(Theorem)가 완벽하게 증명되면 이렇게 외친다고 한다. “Beautiful!” 주원장이 바라본 8체질의학의 원리도 이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는 8체질의학이 이렇게 치밀한 수학적 원리 위에 서 있다는 점에 크게 매료되었다. 인류의 찬란한 현대문명이 결국 수학의 업적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항공기, 우주선, 마천루, 아우토반, 컴퓨터, 스마트폰, 그리고 현재 무자비하게 맹위를 떨치고 있는 AI까지, 모두가 수학이라는 거인의 수혜자, 수학의 자식들이 아닌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저자가 몸담고 있는 의학만은 예외였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그가 한의과대학에서 배운 현대의학의 이론들은 뜻밖에도 죄다 경험 지식의 집적일 뿐이었다. 과학의 정예로운 한 분과라고 철통같이 믿었던 서양의학이 순전히 물질의 흐름만을 추적하는 물류학(Logistics)일 뿐이었다. 몸이라는 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물자의 생산과 유통 과정만 상세할 뿐, 그것의 배면에 존재하는 일반원리나 법칙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서양의학의 텍스트에는 인체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진정한 과학적 법칙이 없고, 몸에서 유동하는 물질, 즉 영양소, 효소, 호르몬 등의 생산과 집하, 배달 라인만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거대한 물류창고와 수많은 배달트럭, 그리고 그 속을 종횡하는 배달기사만이 존재하는 무질서의 난장이었다. 아마존과 쿠팡만이 할거하는 대동여지도의 현대판 버전이라고나 할까? 8체질의학은 보편의학이고 예방의학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구현하는 생명의학이다!! 그것에 비해 한의학은 좀 달랐다. 인체의 대전제로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가 최전방에 서있었고, 대부분의 의가(醫家)의 이론이 이 틀로써 연역적으로 풀이되고 있었다. 이것은 항상성, 즉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를 제1의 원리로 삼는 의학의 테제에 썩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의학은 인체에 존재하는 모든 장부와 조직의 생명 활동을 음양의 균형(balance)이나 조화(harmony)의 법칙으로, 혹은 오행의 상생상극에 따른 역학적(dynamic) 법칙으로 일관되게 설명하고자 분투하고 있었다. 저자 주원장에게 한의학의 큰 그림(Big Picture)은 이렇게 원리적, 법칙적 측면이 풍성하게 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문제는 구체성이었다. 전제만 있고 내용이 없었다. 표어만 있고 절차가 없었다. 내용 없는 형식처럼 공허하고, 앙코 없는 찐빵처럼 쓸쓸했다. 사실, 그 정보의 양은 사고전서를 가득 채울 정도로 산더미처럼 무지막지하게 방대한데 그 실내용은 참으로 허전했다. 배터지게 많이 먹은 것 같은데 하릴없이 허기졌다. 그런데 8체질의학은 그렇지 않았다. 8체질의학에는 있었다. 실내용이 풍성했다. 전통한의학처럼 양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집약된 알짜배기 정보로서 그 질이 풍요로웠다. 놀라웠다. 눈부셨다. 거기엔 공리가 있고, 정리가 있고, 증명이 있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현대문명을 지배하고 있는 대타자(Big Other)의 제왕, 수학의 언어로! 이 책은 수학의 언어로 짜여진 인체의 모습을 논리적으로 그린,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책이다. 저자 주원장은 한의학의 핵심 이론인 장부론(臟腑論)으로부터 8체질 임상의 꽃이라 할 체질침법의 응용까지, 장부라는 일각(一角)의 테제로부터 발원하여 일관되게, 줄기차게, 끈질기게, 집요하게 논리를 전개했다. 그 각고의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8체질의학의 교과서이다!!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게 하여 질병을 미연에 봉쇄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적인 의료를 지향한다!! 8체질의학의 원리와 실용적 정보에 목말랐던 독자들은 8체질의학에 관한 정연한 원리와 풍성한 정보에 흠뻑 젖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정보를 집약한 목차만 봐도 지혜의 세례를 받은 듯 흡족할 것이다. 이 책은 한의사와 한의과대 교수 및 학생, 그 밖의 의료계 전문가를 위한 8체질의학의 전문 지침서이다. 동시에 8체질의학 및 한의학, 현대 의학에 관심 많은 일반인을 차원 높은 의학으로 안내하는 개론서라고도 할 수 있다. 평소 근본적인 건강을 원하는 보통 사람과 질병의 예방을 바라는 선남선녀들, 그리고 알레르기 및 면역계 질환, 자가 면역질환, 대사성질환 등 체질과 관련된 난치병의 치료를 간절히 원하는 환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바이블이 될 것이다. 또한, 평소 과학과 철학, 생물학에 관심이 지대한 열혈 독자들에게도 지적 호기심을 한껏 충족시켜 주는, 풍성한 깨달음의 기쁨이 될 것이다. 8체질의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이 책을 잡아라! 뭇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모든 이여, 이 책을 읽어라! 8체질의학의 근본원리와 핵심 치료법을 당신의 작은 손에 확 움켜쥘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8체질의학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참된 건강을 이루어내자!
![]()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 조시현 저 / 18,000원 / 문학과지성사 “너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빚어온 몸이라면,
나는 어떤 몸으로 죽게 될까”
멸망하는 우주 속 사랑이라는 환상통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존재들 한국 문단의 새로운 스토리텔러 시인 조시현의 첫 소설집 멸망하는 세계에서 사랑을 발굴해내는 시인, 조시현의 첫번째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18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동양식 정원」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가 데뷔 이후 7년간 다수의 계간지와 웹진에 발표한 작품 중 여덟 편을 엄선해 엮은 것이다. 첫 시집 『아이들 타임』(문학과지성사, 2023)에서 하염없는 그리움 속에 놓인 미래의 ‘지구인간’과 가닿을 수 없는 존재 ‘엘리노어’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조시현은 이번 소설집에서 시와 소설의 장르적 경계를 허물어뜨려 문학작품의 미학적 성취를 다시 한번 이루어냈다. “글을 쓸 때 불과 뿔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그는 “보아야 할 것을 똑바로 보고 말해야 할 것을 분명히 말”(‘작가의 말’)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자신만의 문학적 궤적을 그려나가고 있다. 조시현의 소설은 “우주 밖으로는 절대 나갈 수 없”(p. 15)는 인간의 한계와 종말에 대해 말하면서도 지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존재가 남긴 ‘나사’를 손에 움켜쥔 채 사랑이야말로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으로 희망이라 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p. 32)이고,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는 상황에서도 조시현은 이 믿음을 빛줄기 삼아 환한 곳으로 나아간다. ![]() 천 장의 블라우스를 만들기 위해
세레나 발리스타 저 / 소니아 마리아 루체 포센티니 그림/만화 / 김지우 역 / 18,000원 / 이온서가 한 편의 시가 된 글로써, 아름답고 아득한 그림 속에서
온 힘을 다해 버텨낸 우리의 혜성들을 그려내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길을 비추다 찬란하게 폭발하는 예술의 빛, 그림책의 빛 세계적 아티스트들이 완성한 ‘세계 여성의 날’ 그림책 이탈리아에서 대표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내온 세레나 발리스타가 쓰고, 세계적인 일러스트 상을 여러 번 수상한 바 있는 소니아 마리아 포체 루센티니가 그린 『천 장의 블라우스를 만들기 위해』. 실존 인물과 실제 자료에 기반해 풍문과 오해 속에 가려졌던 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을 되살린다.
한 편의 시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 장엄하고 풍부한 표현력의 흑백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그림책만이 다다를 수 있는 또 하나의 경지를 보여준다. 그래픽노블과 일러스트북을 결합한 독특한 형식을 선보이며 2025년 볼로냐 라가치상 대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백 년의 시간을 잇는 철학의 깊이로 미래를 살아갈 힘을 전해주는 그림책.
세계 역사의 방향을 바꾼 하나의 사건, 그리고 특별한 목격자
1911년 3월 25일, 블라우스를 만드는 트라이앵글 회사가 위치한 뉴욕 애시 빌딩 9층, 10층에서 불이 났다. 단 18분 만에 146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에서 온 젊은 여성 이민자들은 129명이었다. 불타거나 질식해서 목숨을 잃고 혹은 탈출하려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가 혜성처럼 공중에 긴 자취를 남기고 땅으로 추락해 숨졌다. 화재가 나자 공장 사장은 탈출했다. 그런데 그 안에 있는 노동자들은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고용주들은 평소에 직원들이 봉제 작업 도중 복도로 나와 쉬는 일이 없도록 밖에서 문을 잠가놓았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화재 비상구는 일부러 망가뜨려놓았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문을 열고 탈출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 참혹하고도 비참한 화재 사건이 여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로 인해, 세계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는가 오래전에 시작된 그 변화의 흐름이 가리키는 곳 세레나의 친구이자 작가인 에스터 리초는 수년 전 『하얀 블라우스, 3월 8일 그 이면에 놓인 이야기』라는 책을 펴내며 잊혔던 1911년의 사건을 섬세하게 복원했다. 세레나는 이 책 출간기념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낡은 블라우스에게 자신의 사연을 들려달라고 부탁한다는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다. 세월이 오래 지나는 동안 ‘하얀 블라우스’에 얽힌 이야기는 오해되고 왜곡되어 무엇이 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인지 아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책 『천 장의 블라우스를 만들기 위해』에 등장하는 인물, 사건은 모두 실화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소니아는 이 책의 그림을 제안 받고 역사적 사실이 주는 엄청난 무게감에 두렵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 나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느꼈다. 소니아는 기꺼이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감동적인 그림들을 하나하나 완성한다. 모든 여성을 위한 두 명의 여성 결코 꺼지지 않을 혜성의 빛 다소 가슴 아픈 고통이 느껴짐에도, 블라우스는 지은이의 제안을 즉시 받아들인다. 더는 잊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블라우스는 자신이 보았던 것들, 동료들, 일했던 소녀들, 특히 이 책의 주인공인 두 명의 로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름이 같았던 언니 로즈와 동생 로즈. 이 둘은 타국에서 서로에게 ‘자매’가 되어주었다. 화재가 난 후 공장 사장들은 재판을 받았다. 많은 이들이 사장 편에서 유리한 증언을 해주어서, 사장들은 그저 풀려났다. 두 명의 로즈들은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다. 로즈들은 또한 그때까지 남자들만 있던 노동조합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가입해 ‘없는 존재’처럼 여겨지던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로즈들은 끈질기게 지구 위를 같이 돌며 버티었던 빛나는 혜성들을 기억하였다. 그러자 세계는 각도를 조금 틀었다. 그러자 나아가는 방향이 바뀌었고, 더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지금도 바뀌어가고 있다. 참혹한 역사 속에서 환히 빛나던 혜성의 빛을, 이 책은 눈부시게 전하고 있다. ☞ 선정 및 수상내역 2025 볼로냐 라가치상 논픽션 부문 대상 수상작 국제앰네스티 이탈리아 지부 후원 도서 2024 이탈리아 Premio Il paese delle donne 시각예술 부문 선정 도서 ![]() 감자의 멜랑콜리 이기성 저 / 12,000원 / 창비 흐려진 존재들을 다시 숨 쉬게 하는 다정한 숨결 부서지고 춤추고 사랑하는 영혼들을 위한 희망의 노래 슬픔으로 얼룩진 삶의 장면들을 감각적 이미지와 깊이 있는 감성의 언어로 묘사해온 현대문학상 수상 시인 이기성의 『감자의 멜랑콜리』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폭력과 광기가 뒤섞인 시대의 그늘진 이면을 꿰뚫어 보며 삶과 죽음의 문제를 성찰하고 시대의 불행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깊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분노와 슬픔을 간직하면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다정한 결기와 기품”(김경후, 추천사)이 깃든 견결한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현실의 고통에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이를 기억하고 새기려는 단단한 결의가 드러나는 시편들에서 시인이 우리의 삶과 시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해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 예기치 못한 비극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한복판에서도 뜨거운 마음으로 타인의 슬픔을 헤아릴 때 비로소 피어나는 희망을 아는 그의 시적 화자들은 이번 시집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어떤 노래는 하얀 실처럼 끝없이 흐르고“ 이기성의 시는 불행한 시대와 “새의 발가락처럼 검게 오그라든 영혼”(「창고」)을 위한 “희고 검은 애도의 노래”(추천사)이자 “희미한 근대의 냄새를 환기”하는 “검게 탄 입술의 노래”(「흑백사진」)이다. 이는 망가진 삶을 직시하고 스스로를 성찰하여 이윽고 투명한 감각으로 발화하는 목소리로 나타난다. 안온한 풍경의 이면에 주목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도시의 아픈 과거를 발굴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것은 단지 기억의 환기가 아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이런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는 걸/너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시인은 간절한 심정으로 쓴다, “마지막 남은 손이 사라지기 전에”(「편지」). 망각의 기억 속에서 지난날의 슬픔과 상처를 끄집어내어 삶의 비애와 불의한 시대의 실상을 온전하게 기록하고자 한다. 시인은 꿈인 듯 현실인 듯 “검은 외투를 입은” 한 청년이 “검은 법전을 끼고 평화시장 쪽으로 걸어가는”(「눈의 아이」) 모습을 본다. “검은 밤에 잠긴 흐릿한 얼굴”들을 기억하고 “입안 가득한/재의 맛”(「재단사의 노래」)을 감각하는 한, 전태일은 단지 역사적 기억의 대상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비참한 현실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시인이 불러내는 전태일은 비단 ‘1970년의 전태일’일 뿐 아니라 “커다란 접시를 들고 빵을 기다리는 사람들”(「빵」), “빌딩 옥상 망루의 농성자”(「싱크홀」), “맨발로 사라진 아이를 찾아서” 울며 헤매는 “도청 앞 누더기를 입은 늙은 여인”(「구두」) 같은 또다른 ‘전태일들’이다. 그러나 지난날의 고통과 상처를 망각한 채 “어떤 슬픔도 없이” 그저 ”조용히 먹는 일에 열중”(「식인의 세계」)하는 인간의 모습에 수치를 느끼며 시인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인간이?”(「고기」) 울부짖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앞장서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는 영혼들을 품기 위해 시를 쓴다. “시간의 앞면과 뒷면을 마주 보게 하고 어제의 얼굴과 햇빛과 오늘의 이야기를 이어서” “애도라는 외투”(「애도라는 외투」)를 짓는다. 흩어진 삶의 조각을 한땀한땀 연결하는 바늘이 되어 상실과 망각의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시인은 오늘의 현실에 드리워진 잿빛 “불행의 얼굴”(「불행」)을 냉철히 직시한다. 먼지처럼 쓸쓸히 스러져간 존재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 무언가를 오래 생각”(「창고」)하고, 고통의 세월이 흘러도 남아 있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다. 애도는 늘 불완전하고 “애도의 매끈한 표면 아래 남아 있는 울퉁불퉁한 것들을 더 의식할 수밖에”(서영인, 해설) 없지만 그 거친 얼굴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영혼의 순수한 본질을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직은 “우리에게 무언가 남아 있다”(「애도라는 외투」)는 가냘픈 희망을 다시 새기는 것은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시인은 불현듯 “시인의 죽음”과 “시인이 없는 세상”(「시인의 죽음」)”을 말하지만 불행한 시대일수록 “회색 먼지와 재로 뒤덮인/오래된 종이”(「거미 여인」)에 시를 적는 시인의 존재는 선명하게 반짝인다. “손때 묻고 더러운 빈 종이, 그런 시를 들고 나는 영원히 한 시를 떠나지 못한다”(「한 시에 남아 있는 것」)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는 한, “우리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가 있다.”(시인의 말) 그 노래가 세상의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울려 퍼질 때, 선하고 아름다운 “시인의 영혼처럼 환한 빛”(「천사에게」)이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를 것이다. ![]() 하이퍼큐비클 백가경 저 / 12,000원 / 문학과지성사 “이것은 놀이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지금만 있을 뿐입니다오직 한 번만 있을 뿐입니다” 출구 없이 확장되는 공간이 만들어낸 현실 조정 시간 업그레이드된 미래적 시어를 설계하는 백가경의 첫번째 시집
-‘시 찾기 노트’(『시 보다 2023』, 문학과지성사, 2023, pp. 124~25) 에서나의 모호한 ‘시 찾기’ 과정에서 단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스터리함, 기이하고 으스스함 그 자체다. 그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내 것이다. 나는 이 힌트를 쥐고서 시를 찾기 위해 프릭 쇼를 열었던 오래된 서커스 천막, 이름 모를 건축가가 설계한 사형 집행소, 바퀴벌레들이 춤추는 지하의 클럽, 인간의 멸망을 기억하는 바이러스의 숙주, 아이도 노인도 거부하여 언젠간 모두의 입장을 금할 것 같은 으리으리한 펜션 등을 머릿속에서 짓고 부수고 다시 건축하여 그 안에 들어가본다. [……] 내가 초대한 기이하고 으스스한 이곳이 당신들에게 조금 재미있기를 혹은 조금 웃기기를 그것도 아니면 조금 막막하기를,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조금 살 만해지기를 (가장) 바란다. 명징한 언어로 현실 너머 다른 차원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확장해나가는 백가경의 첫번째 시집 『하이퍼큐비클』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12번으로 출간되었다. 백가경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 보다 2023』에 작품이 수록되는 등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김현ㆍ김행숙ㆍ박준 시인, 2022 『경향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이라는 평처럼, 그는 잘 짜여진 형식과 구조 위에 지극히 현실적인 현상을 자유롭게 구축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 보인다. 시집의 제목인 “하이퍼큐비클”은 정사각형의 모든 변을 시공간을 초월해 n차원으로 확장한 다포체 하이퍼큐브, 사무실 등 공간 속에 구역을 구분 짓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를 뜻하는 큐비클로 이루어진 조어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실의 벽과 인간을 가두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출구 없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총 4부로 구성된 53편의 시 속에서 비극적 풍경은 미래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기존의 관습들은 본 적 없는 형태로 부서지고 재탄생하는 장면이 하나의 놀이처럼 펼쳐진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놀이로 전복시키면서 놀이의 “일원이 되지 않고 즐거워”(「관성에 젖은 사람이 반복적인 일상과 구획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포스러운 시도」)지는 익숙하고 낯선 세계,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하이퍼큐비클』 세계가 우리 곁에 도착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무엇을 할 건가요?” -트랜스 상태의 노동자 차원에서 콘크리트와 철골구조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네 면의 벽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공기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 암흑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언어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옥탈」 부분 이 시집에는 생존을 위해 매일 업무 공간에 갇혀 비슷한 일을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조난당한 큐비클과 트랜스패런트칼라」의 주석에 “이곳에서 일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과로 상태다”라는 구절은 ‘시인의 말’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이트칼라의 진화 버전인 ‘트랜스패런트칼라(TC)’는 시공간을 초월해 일하다 일과 일이 아닌 것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은 현실이 아닌 하이퍼큐브가 확장한 새로운 차원이고, TC는 멸종 위기 개체이며, 화자는 TC를 “몰카”로 관찰하고 관객에게 중계하는 중이다. 파티션에 갇혀 “오류와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는 사무직 노동자가 시 속 차원에서는 보기 드문 인물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딸칵” 하는 소리가 시 전반에 울려퍼지며 “혈중 산소가 적”어지고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때까지 개미처럼 일하는 모습은 마치 오늘날 현대인을 비유하는 듯 보이지만, 백가경의 세계에서는 재미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출구가 없는 곳에서 노동자의 양상이 변모하다 끝내 희귀한 사건이 되는 일은 「사이파이 사일런스관 애장품 가이드 투어」에도 드러난다. 이 시의 화자는 기원전 3세기 철학자인 ‘사이파이 사일런스’에 대한 전시물을 관객에게 설명해주는 가이드다. 그에 따르면 사이파이는 생전 “욕조를 만들다 관을 만들고 관으로 만들던 것을 욕조로 만”들던 한 석공에 대한 연구에 탐닉했는데, 그 석공은 “‘평생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 욕조와 관을 깎”다가 일명 “교차 관-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누운 채 “행복한 최후를” 맞이한다. 반복되는 삶 속 자유를 잃고 쓰러져가는 우리에게 탈출구는 죽음뿐이라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대목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 속에서 이것은 전시관에서 들려주는 아득한 과거의 일이며,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찰나의 시간 동안 지구형 행성의 ‘고대 인류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러니 오작동이 생겨 죽음 또는 낯선 차원에 이르더라도 “코드를 꽂는 정도의 시간”만큼만 “여유를 갖고 기다”리면 된다. 시집에서 말하는 노동자의 공간이 꼭 파티션으로 채워진 사무실이나 방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디어 라이더」는 택배 배송 기사의 작업 현장을 박스에서 기어 나온 “벌레 하나”가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결국 과로로 쓰러진 노동자가 영면하는 곳은 택배 수신처 문 앞 “박스 테이프를 떼다 만 종이 박스” 안이다. “곧 벽돌공을 그만 둘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티며 하루하루 벽돌을 쌓던 벽돌공은 어느 날 그것이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이었다”(「벽돌공의 벽돌벽」) 는 걸 문득 깨닫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과거 전태일이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속았다는 기분 든 적 없어? 좋은 밤 보내길」)라고 외치던 비극적인 시대가 TC와 석공, 택배 기사, 벽돌공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인식을 하는 순간, 백가경의 시적 공간은 “복제된 현실이 눈앞에 있다는 인식은 작은 틈을 만”들고, “벌어진 틈새를 비집고 나온 무언가가 시공간을 비틀고, 닮은 모습만큼 자리를 넓”(p. 215)힌다. “나쁜 소식은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우리가 곧 낙하한다는 것 좋은 소식은 바닥없는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 -계급 구조와 약자의 차원에서 『하이퍼큐비클』 전반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기운은 이처럼 개선되지 않고 점점 더 곪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에 따라 양극단으로 나눠지는 계급 구조에서 기인한다. [……] 백가경은 깊이를 잴 수 없는 겹겹의 지층을 낱낱이 살피며 시간과 공간, 차원을 넘나드는 고고학적 탐구로 인간을 발굴한다. 새삼스럽지만 낯설게, 인간이어야 하는 인간을 칸막이 밖으로 구출하는 그의 시는 닫힌 세계의 출구를 연다. -소유정, 해설 「입체 전시 ‘하이퍼큐비클’을 위한 서문」(p. 225)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낳은 계급 구조는 노동자의 계층 상승을 어렵게 하고, 태어날 때부터 성별이 정해져 그에 따른 시스템이 고착화된 세계 속 인간은 성차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하이퍼큐비클 속 인간은 지층을 이루는 퇴적물의 유해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해설, p. 222). 백가경은 사회적 문제를 도표, 그래프, 기둥, 화살표 등에 적용해 시각화시키고 현실을 변형된 차원으로 구현하며 복잡해진 형식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2022년 신당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신당역 사망 사고 관련 재발 방지 대책 아이디어 제출 양식」은 연번, 내용, 기대 효과, 비고를 정리한 4열 3행의 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마치 누군가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절차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 내용이 국민적 관심이 빨리 사그라들기만을 바라는 교통 공사 “영업 사업소” 직원들의 마음처럼 직관적이고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얘들아 행복한 해피를 봐 행복해” 행의 ‘기대 효과’는 “슬픔은 주머니에 넣”는 것이고, “유능한 공무원의 죽음 앞에서 유능한 아이디어 하나씩 유능하게 내주세요 뽑히면 뭐 줌”이 ‘비고’란을 채우고 있다. 젠더적 갈등으로까지 번졌던 사건임에도 뚜렷하게 개선된 점이 없는 작금의 현실을 고발하는 음성처럼 들린다. 한편 「기둥 세우기」에는 절취선으로 나뉜 세 개의 칸이 등장한다. 첫번째 칸은 프랑수아 2세의 부인이자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 두번째 칸은 예술가 차학경의 생애가 담겨 있고, 세번째 칸은 비어 있다. 권력 다툼에서 패한 후 단두대에서 “십자가와 기도서, 묵주 두 개를 허리춤에 찬 채”로, 남편의 작업실을 찾아가다 “건물 관리인에게 강간과 살해를 당”한로 채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생애들이 각 칸을 채우고 있다. 이제 화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항은 “세번째 칸을 채우고 절취선을 따라 자”르는 것이다. 그다음에 “기둥의 끝에 내 사지를 묶”어 “고문하”고 “고통을 주”고 “(세 개의 기둥을) 여행하”도록 권하면서 이 이야기가 유별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속한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위로하는 듯하다. 여자아이 남자아이 허리가 굽은 노인 나이 든 여자 다리를 다친 부랑자 팔을 잃은 소녀 어제 태어난 아기 죽어가는 아기 -「크리스마스」 부분 『하이퍼큐비클』은 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여러 번 호명한다. 고용주가 아닌 노동자 역시 갑을 관계로 볼 수 있을 터. 계층을 허물거나 관계를 전복하기 어렵다면 결국 우리 앞에는 비극적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가경은 “암시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지치는 법 없이 3차원의 공간을 “걷는다”. 곧이어 “날씨가 날씨이기를 멈추게 하고” “세상이 세상이기를 멈추게 하고” “빵이 빵이기를 멈추게 하는” 고차원의 순간으로 시공간을 끊임없이 비튼다. “그런 시를 데려오리라”(「Dummy No. 1-캔버스 위 15개의 구멍, 다회성 퍼포먼스 영상 「환촉」(60min), 40x164cm」)라며 걸어가는 단단한 다짐은 지금도 계속 확장하며 우리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회전 때마다 비틀렸던 발목이 한순간 똑바로 서는 기쁨을 만끽하며!”(「표류하는 세계의 극장」). |